악당 가족이 독립을 반대한다 2 –
51화. 절대, 들키면, 안 된다!
5–6 minutes

헙, 내 눈빛에 탐욕이 제 잘못을 깨달은 건지 앞발로 입을 틀어막았다.
왜 시무룩해하는 건데……. 어쨌든 굉장히, 아니, 엄청나게! 좋은 능력인 건 확실했다. 이 능력이라면 자본이 충분하지 않아도 금세 돈을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적은 돈을 큰돈으로 불려야 하는 내게 딱 알맞은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머릿속에 능력을 활용해서 돈을 벌 무궁무진한 방법들이 샘솟았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한껏 올라가려는 광대를 가렸다.
‘광맥? 찾을 수 있나? 부동산으로 눈을 돌려? 아니면 인재 발굴도 나쁘지 않지?’
후후, 후후후……. 앞에 레이안과 탐욕이 있건 말건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을 그때였다.
돌연 탐욕이 거하게 트림했다. 그러더니 앞발로 동그란 배를 통통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
탐욕의 주식은 내 감정 중 탐욕이라고 했다. 배부르다는 건 즉…….
내 감정이 탐욕으로 가득 찼다는 뜻이겠지. 그래, 나도 인정한다. 탐욕스러웠던 거. 하지만 누구나 그런 능력을 손에 넣게 된다면 이런저런 상상을 하게 될 거라고. 내가 유독 탐욕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럼 오늘 당장 써 볼래. 저번에 갔던 경매장으로 가자.”
빨리 능력을 사용하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어떤 식으로 가치가 눈에 보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하지만 탐욕이 폴짝 뛰어내려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는 내 앞을 가로막았다.
탐욕의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가소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흑여우가 비웃으니 묘하게 열 받는데…….
실망스럽긴 하지만 아예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그런 엄청난 능력을 무한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겠지. 나는 한계가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탐욕에게 물었다.
하루에 10시간? 아니면 으음, 5시간? 그 정도도 부족하지만 나쁘지 않다. 아껴 쓰면 되니까. 하지만 탐욕의 대답은 그런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다 못해 아예 산산조각으로 박살 내 버렸다.
하루 3초도 아니고 일주일에 고작 3초? 경매장에 죽치고 앉아 귀한 물건을 헐값에 사들이려고 했던 완벽한 계획이 물 건너갔다. 충격에 입을 떡 벌린 나를 올려다보며 탐욕이 킥킥 웃으며 덧붙였다.
[당연함. 내가 봉인되어 있다는 것 잊지 않길 바람.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는 없음. 대신 봉인 안 된 본체는 짱 셈.]
비꼬는 말이었는데 탐욕은 내 말이 기쁜지 앞발로 입을 가리며 으힛힝, 하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허탈해진 내가 소파에 널브러져 앉아 있자, 탐욕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최대한 심드렁한 척하며 물었다.
나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봉인석 안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 녀석이 대가랍시고 요구한 게 수명의 9할이었다. 그마저도 시한부라고 거짓말을 하니 전부 내놓으라고 했었지.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목숨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탐욕이 나를 꼬시는 것처럼 요망한 표정을 지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깜찍해라.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서 넋 놓고 보고 있자 레이안이 커다란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재롱인 줄 알았는데…….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저래 보여도 세계를 멸망시키려 했던 7대 죄악 중 하나입니다.”
겉으로는 사랑스러운 아기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본질은 여신 이르칼라가 지상을 손에 넣기 위해 창조한 죄악이었다. 성격 또한 탐욕스러운 제 속성 그 자체라 인간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가 많았다. 물론 인간이 아니니 인간성이 결여된 건 당연하겠지만.
탐욕이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직도 내 눈가를 덮고 있는 레이안의 손을 덮고 끌어내렸다. 곧바로 붉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맞닿은 레이안의 손은 장갑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어쩐지 뜨겁게 느껴졌다. 레이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너무 선을 넘는다 싶으면 오늘처럼 말해 줘. 더 조심할 테니까.”
내가 천천히 손을 놓자 레이안이 내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붙잡고 있다가 떨어져 나가서인지 잠시동안 허전한 감각이 들었다.
[당사죄악 앞에 두고 아주 가지가지 함. 나는 아주 그냥 없는 죄악임? 살림을 차리셈.]
탐욕이 불만스러운지 앞발을 탁 굴렀다. 아까부터 계속 무시당해서 심통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뭐 어쨌든 내가 봉인석을 들고 있는 이상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기도 하고. 임시라도 주인이니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탐욕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더니 예의 사이비 대사를 내뱉었다.
[나의 주인은 오로지 위대한 신 이르칼라 님이시다. 이르칼라 님을 경배하라!]
탐욕을 보던 레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신 이르칼라가 창조한 죄악이라니 저렇게 맹목적으로 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탐욕의 목덜미를 덥석 쥐었다.
[뭐, 뭐임! 나, 나를 놓으셈!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딨음!]
탐욕이 발버둥 쳤지만 레이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게 진지하게 말했다.
“물리적으로 압력을 가해 봉인석으로 역소환하는 것으로…….”
역소환을 무한 번 반복하다 보면 처지에 순응한다는 요지였다. 즉, 폭력으로 다스리겠다는 뜻이다. 레이안이 무엇을 제안한 건지 이해한 탐욕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동그래졌다. 탐욕이 애절하게 절규했다.
[반대임! 결사반대임! 이르칼라 님은 이런 나, 제법 귀엽다고 하셨음!]
불리하니 이제 자기를 동물이라고 부르는 데 거침이 없다. 커다란 눈에 눈물까지 글썽글썽 달고 있는 모습이 비 맞은 흑여우처럼 가여웠다.
“그냥 내버려 둬. 말투가 좀 열 받기는 하는데, 언어의 경제성이라잖아. 콘셉트에 충실하게 둬야지.”
레이안은 못마땅한 얼굴로 탐욕의 목덜미를 놓아주었다.
탐욕은 내가 자기를 레이안에게서 지켜 줄 거라 판단했는지 곧바로 달려와 내 품에 포옥 안겼다.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
하지만 그 틈을 타 탐욕의 조그마한 발을 조몰락거리는 건 참을 수 없었다. *** 일전에 봉인석을 낙찰받았던 경매장에 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능력을 시험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혹시나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있으니 레이안에게 후드 달린 망토를 빌려 입었는데, 길이가 길어 손등을 다 덮고도 한참 남을 정도였다.
두 손을 쭉 내밀고 불퉁하게 중얼거리자 레이안이 손수 소매를 접어 주었다. 단장의 명으로 망토 두 개를 가지고 왔던 마리오가 두 손가락으로 제 두 눈을 푹 찔렀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
평소 레이안이 하는 행동과 괴리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로선 레이안이 다른 용병 단원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왜 저렇게까지 난리를 피우는지 의아했다.
내 요청에 레이안이 소매를 한 번 더 접어 주었다. 마리오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흥!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마리오가 테이블 위에 신분패를 올려놓고 단장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레이안은 마리오가 나가든 말든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안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리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분명 주워듣기로 용병왕 이안은 평민 출신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에스코트나 귀족들의 예법이 이렇게 능숙한 걸까. 단기간에 익혔다기엔 몸에 밴 습관 같았다.
얀시에게 레이안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으니 머지않아 레이안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겠지. 우리는 곧장 경매장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도 탐욕은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안 돼. 반려동물 안고 다니면 너무 눈에 띈단 말이야.”
탐욕은 봉인석 안이 답답한지 연신 투덜거렸다. 내가 한숨을 내뱉자 레이안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레이안의 반협박 덕분에 탐욕은 정말 조용해졌다. 경매장에 입장하는 건 이전과 마찬가지로 별 탈 없이 수월했다. 마리오가 마련해 준 신분패를 보여 주자 얼굴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그런데 경매장 복도를 걷는 동안 레이안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이미 한 번 피습을 당한 경험이 있던 터라 긴장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바짝 얼어붙자 레이안이 나를 보호하듯 끌어당겼다.
“목적은 암살이 아닌 보호인 듯합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대화하는 동안 어느새 우리는 경매가 진행되는 무대 앞 좌석에 도착했다. 신분이 높은 자라면 4대 가문의 직계나 방계일까. 누구든 마주치면 귀찮을 것 같으니 꼼꼼하게 후드를 뒤집어썼다.
자리에 앉은 나는 얼른 해치우고 나갈 작정으로 경매 물건들을 유심히 보았다. 그런데 가치를 확인해 볼 정도의 물건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아무 물건에나 써 봐야 하는 걸까 고민할 찰나.
분명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익숙한 음성이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후드를 쓰지도 않고 당당히 얼굴을 드러낸 옆모습을 본 나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2황자 벨트란이 내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호위를 잔뜩 끌고 온 고위 귀족인 줄 알았던 존재가 당신이었어? 절대, 들키면, 안 된다!

52화. 형님의 여자를 뺏는다
5–7 minutes
하필 오늘 이 시간 경매장에 방문한 인간이 2황자라니, 상당히 곤란했다. 2황자야말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 1위였기 때문이었다.
‘이 인간, 아직 내가 자기한테 관심 있는 줄 알고 있을 텐데…….’
페르디아 공작의 보좌관이었던 헥토르 아롤드의 변절 증거를 잡으려고 일부러 흘렸던 거짓 정보였다. 여자 좋아하고 술만 퍼마시는 방탕한 놈을 좋아할 리가. 암만 얼굴이 봐줄 만해도 문란한 행실은 봐줄 수 없었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걸까, 탐욕이 불쑥 물었다.
대충 대답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잘빠진 뒤통수를 보며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어차피 경매장 안은 어둡고, 또 뒤를 돌아볼 일이 없을 테니까 별일 없을 것이다. 좋아. 무조건 다음 경매 물건 나오면 바로 능력 써 보고 나가는 거야. 마침 새로운 물건이 올라왔다. 경매사는 물건 위에 덮여 있던 천을 걷어 내며 소개했다.
“이번 물건은 3년 전 토리페스 해안가에서 발견된 골동품 반지입니다. 작은 보석이 다수 소실되었지만 중앙의 다이아몬드는 재가공할 가치가 있습니다. 시작가는 500라리트입니다!”
정말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반지라 일주일에 한 번 쓸 수 있는 죄악의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에 회의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능력을 사용할 거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경매 물건인 골동품 반지 위로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게, 정보가 글자로 나타나는 거였어? 놀라움도 잠시, 나는 얼른 글자를 읽었다. 능력 발동 시간은 고작 3초였으니까. [1천 년 전 토피세스 해저에 수몰된 난파선 페즐 호의 보물. 네스킬 1세가 연인인 설튼 백작 부인에게 선물한 반지로…….] 3초가 지났기 때문인지 뒷글자는 읽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처음 능력을 사용한 건데, 단번에 잭팟이 터져 버렸다……. 나는 바닥에 던져 놓았던 패들을 얼른 주워 들었다.
그사이 경매가는 개미 눈곱만큼 올라가고 있었다. 보아하니 저 볼품없는 반지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기껏해야 반지의 금을 녹이고 가운데 박힌 다이아몬드를 빼다 재가공할 목적인 게 분명했다. 아무도 반지의 가치를 모른다니, 이 기회를 놓칠 쏘냐.
나는 패들을 번쩍 들며 입을 열었다. 본격적인 경매 참전의 서막을 알리는 위대한 외침이었다.
놀랍게도 나와 동시에 똑같은 금액을 호가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앞에서 들려왔다. ……바로 앞에서. 하필 목소리가 겹치는 바람에 뒤에 앉은 내게 흥미가 생겼는지 앞에 있던 사람이 홱 고개를 돌렸다. 분명 후드를 꾹 눌러썼는데, 어떻게 알아본 건지 남자는 해맑게 웃으며 나를 불렀다.
으악! 이 2황자 놈이! 왜 돌아보냐고! 나는 절망했다. *** 경매장에 가기 몇 시간 전. 2황자 벨트란은 하품을 쩍 하며 다리를 책상 위에 턱 올렸다. 개인 수업을 진행하던 철학 스승이 움찔, 뒤로 물러났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빽빽한 수업은 지루하기만 했다. 도통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도 모르겠고, 제 눈치를 보며 꾸역꾸역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그저 짜증 났다. 마음 같아서는 이딴 수업 내팽개치고 최근에 새로 생겼다는 클럽에나 가서 진탕 마시고 싶지만 어머니인 살바트리체 황비가 두렵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벨트란.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가 되어야 한다. 내가 너를 그리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부디 행실을 똑바로 하려무나. 황제 폐하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벨트란의 유년 시절부터 살바트리체 황비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가히 집착적으로 매달렸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이 되어 눈을 감는 그때까지 살바트리체 황비의 감시하에 살아야만 했다. 턱, 숨이 막혔다. 처음에는 황비의 바람대로 성실히 수업에 참여했지만 애석하게도 벨트란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지 못했다. 그럴수록 형님인 1황자와의 격차는 여실히 벌어졌다. 황비는 그를 채찍질했고, 부황은 그를 냉담하게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권능마저 1황자 아덴미르만 못했기에 벨트란의 자격지심은 날로 커졌다.

날이 갈수록 살바트리체 황비의 집착은 심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벨트란은 엇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든 어차피 형님을 따라잡을 순 없어.’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유능하지 않아도 어차피 어머니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줄 테니까. 개인적 능력은 형님이 뛰어나지만 외척의 힘은 살바트리체 황비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벨트란은 적당히 나돌면서도 수업은 착실히 들어가는 등 다소 모순적으로 행동했다. 살바트리체 황비는 딱 그 정도까지는 눈감아 주었다.
‘어차피 황제가 되면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때는 이딴 지루한 수업 따위는 필요 없겠지.’
그러니까 황제가 될 때까지만 참자. 그러나 참는 사람 치고 벨트란은 수업 시간 중에 제 시종이 공수해 온 신문을 대놓고 읽었다. 수업 태도가 매우 불량했지만 스승은 아무 소리도 못 했다. 아무리 저명한 아카데미의 교수가 온다고 한들 감히 황족인 자신에게 태도를 지적할 수 없었으니까. 앞에서 스승이 뭐라 떠들든 벨트란은 턱을 괸 채 신문을 넘겼다. 두 번째 페이지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었다. 무려 도로테아 앙겔로스가 회합에서 수모를 당했다는 내용의. 도로테아라면 황비가 특히 총애하는 영애라 자신의 파트너로 자주 연회에 함께 참석하곤 했다. 이것저것 바라는 게 많아 성가시긴 했지만 그래도 옆에 달고 다니기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쯧, 벨트란은 혀를 찼다. 그렇다면 이제 누구를 파트너로 데려가야 하나.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엘로디 페르디아. 페르디아 공작의 사생아이자 1황자 아덴미르의 약혼자였다. 그리고, 페르디아에 심어 놓은 세작에게 듣기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 황비 쪽 수하에게 들은 정보가 있었다. 엘로디 페르디아가 1황자에게 파혼서를 보낸 적이 있다는 정보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머지않아 파혼이 이루어질 터.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된 엘로디가 형님에게 파혼을 요구했으리라.
벨트란은 기꺼이 엘로디를 제 약혼녀로 받아 줄 용의가 있었다.
묘한 희열이 벨트란을 감쌌다. 엘로디의 성격이 포악한 줄로만 알았는데 지난 연회에서 대화해 보았을 때 쓸데없이 말대답도 하지 않고 고분고분해서 마음에 들었다.
외모만큼은 누가 뭐래도 천사 같았으니까. 더욱이 페르디아 가문의 힘 또한 빌릴 수 있을 테니 장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벨트란이 엘로디를 두고 이런저런 망상에 빠져든 사이, 철학 수업이 끝났다. 2황자의 눈치를 보던 철학 스승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건성으로 대답한 벨트란은 건들거리며 방을 나섰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벨트란의 보좌관이 황급히 따라붙었다.
“어디 가십니까, 전하. 이제 승마 수업 시간입니다.”
“말이야 그냥 타면 되는 것 아냐? 됐어, 황성 밖으로 나갈 것이다.”
뭐가 문제야? 벨트란은 비죽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스산했다. 살벌한 눈빛에 압도당한 보좌관은 다급하게 호위를 붙일 뿐 더 이상 벨트란을 붙잡지 못했다. 벨트란은 술집이나 클럽에 가는 대신 경매장에 들어갔다. 종종 경매장에 가 누군가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엄청난 금액으로 사들이며 쾌락을 느끼는 게 그의 취미였다. 자신이 가짐으로써 누군가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그렇게 다소 권태로운 기분으로 경매장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때였다. 딱히 갖고 싶은 물건이 나오지 않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패들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고 있을 때였다.
제법 괜찮은 물건이 나왔다. 길 가다 떨어져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 같은 보잘것없는 반지가.
황비에게 골동품 모으는 취미가 있었으니 오늘 수업 빠진 것으로 추궁당하면 선물이랍시고 내밀 생각이었다. 벨트란은 패들을 치켜들었다.
공교롭게도 동시에 호가를 한 사람이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벨트란은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엘로디 페르디아였다. 호색한으로 유명한 벨트란이었기에 아무리 어두워도 여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침 아까까지 엘로디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벨트란은 그녀를 반갑게 불렀다. 호위 한 명과 함께 온 건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는 호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오로지 엘로디에게만 집중했다.
엘로디가 뺨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귀엽게도 부끄럼을 타는 듯했다. 우연히 온 경매장에서, 하필 같은 물건을, 같은 가격으로, 그것도 동시에 호가하다니.
벨트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
뺀질뺀질한 벨트란의 얼굴을 보며 나는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대놓고 싫은 티를 낼 수도 없으니 아주 곤란했다.
“찾는 물건이라도 있나? 공녀가 바란다면 대신 낙찰받아줄 수 있는데. 얼마라도 상관없어.”
대화하고 싶지 않은데, 벨트란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정신없는 와중에 경매사가 외쳤다.
“525라리트. 525라리트 나왔습니다! 더 부르실 분 없습니까?”
1천 년 전 토피세스 해저에 수몰된 난파선 페즐 호의 보물! 2황자고 뭐고 저 반지를 사수해야만 했다. 저 자식 때문에 저 반지를 낙찰받지 못하면 억울해서 죽을 거다.
나는 말을 거는 벨트란의 말을 매정하게 끊으며 패들을 번쩍 들었다.
“540라리트, 540라리트 나왔습니다! 최고가 540라리트. 더 부르실 분 없습니까?”
무려 천 년 전 보물을 고작 540라리트에 낙찰받았다는 사실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로써 독립까지 한 걸음 성큼! 그렇게 한창 새로 생긴 능력에 기뻐하던 중-.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벨트란이 다소 황당하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벨트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다…….

53화. 그러니 저를 이용하세요
6–8 minutes
벨트란의 성격은 오만의 극치였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고, 본인이 가장 귀한 줄 아는 전형적으로 이기적인 성격. 그러니 자신을 황족으로 극진히 대우해 주지 않으면 편의점 진상 손님처럼 굴 것이 뻔했다. 어차피 반지도 내 손에 들어왔으니 이후 경매 물건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굳은 표정을 억지로 펴 비즈니스 미소를 지었다.
내 빈말에 벨트란이 우쭐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 정도 추켜세워 줬으면 됐겠지. 나는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며 숨도 쉬지 않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럼 전 다음 일정이 있어서 얼른 반지를 받고 가 봐야겠어요.”
나는 벨트란에게 붙잡히기 전에 얼른 경매장을 빠져나왔다. 레이안은 돌발 상황이 연이어짐에도 착실히 내 곁을 지켰다.
하마터면 벨트란에게 붙잡힐 뻔했지만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지난번 탐욕의 봉인석을 수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직원에게 안내받아 어느 방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직원이 계약서와 물건이 든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먼저 물건을 확인했다. 듬성듬성 보석이 빠져 있는, 아까 본 모습 그대로의 반지였다. 다음으로는 계약서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두 번째 계약이라고 계약서를 허투루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위약금 부분을 꼼꼼히 읽고 있을 때였다. 나를 유심히 보던 직원이 ‘아!’ 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번에 형편없, 아니, 붉은 보석을 낙찰받으신 고객님이시군요!”
마침 형편없는 붉은 보석 당사죄악이 끼어드는 바람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형편없는 붉은 보석이 자기라는 걸 알면 또 얼마나 길길이 날뛸까. 오늘 내가 낙찰받은 반지를 흘끔 본 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한마디했다.
졸지에 나는 취향이 독특한 사람이 되었다……. 어쨌든 계약서를 살핀 결과 저번 계약서와 달라진 게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서명란에 서명한 후 상자를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고객님.”
두 번째 고객이라고 지난번보다 인사말이 길어진 점이 조금 웃겼다. 그 와중에도 탐욕은 시끄럽게 나를 추궁했다.
어쨌든 봉인석 속 탐욕을 만나기 전에 온 건 맞으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탐욕과 속으로 대화하며 경매장 건물을 막 빠져나왔을 때였다.
미간을 좁힌 레이안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이렇게 기다려 본 건 오랜만이라 제법 재미있었어, 공녀.”
아까 가까스로 떼어 놓았던 2황자 벨트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진저리를 치며 벨트란을 쳐다보았다. 그런 내 눈빛을 오해한 건지 그가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으며 시선을 피했다.

***
‘하! 나를 다시 만난 게 저렇게나 감격스러울 정도인가? 꼴에 부끄러움 탄다고 눈을 피하다니, 제법 귀엽군.’
너무 느끼한 나머지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려 버린 엘로디의 태도를 제 마음대로 해석한 벨트란은 자신이 생각하는 최대한의 멋진 미소를 지었다. 엘로디가 자신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여자였다. 특히 솔직하지 못하면서 속마음은 그대로 드러나는 점이 아주 귀여웠다. 벨트란은 엘로디에게 다가가며 지금까지 기다린 용건을 꺼냈다.
“이렇게 우연히 마주친 것도 신기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식사나 하러 가는 게 어떤가, 공녀. 이 근처에 제법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는데.”
“정말 안타깝게도 식사 후라 동행하지 못할 것 같네요, 전하.”
눈도 마주치지 않고 엘로디가 재빠르게 거절을 표했다. 이것 봐라? 벨트란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속마음을 추측했다. 분명 식사를 해도 안 했다고 거짓말하고 따라와야 하는 게 정상일 텐데, 거절한다?
겉으로는 튕기면서도 속으로는 오히려 상대방이 저돌적으로 밀어붙여 주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평소라면 그런 속 보이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테지만, 오늘의 벨트란은 제법 관대했다. 그는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들이대었다.
“식사가 부담스럽다면 카페에 가는 것도 좋겠지. 내 특별히 공녀를 위해 카페 한 채를 통째로 빌려 주지.”
드디어 엘로디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표정이 아주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훗. 감동한 것인가? 벨트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생각해도 감동할 정도로 엄청난 아량이었으므로. 하지만 돌아온 답은 그의 예상을 깼다.
이번에도 또 거절. 벨트란은 기가 찼다.
“어째서? 공녀를 위해 카페를 통째로 비워 준다는데.”
뭘 그딴 걸로 생색을 내냐는 듯 엘로디가 덤덤히 말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 벨트란은 벙찌고 말았다. 물론 페르디아의 여식이니만큼 돈은 차고 넘치겠지.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벨트란 자신이 ‘상대방을 위해서’ ‘특별히’ 카페를 빌려 시간을 내어주겠다는 부분이었다. 무려 짝사랑 상대인 자신이 이렇게나 신경 써 준다는데! 당연히 감동해서 따라와야 할 타이밍이었다. 벨트란이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할 그때, 엘로디가 해사하게 웃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깔끔하게 인사한 엘로디가 이번에도 재빠르게 사라지려고 할 때였다. 한 번 눈앞에서 놓친 전적이 있는 벨트란이 또다시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엘로디에게 넓은 보폭으로 다가가 손목을 붙들기 위해 제 손을 뻗었다. 탁-!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엘로디 옆에 있던 웬 남자가 제 손을 쳐냈기 때문에. 벨트란은 펄쩍 뛰며 분노했다.
숨어 있던 벨트란의 호위들이 떼거리로 나타나 그들을 에워쌌다. 그제야 벨트란은 아까부터 계속 엘로디 옆에 있던 남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흑발, 붉은 눈. 같은 남자가 봐도 홀릴 정도로 잘생긴 외모에 벨트란은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벨트란을 가만히 주시할 뿐이었다. 고작 눈빛만으로 압도되는 것 같았지만, 벨트란은 주눅 들지 않았다.
“호위인가? 하! 감히 호위 주제에 황족의 앞을 가로막아? 이는 분명한 불경죄다!”
짐짓 엄숙하게 외쳤지만 남자의 얼굴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나타나지 않았다.
순간 의아해진 벨트란은 호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계속 보니 낯이 익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그래, 저 얼굴은 분명…….
용병왕 이안이었다.
레이안이 서늘한 어조로 벨트란에게 경고했다. 페르디아 공작이 엘로디의 호위로 레이안을 붙인 것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만큼 2황자의 접근을 수월하게 막을 수 있을 거란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작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감히 평민 주제에 황족에게 명령하는 것이냐!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황제 폐하의 아들, 2황자다!”
2황자 벨트란이 생각보다 눈에 뵈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황제의 총애를 받는 용병이라든가, 황제의 개라든가, 그딴 건 벨트란에게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 그저 눈앞의 평민이 감히 명령했다는 사실에 분개했을 뿐이었다.
“네놈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부황의 총애를 받는다고 감히 이 몸을 함부로 대해도 될 성싶으냐?!”
윽박질러도 괘씸한 평민 호위는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오기에 사로잡힌 벨트란이 이를 박박 갈며 엘로디와 레이안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고는 엘로디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짝! 제 뺨을 때렸다.
그 돌발 행동에 벨트란의 호위들이 입을 떡 벌리며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나서서 막기에는 스스로 뺨을 때린 거라 명분이 없었다. 레이안이 조소를 지으며 벨트란에게 한마디했다.
레이안을 향해 한 걸음 떼려던 벨트란은 또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다리가 바닥에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레이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한순간에 팔도, 다리도, 심지어 입술조차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벨트란은 두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 벨트란을 비웃기라도 하듯 레이안이 여유롭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엘로디를 호위하며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2황자의 호위를 지나쳐 유유히 빠져나갔다. 벨트란의 두 눈을 부릅뜨며 있는 힘껏 외쳤다.
하지만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밖에 없었다. *** 페르디아 수도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탐욕이 봉인석 안은 답답하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탓에 결국 엘로디는 탐욕을 소환해서 품에 안은 채 걷고 있었다.
아까의 구경이 재미있었는지 탐욕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엘로디는 탐욕의 머리를 꾹 누르며 단호하게 경고했다.
얀시가 사람을 붙였을 테니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쉬이 방심할 수 없었다. 그런 엘로디의 걱정이 무색하게 레이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와 있을 때는 일정 거리 안으로 접근할 수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안의 보증을 얻은 탐욕은 더욱 당당해졌다. 바깥 구경을 해서 기분이 더욱 좋은 듯했다.
“어쨌든 고마워, 레이안. 2황자 때문에 곤란했는데.”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레이안은 벨트란을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안 할 겁니다. 황제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다면.”
하지만 아까 레이안이 용병왕 이안이라는 걸 알아챘는데도 오만방자하게 구는 걸 보면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사고를 치려고 해도 의외로 황비 선에서 거를 수도 있으니까. 그보다 엘로디는 아까부터 줄곧 묻고 싶은 게 있었다.
“2황자가 갑자기 본인 뺨 때리고 몸을 옴짝달싹 못 했잖아. 레이안이 한 거 아냐?”
예상대로 레이안은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엘로디의 심증으로는 분명 레이안이 한 일이었다.
어떤 능력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레이안은 마법과는 다른 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레이안은 4대 가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탐욕이 의미심장하게 레이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탐욕과 엘로디 두 사람 다 레이안을 흘끗흘끗 보고 있는데, 갑자기 레이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뜨끔. 몰래 훔쳐보고 있던 게 걸려 버렸다. 레이안이 어색하게 미소 짓는 엘로디를 진중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또 앞으로 2황자가 엘로디 님께 불순하게 접근할 겁니다.”
갑자기 그 이야기들을 왜 하는 걸까. 의아해하는 그녀를 레이안이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용하라니, 도대체 왜. 당황해서 엘로디가 그 자리에 멈춰 서자, 레이안도 따라 멈추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무저갱 속, 유일한 구원의 빛.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당신을 기다리며 행한 안배에 불과하므로.
바란다면 정부까지도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레이안의 눈빛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54화. 너를 낮추지는 마
5–7 minutes

엘로디는 그런 레이안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투영하여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 그 시선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내재되어 있었다.
제삼자는 그런 레이안의 시선을 ‘이성적인 감정’이라고 보는 듯하지만 엘로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일방적인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레이안은 늘 그렇듯 입을 닫았다.
돌아오는 답이 없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정말로 그럴 줄이야. 레이안은 헌신적이다. 그 사실은 명확했다. 그것이 엘로디를 위한 것이든, 혹은 투영하여 본 누군가를 위한 것이든 도움이 될 거라는 사실도 자명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건,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엘로디를 응시하는 레이안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엘로디는 동요하지 않았다. 일부러 레이안을 자극하기 위해 차갑게 말한 거였으니까. 잠깐 머뭇거리던 레이안이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레이안의 말은 그게 끝이었다. 끝끝내 제 비밀을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말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때가 오기나 할까. 무슨 질문을 하든 입을 다무는 상대와 대화를 시도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레이안을 알게 된 이후로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엘로디는 그를 채근하지 않았다. 대신 못 들은 것처럼 방긋 웃은 후 뒤돌았다.
앞서 걷는 엘로디의 세 발짝 뒤로 레이안이 따랐다. 그들이 걷자 풍경이 느리게 지나갔다. 늘 그렇듯 일상적인 정경이었다. 비슷한 듯 다르게 생긴 집과 상점. 오늘을 사는 사람들. 그 위를 성긴 그물처럼 덮는 늦은 오후의 햇빛은 어느새 불그스름했다. 문득 엘로디가 걸음을 멈추자 레이안도 한 발짝 뒤에서 멈춰 섰다. 이내 그녀가 몸을 돌려 레이안을 돌아보았다.
“그 누구도 널 함부로 대할 수 없어. 하물며 그게 너 자신이라도.”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는 엘로디의 얼굴을 레이안은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눈을 감은 순간조차, 그 모습이 잔상처럼 남도록. *** 침실에 들어서자 방을 정리하고 있던 마사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마사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쟁반을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마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M이라면 아마 창공의 매 용병단의 부단장인 마리오일 것이다. 맡겼던 조사 보고 건으로 연락한 듯했다. 여러 건 맡겼는데 그중에 어떤 건으로 서신을 보낸 건지 궁금해졌다.
“두 번째 서신은…… 으음, 마법사 엘비라는 사람이 보냈고요.”
마법사 엘비는 내가 투자한 마법사로 서마탑주의 다른 신분이었다. 개발 중인 마도구 연구가 끝나면 먼저 연락한다고 했는데, 드디어 끝났구나.
마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설명이 필요가 없었다.
척 보기에도 엄청난 고급 종이를 사용한 데다 가운데 떡하니 찍힌 윌렌트 황가의 직인을 몰라볼 리가. 무려 황제의 친서였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한숨을 내쉬며 쟁반 위 서신들을 한 번에 집어 들었다. 제일 중대한 문제인 황제의 서신은 우선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가장 먼저 서마탑주 이시스의 서신을 펼쳤다. [이른 시일 내로 방문 요망.]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다음으로는 친구 M 씨, 즉 부단장 마리오의 서신. [레이디 페르디아. 기억나세요? 지난번에 레이디가 가고 싶다고 했던 의상실 말이에요. 레이디 앙겔로스도 자주 찾는다는 거기요. 문을 닫은 줄 알았는데 최근에 다시 열었다고 하더군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지 않을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내용을 보아 앙겔로스 공작가에 고용된 마법사에 대한 조사가 끝난 듯했다. 페르디아 사람들에게 들킬지도 모르니 최대한 나를 생각해 준 마리오의 배려가 돋보였다. 하지만 마리오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혹시라도 페르디아의 누군가가 이 서신을 읽었다면 당장 수상함을 감지하고 추적했을 것이다. 오히려 마리오의 배려가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뻔했다. 다행히도 서마탑주 이시스와 마리오의 서신은 내가 뜯기 전까지 잘 봉인되어 있었다. 단, 황제의 친서는 개봉된 상태였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페르디아의 저택에 들어오는 모든 물건과 서신은 집사의 손을 한 번 거쳐야만 했으니까. 서마탑주와 마리오의 서신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 판단하여 뜯어보지 않았지만 황제의 친서는 그럴 수 없었으리라. 황제가 내게 보낸 서신의 내용은 예상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날이 좋으니 차를 한잔하러 들르겠나. 마침 좋은 찻잎이 들어왔다네. 내일 오후 2시 본성에서 들르게.] 내일 자신을 독대하러 오라는 명령이었다. 다소 친근한 어조로 포장한.
연회를 그렇게 참여했는데도 황제와 대화를 나눠 본 적이 별로 없었다. 황제에게 나는 그저 수많은 가문의 여식 중 하나일 뿐일 테니까. 황제의 서신을 대충 쟁반 위에 던지며 마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직 아무 말이 없다는 건 이 일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걸까? 하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황제의 호출인데. 내가 무려 황제의 친서를 받았다는데도 마사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주위를 산만하게 기웃거렸다.
“흑여우요. 아가씨가 데려오신 귀여운 여우요! 어디 갔어요?”
마사의 말은 조용히 내 안에 잠들어 있던 흑염룡을 깨웠다.
흥분한 탐욕은 금방이라도 봉인석 밖으로 나올 것처럼 굴었다. 나는 다급하게 탐욕에게 경고했다.
삐친 듯한 탐욕을 달래며 마사에게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마사가 또다시 탐욕의 눈밖에 나기 바로 직전, 다행스럽게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를 찾은 것은 집사였다.
그래. 역시 페르디아 공작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 페르디아 공작의 집무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질문이 날아왔다.
무려 황제의 독대 요청을 무시하라는 엄청난 말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벙긋대었다.
당연히 가는 건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했건만 그게 아니었다니. 물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처지가 아니었다.
“별 시답잖은 용건이겠지. 회합에서 있었던 일을 추궁할 텐데,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페르디아 공작의 뒤에 숨으면 나야 편했다. 무려 제국의 황제를 알현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일개 귀족가의 여식일 뿐인 내게는 너무나도 큰 존재였다. 마음 같아선 공작의 말대로 모른 척 안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감히 황제가 직접 친서까지 보낸 초청에 불응한다는 것은, 황제의 뜻에 반한다는 의미와 같았다. 가문의 가주 선에서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문 전체가 황제의 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제아무리 4대 가문 중 하나인 페르디아라도 제국의 군주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터. 그렇게 내 개인의 문제는 곧 가문의 문제가 될 것이다.
‘나 때문에 페르디아 가문이 오명을 뒤집어쓸 필요는 없다고.’
나는 페르디아 공작의 친딸도 아닌데, 그런 나 때문에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할 수는 없었다.
“제가 아버지께 미덥지 못하다는 것 잘 알고 있어요.”
맞으면서. 나를 혼자 황성에 보내는 게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그런 게 뻔한데. 공작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나는 결연하게 말했다.
“행동 똑바로 할게요. 결코 페르디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공작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어지간히 내가 미덥지 않은 듯했다.

내가 머쓱하게 웃자 공작도 픽,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일순 삭막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이윽고 공작이 자포자기하듯 허락했다.
일사천리로 집무실을 나온 나는 문이 닫히고 나서야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분명 지금쯤이면 1황자가 페르디아 공작에게 파혼에 대해 말했을 테니, 한 번쯤은 언급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다시 집무실에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괜히 내가 먼저 말 꺼냈다가 공작의 진노를 사게 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마침 내일 황성에 가니, 조금 일찍 출발하면 대화할 기회가 있을 듯했다. *** 호위인 레이안과 함께 황성에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 본성 입구에 다다랐을 때, 레이안이 멈춰 섰다.
공적을 세워 황제에게 인정을 받았다더니, 알려지지 않은 속내가 있는 듯했다.
조금 반항적인 멍멍이인가…….
레이안을 남겨둔 채 본성 안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1황자의 집무실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허탕이었다. 계획을 수정해서, 먼저 황제를 만나고 그 후에 1황자를 찾아야 할 듯싶었다. 황제의 침소로 가는 길은 분위기가 묘했다. 복도의 창문이란 창문에 햇빛 한 자락 들지 못하게 커튼이 쳐져 있었고, 도열한 병사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장례식장이야 뭐야. 이런 분위기면 없던 병도 생기겠다.’
적막한 복도를 가로질러 드디어 황제의 침소 앞에 당도했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내 방문을 알렸다.
“폐하. 페르디아 가문의 엘로디 페르디아 양이 뵙기를 청합니다.”
응답은 금세 돌아왔다.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본성의 시종장이 문을 열어 주었다.
살짝 열린 문 안으로 걸음을 떼는 그때였다. 순간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55화. 독이에요!
6–7 minutes

생전 처음 맡아 보는 종류의 냄새였다. 아주 잠깐 맡았을 뿐인데도 코끝이 아렸다. 탄 것 같기도 하고, 언뜻 비린내 같기도 한 그런 냄새였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본성의 시종장이 짐짓 엄한 얼굴로 크흠, 작게 헛기침을 하며 내 주의를 끌었기 때문이다.
“레이디 페르디아. 폐하께서는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하십니다.”
거듭 당부한 시종장이 못 미더운 듯 나를 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전실을 지나 황제의 침실에 발을 들였다. 그곳도 복도와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했다. 창이란 창에는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다. 드넓은 침실을 밝히는 건 드문드문 놓여 있는 향로의 불빛뿐이었다. 여러 개의 향로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황제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향인 듯했다. 향기롭지도 않은 향을 굳이 피울 이유는 그것뿐이니까. 그나저나 이 넓은 침실에서 황제는 어디 있는 걸까. 몸이 좋지 않다고 하니 역시 침대에 있겠지. 나는 무작정 침대로 향하기 전에, 먼저 나의 방문을 알렸다.
그때였다.
돌연 들려온 기침 소리에 움찔,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린 곳은 예상대로 침대 방향이었다. 장막처럼 드리운 캐노피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는 황제의 실루엣만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그쪽을 향해 얼른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페르디아 가문의 엘로디 페르디아입니다.”
끊길 듯 말듯 이어지는 음성은 듣기에도 위태로웠다. 언제 꺼질 줄 모르는 촛불 같아서. 황족의 건강 상태에 대한 것은 극비로 부쳐지는 게 일반적이었고 그건 윌렌티아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제가 공식 석상에도 모습을 비치지 않고 국정 대부분을 아들인 황자에게 일임했다는 것은 건강이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대놓고 드러낸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귀족들 사이에서 황제의 건강 악화설은 기정사실로 돌고 있었다. 사교계 왕따인 나도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러다 오늘 가시면, 내가 황제 시해범으로 몰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쓸데없는 상상이 아니라, 정말로 진실이 될까 봐 무서웠다.
봉인석 속 탐욕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송장 타령을 하는 탐욕을 뒤로한 채 황제의 명령에 따라 침대 옆에 다가가 섰다. 황제가 힘겹게 팔을 들어 올려 캐노피를 조금 걷어 냈다. 그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윌렌티아에 드리운 폐하의 광휘에 무탈하게 자랐습니다.”
“입에…… 발린, 말도…… 제법 할 줄, 알고. 쿨럭!”
띄엄띄엄 웃으며 힘겹게 말을 내뱉다가도 황제는 또다시 기침하기 시작했다. 한 번 터진 기침은 몇 분이 지나고서야 진정되었다.
한숨을 내쉰 황제가 신음을 뱉으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구원자께서, 친히, 짐을 보러 오셨는데, 누워 맞이할 순…… 없지.”
결코 나를 ‘구원자’라며 치켜세우는 의미가 아니다. 나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이 바로 그 근거였다. 병석에 몸져누웠을지언정 나를 보는 눈빛은 사냥감을 응시하는 맹수처럼 형형했으니까.
황제의 말에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대신관이…… 잔뜩 흥분해서는, 말하더군. 구원자가 나타났다고……. 누군가 했더니, 쿨럭, 그게 아들의, 약혼녀일…… 줄이야. 아주 흥미롭군, 흥미로워…….”
역시 예상대로 내가 신전의 결계를 뚫고 난입한 그 사건에 대해 말하기 위해 부른 듯했다. 나는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구원자라니. 이 한 몸 건사하기도 급급한데 대체 뭘 구원해? 하지만 황제는 그런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네가, 쿨럭, 그리 말했다는 것, 또한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황제가 나를 응시했다. 잠시 침묵하던 나는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짐에게는, 윌렌티아의 군주이며 윌렌트의 가주로서 지켜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
“최근, 이형의 마수들이…… 각지에 들끓는다고 하더군.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잦아…… 민심이 흉흉하다.”
언뜻 기사에서 본 적이 있었다. 마수 전서에 등록되지 않은 새로운 마수들이 출현했다고. 황도 솜니아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어서 마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기사를 신경 써서 보지는 않았다.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대신전에서는, 이르칼라의 교단이 저지른 짓이라 추측하고 있다. 줄곧 잠잠하던 그들이, 쿨럭, 결집하여 몇 해 전부터 머지않아 도탄의 시기가 도래한다며 떠들고 다니고 있거든.”
윌렌티아 제국은 이슈타르만을 신으로 추앙하며 국교로 지정했다. 그래서 저승의 신인 이르칼라를 추종하는 무리는 이단으로 치부되었다. 윌렌티아의 건국신화 자체도 이르칼라가 지상에 퍼트린 7대 죄악을 대적하기 위해 이슈타르가 7명의 영웅에게 권능을 주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는가. 그런 만큼 백성들의 믿음은 신실한 편이었다. 그 와중에 이르칼라 교단이 출몰하여 세계가 도탄에 빠질 거라고 떠들고 다니고, 실제로 이형의 마수까지 나타났으니 민심이 흉흉해질 법도 했다. 그래서 그걸 왜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인가. 요약하자면 이런 뜻이었다.
‘구원자는 허울 좋은 명목이고, 결국 욕받이가 필요하다는 말이네.’
아무것도 못 하는 황실과 신전 대신 전면에 나서 들끓는 민심을 잠재울 제물 말이다.
그저 구원자, 희망, 이런 밝은 단어만 늘어놓으면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 멍청한 여자아이로 여기나 본데. 순순히 이용당할 생각은 없었다.
뜬금없는 내 물음에 황제는 대답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의 자랑스러운 별명을.
“그런 제가 갑자기 신의 구원자라고 나타나면 과연 사람들이 믿을까요? 하물며 저는 권능도 없는 사생아일 뿐인데요.”
내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그동안 내가 쌓아 놓은 최악의 평판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한술 더 떠 황제에게 또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대외적인 구원자가 필요한 거라면, 차라리 신전과 처음부터 논의해서 구원자로 적합한 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만한 사람이 구원자가 된다면 모두가 납득할 테니까요.”
그러니 그놈의 구원자 운운에 나를 끼워 넣지 말라고. 당신들의 정치놀음에 희생될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어둠 속에서도 선연한 황제의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훨씬 안색이 편안해진 황제에게는 어떤 기개가 느껴졌다. 황제가 짐짓 근엄한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네가 신전의 결계를 뚫고 들어오는 순간, 내려온 신탁은…… 어찌 설명할 것이냐.”
무슨 말을 해도 나와 관계없다며 쏙쏙 빠져나가자 황제도 내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깨달은 듯했다.
전생의 기억이 없는 이전의 나였다면 신의 구원자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을 테니까. 그게 황제가 알고 있는 내 모습이었을 터.
지금까지 실컷 나를 떠보고서는 얼굴이나 보자고 불렀다니. 어지간히 뻔뻔하지 않으면 황제도 될 수 없는 모양이다.
방심한 순간, 황제는 레이안을 화두에 올렸다.
“특히 아끼는 녀석이지……. 곁에 두고 싶어 작위를 주겠다 했더니 거절하지 뭔가.”
황제가 총애하는 것치고 보상이 없기에 의아했는데 사실 작위를 거절했을 줄이야. 목이 메는지 잔기침을 하던 황제가 회상하듯 허공을 응시했다.
“크게 될 놈이라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네게 빼앗겼군. 체면이, 말이 아니야.”
황제는 레이안을 상당히 까다로운 인간으로 여기는 듯했다. 정작 내게는 용병단도 준다고 농담하고, 정부도 될 수 있다며 아주 다 내어줄 것처럼 굴던데. 황제와 레이안은 단순한 군신 관계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관계인지 궁금했지만 내게는 물을 자격이 없기에 묻지 않았다.
둘째 놈이라면 2황자 벨트란이었다. 경매장에서 마주쳤다가 일어난 그 사건을 말하는 듯했다. 그런 사소한 일까지 알고 있다니, 병석에 누워 있어도 황제는 황제구나 싶었다.
“2황자 전하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해서요. 제가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다고…….”
벨트란에 대한 황제의 평가는 상당히 박했다. 쯧, 제 둘째 아들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까지 차기도 했다.
신난다. 무려 황제가 친히 2황자를 무시할 수 있는 권한을 내려 주다니. 황제가 이렇게 말한 이상 2황자를 더 수월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황제와 척을 지는 건 좋지 않아 아부 섞인 비즈니스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그런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얼마 전, 아덴미르에게 너와 파혼하라 말했었지…….”
그렇지 않아도 파혼은 하지 않겠다던 1황자가 갑자기 찾아와 파혼 운운하기에 의아했는데, 비밀이 풀렸다. 아빠가 나랑 파혼하라고 했던 거였다.
어른스러운 척은 다 하더니만, 파파보이였다니.
쿨럭, 쿨럭! 황제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거친 기침을 토해 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물을 따라 황제에게 건네며 외쳤다.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 이미 1황자 전하와 이야기 끝냈답니다.”
“파혼이요. 폐하께서도 파혼을 바라고 계시다니 다행이네요. 폐하와 뜻이 같아서 영광이에요.”
어째서인지 황제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뜻 모를 시선에 갑자기 머쓱해졌다.
다행히 황제는 내게 더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래. 오랜만에, 젊은이와 대화하니 짐은 꽤 즐거웠다…….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몸이 가볍고 호흡이 편하기도 하고.”
졸음이 몰려오는지 황제의 눈이 어물어물 감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황제가 두 눈을 완전히 감았다. 아무래도 병자다 보니 방문객인 나를 두고서 잠들 정도로 몸이 좋지 않은 듯했다. 황제와 대화하는 동안 조용하던 탐욕이 한마디했다.
탐욕에게 핀잔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며 익숙한 인간이 안으로 들어왔다.
1황자 아덴미르였다. 아들이니 황제의 침실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허락을 받은 걸까. 나는 뭐라 말하려는 그를 보며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문가로 향하는 1황자를 따라 의자에서 일어서던 바로 그때였다.
휘청-. 갑자기 몸에 힘이 훅 빠지며 비틀거리자 뒤돌아본 1황자가 다급하게 내 어깨를 붙들며 부축했다.
1황자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나는 황제의 침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 냄새. 방 안 가득히 자욱한 향로의 연기. 오래도록 이어진 황제와의 대화. 그리고 익숙한 이 어지럼증과 고통.
나는 황급히 두 손으로 1황자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56화. 입술에 닿은 감촉
6–8 minutes

난데없이 코와 입을 틀어막는 엘로디의 행동에 아덴미르는 순간 호흡을 멈추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그럴수록 엘로디는 바짝 다가오며 더욱 강하게 틀어막았다.
독이라니. 엘로디의 외침을 되뇌어 봐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침실의 연기를 말하는 건가. 그러다 아덴미르는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잠깐만. 이 여자는 독이라면서 왜 본인 코는 안 막고, 남의 코를 막고 있단 말인가. 정말 독이라면, 자신이 중독될 수 있는 상황이지 않나. 그 점을 지적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려던 때였다.
엘로디가 미간을 좁히며 손에 힘을 주었다. 아덴미르의 입술이 엘로디의 손바닥에 틈 없이 눌렸다.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아덴미르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뭔가, 뭔가 잘못되고 있다. 불시에 그런 위기감이 머릿속을 점령하는 가운데, 엘로디의 말간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직한 음성이 숨결과 섞여 아덴미르의 살갗을 간질였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엘로디의 얼굴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내 조심스레 손을 떼어 낸 엘로디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덴미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엘로디의 말을 흘려듣기에는 그녀의 견고한 눈빛이 너무도 진지했다. 그가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자 한 발짝 물러난 엘로디는 본격적으로 황제의 침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계속해서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향로를 들어 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무모한 행동에 놀란 아덴미르가 저지하려고 했지만, 엘로디가 더 빨랐다.
“전하! 손수건으로 막고 계시라고 했잖아요.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왜 혼나는 것만 같지. 더 어처구니없는 건, 엘로디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자신이었다. 그는 그녀의 말대로 손수건으로 다시 입과 코를 막았다. 그제야 안심한 듯 엘로디가 고개를 돌렸다. 엘로디가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에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평소에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울 때마다 맡았던 바로 그 냄새였다. 꽃향기 같기도 하고, 과일 향 같기도 한…….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남의 손수건에 밴 냄새나 맡고 있는 스스로가 벨트란과 다름없는 호색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덴미르는 한시라도 빨리 이 손수건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뒤에서 벌어지는 한 남자의 고뇌를 알 길 없는 엘로디는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우선 그녀는 향로의 불을 전부 껐다. 다음으로는 실내에 들어오는 햇빛이란 햇빛은 모조리 차단하는 두꺼운 커튼을 걷은 후 야무지게 묶고, 굳게 닫힌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맞바람이 들도록 반대편의 창문도 열자 침실을 가득 메우던 연기가 금세 빠져나갔다.
어쩔 수 없이 맡을 수밖에 없었던 연기가 사라지자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이로써 침실에 피웠던 향에 독이 있다는 가설에 더욱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석연찮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바람 탓에 다시 닫히려는 창을 고정한 후 뒤돈 엘로디는 줄곧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아덴미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엘로디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연기가 독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혹시 눈앞의 사람이 중독될까 봐 손이 먼저 나간 게 화근이었다. 뒷감당은 생각도 하지 않고 행동하고 말다니. 어쨌든 독이라고 호들갑을 떨긴 했으니 상대방을 납득시켜야만 했다. 엘로디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잠깐 머뭇거리던 엘로디는 결국 비장의 수를 썼다. 그건 바로-.
“대륙 최고의 독제사 테미스 페르디아가 제 어머니세요.”
페르디아 공작 부인의 이름을 파는 것. 정화 권능을 이실직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없으니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핑계였다. 사생아라고는 하지만 테미스 페르디아의 딸인 엘로디가 어깨너머로 독 제조 방법을 익혔을지도 모르니까.
‘죄송해요, 부인. 이름 팔아서 정말 정말 죄송해요……!’
엘로디는 마음속으로 부인에게 거듭 사과하며 슬그머니 아덴미르의 표정을 살폈다. 이 변명도 통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놀랍게도 아덴미르는 이해한 듯했다.
“제 생각엔 그래요.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엘로디는 흘긋 황제가 잠든 침대를 바라보았다. 이런 소란 중에도 황제는 죽은 듯 잠든 상태였다. 아덴미르가 물었다.
“네. 혹시 저 향, 언제부터 피웠는지 알고 계신가요?”
“그것까진 알지 못해. 부황의 거처를 관리하는 건 전적으로 본성 시종장의 권한이니까.”
엘로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황제에게 대놓고 독을 쓸 멍청이는 없을 테니 배후를 그렇게 쉽게 찾을 수는 없을 터다.
최소 1년 이상 독에 노출되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독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꾸준히, 오랫동안 노출할 수 있는 자가 범인이겠지. 엘로디는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에스텔이 1황자와 약혼하게 되는 시점에도 아덴미르는 황자 신분이었다. 약 3년 후까지는 황제의 목숨은 무사하다는 의미인데. 문제는 그 후였다. 병석에 누워 있던 황제가 서거하면서 황위 다툼이 벌어진다.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애초에 에스텔의 가족 힐링이 주된 내용이라 정치적 알력 관계나 황제는 큰 비중이 없었으니까. 어쨌든 황제가 죽는 원인이 지병이 아닌 중독이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엘로디는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덴미르를 올려다보았다.
“폐하께선 오랫동안 독에 노출되어 중독되신 것 같아요.”
“향이 중독의 원인이라면, 어째서 나는 멀쩡한 거지? 더구나 침실에 상주하는 시종장도 멀쩡하잖아.”
연기에 독이 있는 건 확실했다. 독 감별기와 마찬가지인 자신이 직접 들이마신 후 독성을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두통을 동반하는 미약한 어지럼증으로 봐서 독성 자체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일반인에게는 무해한 정도의 독성일 터. 그러니 꾸준히 노출되어 있어도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황제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건-.
“독과 독이 만나면 더 큰 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어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엘로디의 눈에 들어온 건, 테이블 위에 있는 황제의 약병이었다. 이미 황제가 약을 복용한 후라 약병은 비어 있었지만, 몇 방울이 남아 있었다. 엘로디는 거침없이 다가가 약병의 남은 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지켜보던 아덴미르가 기겁하며 엘로디의 손목을 붙들었다.
아덴미르가 제 손을 엘로디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지만 그녀는 이미 약을 삼킨 후였다. 심장이 욱신거리는 고통이 찾아들자 엘로디는 확신했다.
소량 먹었기 때문에 고통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예상이 적중했다는 사실에 엘로디가 실실 웃자 아덴미르는 기가 차서 웃었다.
“하. 대체, 그걸 왜 먹어? 조사를 맡기거나 해야지.”
“조사해서 나올 거였으면 폐하의 약으로 올라오지도 않았겠죠. 직접 먹어 보는 게 확실해요. 마침 향 연기도 마신 후기도 하고.”
아. 순간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엘로디가 아덴미르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체질적으로 그렇대요. 음, 그보다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요?”
아덴미르는 티 나게 주제를 돌리는 엘로디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게다가 내성이 있단다. 어릴 때부터 독 내성을 훈련했던 아덴미르는, 내성을 기르려면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페르디아 가문의 영애라지만, 내성이 있는 건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 순간 아덴미르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건, 엘로디의 침실에서 보았던 수많은 약병이었다. 그중 뚜껑이 열려 있던 병 하나를 가져와 황실 약제사에게 보였을 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독이라고. 심지어 그 독은 한 방울만으로 호흡기관을 망가뜨린다는 극독이었다. 익숙함. 내성. 그리고 독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 뭔가 잡힐 듯하면서도 여전히 모호했다. 아덴미르는 깊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엘로디 페르디아라는 여자는 알면 알수록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잡고 있던 엘로디의 팔을 놓으며 아덴미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난데없이 입을 틀어막질 않나, 또 독이라면서도 거침없이 마셔대질 않나. 심장이 몇 번이나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소량 먹어서 괜찮다는 말이 사실인지 엘로디의 상태는 다행히도 괜찮아 보였다. 아덴미르는 순식간에 밝아진 황제의 침실을 둘러보았다. 늘 어두컴컴하기만 하던 장소가 환해지니 생경한 기분이었다. 침실에 죽은 듯 잠든 황제의 얼굴을 본 아덴미르는 부황의 안색이 평소보다 편안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찌 되었든 감히 일국의 황제를 중독시키다니 좌시할 수 없었다. 당장 대대적인 수사를 명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누구의 짓인지 예상가는 바가 있기도 했다. 필요한 건 오로지 발뺌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
엘로디가 심각한 얼굴로 빠르게 대답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아덴미르가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엘로디의 말을 이해했다. 이번 사건은 최대한 조용하게, 아무도 모르도록 조사해야 했다. 하물며 시종장까지도. 혹여 수사가 이루어진다면 배후는 꼬리를 자르고 내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부황을 계속 중독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존재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그런 아덴미르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엘로디가 명쾌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가문에 유능한 약제사가 있어요.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 약제사가 다름 아닌 본인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어쨌든 해독제를 만들 수 있긴 하니까.
“네. 매주 보내 드릴게요. 저 향로 속 향과 폐하께서 복용하시는 약만 꾸준히 보내 주세요.”
독성이 강한 독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 오랫동안 중독되었을 뿐.
‘그러니까 이 정도는 해독제 만들어도 공작 부인도 눈치 못 채실 거야.’
아덴미르는 말없이 엘로디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아버지에 대한 염려로 해석한 엘로디가 옅게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바로 쾌차하지는 못할 거예요. 폐하께서는 오랜 기간 중독되셨으니까……. 그래도 꾸준히 복용하시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다정한 어조에 아덴미르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엘로디에게는 이렇게 발 벗고 나설 이유가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었다.
엘로디는 침음을 흘리며 고민했다. 확실히 아덴미르가 의문을 느낄 만했다. 과거의 자신은 남 생각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엘로디에게는 권능이 생겼다. 중독된 사람이 눈앞에 있고 자신에게는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러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조금의 수고로움만 감수하면, 한 사람의 인생을 구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결과가 어찌 되었든 제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일이니 이타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속내까지 아덴미르에게 말할 생각은 없던 엘로디는 어물쩍 농담을 던졌다.
엘로디가 해사하게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아덴미르는 적잖이 당황했다.

파혼을 거론하는 저 잔악한 입술이, 어울리지 않게 말간 약혼녀의 얼굴이,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 거지? 아덴미르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 그래서 그런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57화. 파혼하거라
6–8 minutes

열었던 창은 다시 닫고, 껐던 향로에도 도로 불을 붙였다. 엘로디는 금세 침실 안을 자욱하게 채우는 연기를 착잡한 눈으로 보았다. 독인 줄 알면서도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서둘러 아덴미르를 밖으로 이끌었다. 병사들이 늘어선 복도를 얼마간 걷자 이윽고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독성은 향과 약에 들어 있는 독의 성분이 합쳐져야 강해진다. 그러니 약이라도 먹지 않는다면 건강이 악화되는 걸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덴미르가 문득 걸음을 멈추며 엘로디를 내려다보았다.
“불가능해. 부황께서 약 드시는 동안 황비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엘로디의 속마음을 간파한 아덴미르가 조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덴미르가 추측하는 범인은, 바로 살바트리체 황비였다. 황제에게 독을 사용한 배경도 동기도 명확했으니까. 황제는 쓰러지기 직전, 1황자인 자신을 후계자로 여기며 황태자로 책봉하려 했다. 2황자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황비가 그 꼴을 가만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녀는 손을 써 황제를 무능한 상태로 만들고 윌렌티아의 실권을 장악한 것이겠지. 실제로도 상황은 그렇게 흘러갔다. 1황자 아덴미르를 황태자로 추대하던 귀족들은 어느 순간 정계에서 퇴출당하였고, 요직에는 대부분 살바트리체 황비의 사람만 남았다. 그때 위태로운 입지의 아덴미르를 구한 것이 엘로디 페르디아와의 약혼이었다.
‘공녀가 아니었더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당했겠지.’
힘없는 어린 황자 따위는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까. 실제로 몇 번 침실에 암살자가 찾아오고, 십수 번의 독살 시도가 존재했다. 암살자는 아덴미르의 권능으로 차단되었고, 독살 시도는 그가 어릴 적부터 길렀던 독 내성으로 어느 정도 방비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그칠 수 있었던 건 페르디아 공작의 비호 덕분이었다. 어쨌든 엘로디와 약혼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었다. 아덴미르는 부황의 침실에서 나설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던 엘로디를 응시했다.
황제의 죽음으로 곤란해지는 건 1황자 아덴미르뿐만이 아니었다. 완전히 1황자 세력을 몰아내지 못한 2황자와 살바트리체 황비 또한 황제가 서거하면 큰 위험이 따랐다. 승기를 잡기 전까지 황좌에 앉아 있을 허수아비 황제가 필요하므로, 이용가치가 있는 이상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곧바로 죽이지 않고 독으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게 만들었겠지.
아덴미르 또한 부황의 건강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된 게 미심쩍어서 음식이나 약을 몇 번이나 검사했으나 결과는 같았다. 문제없음. 한데 향과 약의 성분이 융합되어야 나타나는 강한 독성이라니.
‘어쩌면 내가 의뢰를 맡겼던 약제사가 매수되었을 수도 있겠지.’
살바트리체 황비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엘로디는 공식 행사에서 만난 적 있는 황비를 떠올렸다. 웃고 있지만 서늘한 인상. 대화를 나눈 적은 몇 번 없지만,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딱히 원만한 사이는 아니지만, 눈밖에 난다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잠깐 고민하던 엘로디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파혼하게 되면 제가 뭘 하든 신경 안 쓰지 않을까요?”
그때가 되면 우리는 약혼 관계가 아닌, 남이 될 테니까.
감탄사를 내뱉은 엘로디가 혹시 몰라 한마디 덧붙였다.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이유 모를 침묵이 머쓱해진 엘로디가 아덴미르를 힐긋 쳐다보았다.
하긴 병으로 쓰러졌다는 아버지가 사실 독에 노출되어 그렇다는 걸 알게 된 자식의 심정이 어떨까. 게다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지켜보기만 해야 하다니 참담할 것이다. 그렇게 추측한 엘로디는 위로 겸, 보고 겸 아덴미르에게 말했다.
“그리고 비밀 엄수는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해독제 제작자가 본인이라는 걸 밝힐 수는 없으니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런 엘로디를 바라보던 아덴미르가 무뚝뚝한 어조로 툭 대답했다.
“그래. 공녀도, 페르디아의 약제사도. 그대가 보증하는 사람이잖아.”
엘로디는 내심 놀랐다. 아덴미르가 자신을 믿는다고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제 말을 믿어준다니 다행이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엘로디가 고개를 들어 아덴미르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해독제는 제가 책임지고 맡을 테니까, 전하께서는 꼭 독을 썼다는 증거를 찾으세요.”
아덴미르는 문득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엘로디는 그저 페르디아 공작의 이름을 빌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던 존재였는데. 어느 순간 자신은 그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하필 지금 그 순간이 떠오를 건 또 뭔가. 연기가 독이라는 걸 깨달은 그 순간 스스로가 아닌, 아덴미르를 망설임 없이 보호하던 엘로디. 그가 알던 이기적인 성격의 엘로디는 이제 없었다. 어째선지 목 부근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아덴미르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출입구가 머지않았을 때, 엘로디가 그를 불렀다.
엘로디는 대답 없는 아덴미르를 뒤로하고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한 번 근신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먼저 말을 꺼내는 게 무섭지만, 이번에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다.
‘황제도, 1황자도 동의했으니까 페르디아 공작도 별수 없겠지.’
기분 좋게 레이안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탐욕이 한마디했다.
엘로디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보다도 더 파혼하고 싶을걸. 나를 이기적이고 멍청하고 귀찮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원작에도 그런 묘사가 있었다. 다만 지금은 페르디아의 이용가치 때문에 약혼을 깨는 게 꺼려지는 것일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엘로디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
제게 인사한 엘로디가 미련 없이 뒤돌아 걸어갔다. 아덴미르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윽고 본성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 호위인 용병 이안과 만난 엘로디가 활짝 미소 짓는 게 보였다.
물론 그 앞에서도 안 웃는 건 아니지만, 느낌이 달랐다. 제 앞에서는 벽이 느껴지는 웃음이라면, 저자에게는 거리낌 없이 미소 짓는-. 생각하다 말고 아덴미르는 조소하며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엘로디의 말마따나 곧 파혼할 사이였다. 그 시기가 다가오니 생각이 많아진 것이겠지. 하지만 그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아덴미르는 뒤돌아 본성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할 때였다. *** 갑자기 방 안에서 여우가 나타나면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으니 나는 미리 탐욕을 소환해서 품에 안았다. 황성에 있는 동안 봉인석에 있었던 탓인지 소환된 탐욕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귀여운 얼굴로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탐욕을 눈으로 흘기며 별채 안에 들어섰다. 그러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마사가 한달음에 다가왔다.
“아가씨.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어서 응접실로 가세요.”
당황하며 말을 더듬자 마사가 후후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참, 어서요. 마님께서 오래 기다리고 계시단 말이에요.”
오늘도 나를 놀리는 데 진심인 마사를 뒤로하고 응접실로 향했다. 안에 들어서자 차를 마시고 있던 페르디아 부인이 우아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내가 아닌 부인이 마치 별채의 주인 같았다.
“무슨 일은. 꼭 일이 있어야 올 수 있는 건 아니잖니. 잘 지내고 있나 싶어 들렀단다. 그런데, 엘로디?”
갑자기 공작 부인이 나를 호명하자 나는 바짝 긴장했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혹시 나 몰래 뭘 하지는 않았니?”
뜨끔. 찔리는 속마음을 감추고 자연스럽게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제발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내가 황제의 침실에서 신나게 독을 들이마시고 왔다는 사실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냥 넘어가길 바라는 내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다행히 부인의 관심사는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쓰러져 있던 게 불쌍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름은 블랙이에요.”
나는 얼른 탐욕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며칠 동안 탐욕과 지내면서 나도 탐욕도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속마음으로 탐욕에게 딱 한 단어만 내뱉었다.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 이름이었다. 그 한마디에 탐욕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적극적으로 여우인 척하기 시작했다.
탐욕은 제 귀여움을 한껏 활용해 공작 부인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손을 뻗던 부인은 어째서인지 손끝이 탐욕의 머리에 닿기 직전에 거두었다.
뜻밖의 당부에 나는 약간 놀랐다. 반려동물을 데려오든 말든 신경 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답을 하던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문 너머로 본 저택 집사의 음성이 들려오자 부인이 피식 웃었다.
“어쩜 네 아버지는 오붓하게 이야기 나눌 시간도 안 주는구나.”
아무래도 황제를 알현하고 왔으니 보고를 듣기 위해 호출한 듯싶었다.
나는 먼저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부인의 뒤를 따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일까.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인데.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 페르디아 공작은 집무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본론부터 꺼냈다.
나는 어디에 앉을 새도 없이 공작의 매서운 눈길에 황제와 했던 대화를 술술 불었다. 나를 구원자로 내세우려는 이슈타르 신전과 황제. 그리고 각지에서 발생한다는 이형의 마수들과 그 배후로 추정된다는 이르칼라 교단까지. 물론 황제가 병석에 누운 원인이 독 때문이라는 말은 제외했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공작은 흡족한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했다. 신전 놈들은 명분만 그럴싸하지 사실 너를 이용하려는 속셈이니.”
마침 공작의 집무 책상 위에 있는 자료들은 이르칼라 교단에 대한 내용이었다. 최근 기승을 부린다는 게 사실이구나. 용건이 끝나자 공작은 늘 그렇듯 입을 닫았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 남은 볼일이 있었다. 나는 한 발짝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긴장 탓에 손이 가늘게 떨렸다. 동요를 억누르기 위해 주먹을 꽉 쥐며 천천히 질문을 꺼냈다.
“지금도 제가 파혼하고 싶다고 말씀드리면, 곤란할까요?”
조심스럽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공작이 단칼에 곤란하다고 대답할까 봐 얼어붙어 있을 때, 답이 돌아왔다.
누가 부자 아니랄까 봐, 페르디아 공작은 얼마 전 얀시가 했던 물음과 똑같은 것을 물어보았다.
“네가 성질을 못 이겨 홧김에 파혼을 요구한 줄 알았는데.”
공작이 생각하는 내가 어떤 성격의 존재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잠자코 공작의 처분을 기다렸다. 부디 이번에는 파혼을 허락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윽고 공작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드디어.
58화. 단독 입수, 파혼 임박!
5–7 minutes
……파혼 허락을 받았다! 분명 두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도 도무지 믿기지 않아 멍청하게 서 있자 페르디아 공작이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공작의 금색 눈동자가 나를 나른히 응시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대답했다.
“아, 아뇨. 바로 허락하실 거라고 생각 안 했거든요.”
그도 그럴 게, 파혼 건에 대해서는 이미 한 번 내 요청을 거절한 바 있으니까. 좀 더 완강하게 설득해야 고려해 보겠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다.
1황자와 파혼을 합의했고, 그 사실을 황제도 알고 있으며 동의한다는 바로 그 이야기. 중요한 협상 카드를 내밀기도 전에 논의가 끝난 기분이라 얼떨떨했다. 그런 나와 달리 페르디아 공작은 담담하게 답했다.
“말했잖느냐. 일전에 네 파혼 요구를 기각한 것은, 네가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 생각해서였다.”
내 행동? 내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자 공작이 상체를 뒤로 기대더니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네 보호자인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다짜고짜 1황자에게 파혼서를 보내지 않았더냐.”
공작의 말대로였다. 처음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내 처지를 자각하고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에 매몰되어 무작정 파혼서를 보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황자와의 파혼이 파혼서 한 장으로 끝날 정도로 쉬울 리가 없는데. 공작이 내 결정에 반대하고 근신 처분을 내린 게 충분히 이해되었다.
“알면 되었다. 반면 지금은 먼저 찾아와 네 의견을 밝혔으니 마땅히 진지한 답을 내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1황자에게 파혼서를 보내는 대신 페르디아 공작을 찾아와 파혼하고 싶다고 말했으면 들어주었을까?
애초에 공작을 대하는 걸 두려워했던 내가 그렇게 행동할 리가 없기도 하고. 어쨌든 지금은 파혼을 허락받았다는 게 중요했다.
혹시나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까 봐, 나는 얼른 덧붙였다.
“파혼이요. 전하께서도 동의하셨거든요. 그리고, 아까 황제 폐하를 뵈었을 때도 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파혼하라 하시더라고요.”
“망할 황제가……. 다 죽어 가더니 드디어 미쳤나 보군.”
으악……! 나는 반사적으로 아무도 없는 집무실을 휘휘 훑어보았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황족 모욕죄로 끌려가도 할 말 없을 발언을 거침없이 하는 공작 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제 아들놈은 성에 차는 줄 아는 꼴이 우습군. 죽어 가는 놈 살려 놨더니 감히 네게 그런 망발을 지껄이다니.”
황제의 발언에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활짝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래서 아버지만 동의하시면 파혼할 수 있어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몇 가지 절차가 있긴 한데 얼마 안 걸릴 거다.”
자고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다. 내가 과하게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공작의 분노도 식은 듯싶었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날이 될 테니까. 하지만 기쁜 한편으로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공작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그게…… 혹시 파혼하게 되면 1황자 전하와 페르디아의 관계가 변하게 될까요?”
1황자 아덴미르가 나와 약혼한 이유는 페르디아의 권력 때문이었다. 2황자 세력인 살바트리체 황비와 대적하기 위한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지만 파혼하는 지금 시점에서도 살바트리체 황비의 세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페르디아의 위세 없이 상대하기에는 역시 버거운 존재였다.
“아니. 파혼의 귀책 사유가 엘로디 너의 변심이니,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관계가 변하지 않는다니, 1황자에게 잘된 일이었다. 먼저 파혼을 요구한 나도 더 이상 마음이 무겁지 않을 결과였다.
“더구나 2황자 그 멍청한 놈이 황제가 되어도 곤란하니 물러날 곳도 없고.”
공작이 덧붙인 벨트란 황자에 대한 신랄한 평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 황제가 된다면 윌렌티아는 순조롭게 망국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제국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2황자가 황제가 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원작에서는 1황자가 황제가 되었으니, 지금도 그렇겠지.’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페르디아 공작이 다시금 턱을 괴며 나를 바라보았다.
“한데, 다음으로 마음에 품은 놈팡이라도 있는 것이냐?”
“달리 마음에 드는 놈이 있으면 말하거라. 잡아다가 앉혀 줄 테니.”
나, 남편감을 사냥해 준다는 말인가? 공작의 무시무시한 발언에 입을 떡 벌린 나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세게 저었다.
그러자 공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지만 페르디아 공작은 어느새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빠 보이는 모습에 나는 더 묻지 못하고 집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 파혼 절차는 순조롭게 이행되었다. 페르디아 공작이 알아서 처리해 주었기 때문에 1황자와 만나거나 혹은 내가 해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1황자가 보내온 황제 침실의 향과 황제의 약으로 곧바로 해독제를 만들어 최대한 은밀하게 발송했다. 혹시라도 공작 부인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이 짓을 1황자가 증거를 찾을 때까지 해야 하다니…….’
하지만 눈앞에 죽어 가는 사람이 있는데 지켜볼 수만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1황자가 얼른 증거를 찾길 바랄 뿐. 다음으로 한 일은 창공의 매 용병단 본부에 들러 부단장 마리오를 만나는 것이었다. 부단장 집무실에 들어간 나는 반갑게 웃으며 나를 반기는 마리오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하. 센스 있지 않나요? 아무도 의뢰 관련 서신인 줄 모를 겁니다.”
모르겠지. 상대가 ‘평범한’ 귀족 레이디였더라면. 하지만 수신자는 다름 아닌 나, 엘로디 페르디아였다. 나는 옅게 웃으며 마리오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마리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한 듯했다.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 의도는 아니었던지라 옅게 웃으며 별것 아닌 충고를 덧붙였다.
“그런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고. 그냥 그렇다고. 차라리 의상실이나 보석점이라고 말하고 보내는 게 나을 거야.”
가볍게 안부를 물었으니 이제 본론을 들을 차례였다. 나는 마리오가 내게 보냈던 서신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마리오가 내게 두꺼운 서류철을 건넸다. 예상했던 대로 조사 내용은 앙겔로스 공작가에 고용된 마법사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름, 게이브 제나이드. 앙겔로스 공작가에 거주 중…….”
마리오의 말에 따라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게이브 제나이드. 남마탑주.]
범상치 않다 했더니, 마탑주였어?! *** 앙겔로스의 가주 로드리고 앙겔로스는, 다짜고짜 집무실에 쳐들어온 저택의 손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짜고짜 앙겔로스 공작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당연하게도 내놓으라는 어조에 공작은 미소를 유지하며 물었다.
200만 라리트라면 한 해 동안 한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수세를 상회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 정도면 큰 규모의 건물을 몇 채나 짓고도 남을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돈 굴리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로드리고 앙겔로스라도 턱, 하고 내놓을 수 있는 금액대가 아니었다. 그런 무지막지한 돈을 눈앞의 상대방은 아무렇지 않게 요구하고 있었다.
웃고 있었지만 앙겔로스 공작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끝도 없이 돈이 들어가는 것이, 마치 도로테아를 한 명 더 키우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로서는 무조건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요구하는 태도가 독선적이고, 바라는 것이 터무니없이 많더라도. 그의 원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게이브 제나이드, 이 남자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조금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저라도 그만한 돈을 곧바로 마련하는 건 힘드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말씀하신 것들 준비해 드리도록 하지요.”
방문 목적을 달성한 게이브는 고개를 대충 끄덕인 후 문가로 향했다. 하지만 나가기 직전, 앙겔로스 공작의 부름에 멈춰 섰다.
환영 마법을 장신구에 걸어 주면서, 게이브는 도로테아의 스승이 되었다. 가르치는 부분은 대개 마법이지만, 그 외에도 잡다한 것을 알려 준다고 들었다. 딸을 부탁한 것은 앙겔로스 공작이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가르치는지는 알지 못했다. 앙겔로스 공작의 질문에 잠깐 고민하던 게이브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고민에 비해 성의 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회합 때 4대 가문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이후로 도로테아는 한동안 울며 지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 사건을 기사로 싣는 바람에 한동안 신문이나 잡지를 볼 때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불안정한 딸의 상태가 걱정된 앙겔로스 공작은 도로테아의 안정을 위해 신문과 잡지 반입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랬는데.
앙겔로스 공작의 말에 게이브가 되물었다.
허허 웃으며 건네는 신문을 받아든 게이브는 그가 왜 도로테아에게 보이라 했는지 곧바로 이해했다. 확실히 도로테아 앙겔로스가 반길 기사 내용이긴 했다. . . . [단독 입수. 아덴미르 1황자와 엘로디 페르디아의 파혼 임박…… 황실 측근 “조만간 공식 발표하겠다”]

59화. 제가 성공시켜 볼게요
6–8 minutes
도로테아 앙겔로스의 전속 하녀는 커다란 상자가 가득 올려져 있는 카트를 끌어 어느 방 앞에 도착했다. 모시는 주인 도로테아의 침실이었다. 똑똑.
똑똑.
하녀가 몇 번이고 노크했지만 침실에 있을 도로테아는 묵묵부답이었다.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고서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기에 대답이 들려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비척거리며 걸어왔다. 햇빛이라곤 받아 본 적 없는 듯 창백한 인상에 퀭한 눈가. 유약한 체구에, 신경질적인 얼굴…….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하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게이브는 하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그녀의 옆에 세워져 있는 카트를 흘겨보았다. 휘황찬란하게 포장된 상자들이 절로 시선을 휘어잡았다. 척 봐도 엄청난 금액대의 사치품들이었다.
하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벌컥-! 게이브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돌발행동에 깜짝 놀란 하녀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새된 음성으로 외쳤다.
여전히 하녀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게이브가 성의 없이 손사래를 쳤다. 무려 모시는 아가씨의 스승이기에 하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물러났다. 하녀마저 황급히 달려가자 복도를 포함한 침실이 고요에 휩싸였다. 게이브는 거침없이 침대로 다가가 캐노피를 휙 걷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인 도로테아는 얼굴을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아무리 게이브 님이라고 해도 숙녀의 침실에 이렇게 들어오시는 건 곤란해요.”
도로테아의 경고에도 게이브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다만 차갑게 힐난할 뿐이었다.
“네가 그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엘로디 페르디아는 권능도 없는 사생아일 뿐이지만, 네게는 4대 가문의 권능이 있다고.”
분명 그랬다. 보잘것없는 존재였던 주제에 최근 들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엘로디 페르디아.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존재였으면서 갑자기 페르디아 가문의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더니 이제는 이슈타르 신전의 구원자라 불리다니. 하지만 아무리 다른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해도, 앙겔로스의 직계인 자신에게는 권능이 있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며 이불을 그러쥐는 도로테아에게 게이브가 속살거렸다.
“네가 그 아이보다 더 가진 거라곤 권능뿐인데 그거라도 연습해야 잘나지지 않겠어? 그렇지 않나?”
마음속에 숨겨 두었던 진심을 갉작거리는 은밀한 음성. 초췌한 얼굴로 고개를 든 도로테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이슈타르의 샘에서 창피당했던 그 사건이 기사로 나 이미 사교계에서 소문이 퍼졌을 텐데, 얼굴을 비췄다간 웃음거리로 전락할 게 뻔했다.
“그 망할 피부 때문이라면, 내가 해독제를 구해다 주지.”
이제 피부가 매끈했던 때가 떠오르지 않았다. 끔찍한 이 얼굴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제 것 같았다. 이 지긋지긋한 발진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로테아의 표정이 달라지자 게이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도로테아가 주저하는 그때였다. 툭. 게이브가 들고 있던 신문을 그녀의 앞에 성의 없이 내려놓았다. 제 사건이 실린 기사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도로테아가 질색하며 게이브를 올려다보았다.
신문 따위 꼴도 보기 싫었지만, 게이브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도로테아는 제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단독 입수. 아덴미르 1황자와 엘로디 페르디아의 파혼 임박…… 황실 측근 “조만간 공식 발표하겠다”]
머리기사를 읽은 도로테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게이브를 올려다보았다.
엘로디 페르디아의 파혼. 그것은 곧 엘로디가 가지고 있던 권력을 하나 내어놓는다는 소리였다. 밝아지는 도로테아의 표정을 보며 게이브의 입꼬리도 따라 올라갔다.

도로테아 앙겔로스. 다루기 성가시지만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유용한 물건이었다.
게이브는 그런 속내를 감추며 그녀의 방을 빠져나갔다. *** 페르디아 공작의 허락과 동시에 파혼은 차근차근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나 혼자 파혼하고 싶다고 의지를 피력할 때와는 다른 속도였다.
애초에 가문과 가문 간의 결합이며, 정치적인 명목으로 시작된 약혼이었기에 내가 개입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1황자의 얼굴을 마주칠 필요가 없거니와 가끔 집사가 보내오는 서류에 서명만 하면 끝이었다. 분명 파혼 이야기는 당사자인 1황자와 법적 보호자인 페르디아 공작에게만 했다. 그런데도 얀시는 음침한 흑막답게 그 소식을 기어코 알아내서는 나를 찾아왔다.
“그래. 저번에 파혼하고 싶다고 했잖아. 리리 네가 바라는 대로 됐으니까.”
“음, 딱히 아무 생각 없어요. 좋냐 싫으냐로 물어보면 좋은 쪽에 가깝긴 한데…….”
파혼하는 이유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우리는 미래에 결혼하지 않는다. 이미 원작과는 달라져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에스텔이 등장하면 아마 1황자는 그녀에게 반할 것이다. 1황자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나 또한 1황자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다. 마지막으로 머지않아 나는 페르디아에서 독립해 수도 솜니아를 떠날 것이다. 이토록 파혼해야 하는 이유가 넘쳐나니 했을 뿐이었다.
‘약혼이 나한테 이득이면 굳이 파혼하겠다고 설치진 않았을 거야.’
여우인 척하며 무릎에 누운 탐욕을 쓰다듬으며 얀시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대답하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파혼을 축하하는 오라버니와 고맙다고 대답하는 동생.
혼란스러운 나를 보며 여전히 웃고 있던 얀시가 화제를 돌렸다.
“오늘 들른 건, 리리 네가 얼마 전에 부탁했던 조사 중간보고 때문이기도 해.”
내가 얀시에게 부탁했던 건, 바로 그거였다. 심각해진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얀시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말을 이었다.
“응. 출생 이후부터 솜니아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의 행적이 없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간처럼.”
“그래서 자존심 상한다는 거야. 분명 일부 황제의 측근에게 알아내기로는 빈민가 출신이라는데, 그런 행적도 전혀 없고.”
얀시가 소름 돋도록 능글거리는 말을 하며 미소 지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어물쩍 넘겼다.
“이쯤 되니 나도 오기가 생겨서 말이야. 더 조사해 보려고. 뭐라도 나오지 않겠어?”
100퍼센트 진심이었다.
‘다름 아닌 음침 흑막 뒷공작의 일인자 얀시 페르디아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를 얀시가 장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또 손을 주물럭거릴 생각인가! 조마조마한 소멸의 위협에 처할 생각이 전혀 없던 나는 얀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앗, 그러고 보니 목욕하려고 물을 받아 놨었는데!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고마웠어요, 오라버니!”
얀시가 환하게 웃으며 침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소파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탐욕이 나른한 듯 하품을 했다.
너무 좋아서 저승 갈 뻔했다는 뜻인 듯했다. 하지만 탐욕은 모르는 엄청난 비밀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탐욕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앞발을 핥던 탐욕이 그대로 굳었다.
탐욕이 울부짖었다. *** 서마탑주 이시스는 정말이지 참을성이라고는 없는 인간이었다. 그 이후로도 서신이 한 번 왔지만 답신만 보낼 뿐 마탑에 들르지 않았더니, 어마어마한 것을 보내왔다. [오늘 안 오면 너희 집에 폭탄 설치할 것이야.] 무려 폭탄을 설치해 버린다는 예고 폭탄마의 경고에 마탑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마탑의 최상층. 마탑주의 연구실에 들어가려는데, 레이안이 한 걸음 물러났다.
마탑주 이시스가 시끄러워서 싫다는 뜻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함께 들어가자고 더 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레이안을 남겨 두고 연구실 문을 열었다.
연구실 내부를 본 탐욕이 질색했다. 그 반응은 내 감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폭탄은 페르디아 저택이 아닌 이곳에 떨어진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연구실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아마 마도구 연구의 여파가 아닐까 예상할 수 있었다. 장애물을 쏙쏙 피해 가며 안에 들어간 나는 찾던 사람을 발견했다. 더러운 잔해 사이, 작고 앙증맞은 서마탑주 이시스가 대자로 뻗어 누워 있었다.
사람을 불러 놓고서는 이시스는 그대로 누운 채 멍하게 천장만 바라보았다. 넋이 나간 듯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시스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툭 내뱉듯 대답했다.
그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이시스에게 정확히 되물었다.
“설마 제 전 재산의 대부분을 투자한 온도 유지 마도구 이야기는 아니죠?”
만신창이 연구실에는 싸늘한 침묵만 감돌았다. 순식간에 거지가 되어 버린 나는 절망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어떻게 모은 독립 자금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날린단 말인가. 살려야 한다. 나는 굳건한 사명감을 안고 이시스에게 차분히 물었다.
내가 연락이 안 될 때라면, 이슈타르 신전에 어쩔 수 없이 체류했던 그때를 말하는 거였다. 그 새를 못 참고 이시스의 한탄이 이어졌다.
“네가 분명히 성공한다지 않았느냐. 그런데 출시 이후 딱 두 개 팔렸다. 마법사 놈들이 나를 볼 때마다 얼마나 비웃는지 아느냐? 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이시스가 이를 박박 갈았다.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어지간히 무시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다. 망했다가 갑자기 입소문이 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개입했기 때문에 결과가 변한 것일 수 있었다. 아니면, 이 마도구가 아닐 수 있지.
“포기하기에는 일러요, 이시스 님. 출시만 했지 발표회는 아직이잖아요.”
벌써 세상이 끝난 것처럼 구는 이시스를 뒤로하고 나는 이번에 출시한 마도구를 찾아 나섰다. 직접 사용해 봐야 뭐가 문제인지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한참이나 연구의 부산물을 헤집은 후에야 마도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꼴 보기도 싫다는 듯 이시스가 고개를 홱 돌리며 대강 설명했다.
“네 말대로 뜨겁게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내가 냅다 소리를 지르자 이시스가 자그마한 손으로 제 귀를 틀어막았다.
왜 망했는지 알겠다.
하지만 그 덕분에, 어떻게 해야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는지 방향성이 보였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이시스가 퉁명하게 대답했다.
나는 호기롭게 웃으며 이시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60화. 아덴미르의 회상
5–7 minutes

그러나 이시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네가? 무슨 수로? 아서라, 이미 망한 걸로 뭘 한다고…….”
그야말로 패배감에 젖어 버린 패잔병의 몰골이 아닌가. 원래라면 망하든 말든 그냥 넘어가겠지만, 내게는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존재했다.
당사자보다 내가 더 간절했다. 나는 이시스의 손을 부여잡고 간절히 외쳤다.
“되었다. 재능도 없는 나 따위가 마도구를 만든다고 설치는 게 아니었어. 그냥 하던 대로 대전투용 마법진이나 개발하련다…….”
이시스가 성가시다는 듯 내 손을 떨쳐 내려고 했지만, 나는 더욱 힘주어 잡았다.
마탑 소속 마법사들의 조롱으로 이시스의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한 모양이었다. 정말로 이렇게 망한 채로 묻어 둘 작정인 듯했다. 나는 이런 인간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고집스럽고 유치한 인간을 다루는 데는 이 방법만 한 게 없지.’
페르디아에도 이렇게 유치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 하나 있지 않던가. 카를로트 페르디아라고. 나는 도발하듯 이시스에게 물었다.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저 한 번 써 보세요. 아니면 저랑 내기하실래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이시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가시다는 듯 또다시 손을 내젓는 이시스에게 나는 도발을 감행했다.
나의 자극적인 도발에 이시스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위대한 서마탑의 마탑주인 나를 무시한 거냐?”
“소소한 내기 거리에도 무서워서 내빼는 이시스 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아요.”
이시스가 역정을 냈지만 나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아무리 마탑주고, 아무리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다고 한들 귀여운 어린아이의 몸으로 혼내면 하나도 무섭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덤덤하게 물었다.
“하자, 그래. 해! 정말 고집불통 그 자체로군! 제 아비를 똑 빼닮았어!”
숨 쉬듯 자연스럽게 페르디아 공작을 언급하며 작게 욕을 중얼거리던 이시스가 상체를 일으켜 반듯하게 앉았다.
“그래, 그 잘난 내기 내용이나 논의해 보자. 이 몸이 이번에 출시한 이 마도구를 얼마나 팔 수 있지?”
내가 매진을 말할 줄은 몰랐던 건지 이시스가 입을 뻐끔거렸다.
“뭐, 네 마음대로 해라. 다 못 팔면 내기에서 지는 건 이 몸이 아니라 너니까.”
이시스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만사가 귀찮아졌는지 이시스는 내가 하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구체적인 내기의 내용, 기간, 조건 등을 협의한 후 이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았다.
자고로 내기란 먹고 먹히는 치열한 싸움인 법! 사실 내기 자체는 의욕 없는 이시스를 협조하게 만드는 방법에 불과했지만, 기왕 시작하는 거 뭐라도 걸면 더 재미있을 게 분명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잠깐 고민하던 이시스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탑주의 소원권이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었다. 두뇌를 열심히 가동한 끝에 결론에 도달했다.
지나치게 탐욕적인 내 속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던 걸까. 이시스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내 소원을 단칼에 잘라 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타이밍도 귀신같이 탐욕이 외마디 용트림을 하는 게 아닌가.
나란 인간, 너무 탐욕적인 인간인가 싶어 잠깐 회의감이 들었다. 머쓱해진 내가 뺨을 긁적이자 팔짱을 낀 이시스가 근엄한 척 입을 열었다.
소원이라더니, 겨우 마법? 그것도 딱 한 번? 대놓고 실망한 티를 내자 이시스가 길길이 날뛰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는구나. 무려 이 몸의 마법이다. 재화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것이란 말이다!”
그야말로 자기애의 화신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자기 입으로 저런 발언을 일삼을 수가 있을까? 네네, 님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굽신굽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버르장머리가 없어. 실베스터 페르디아는 대체 가정 교육을 어찌 한 거냐?”
이시스는 오늘도 거침없이 패드립을 치며 나의 부친을 모욕했다. 자주 들어서인지 이제 페르디아 공작 욕이 익숙해질 정도였다. 어쨌든 마탑주 이시스가 이 내기에 건 것은 ‘마법 딱 한 번’.
돈?
노동력?
명예?
아무리 생각해도 내기에 걸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만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내가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이었다니! 그런 나의 고뇌를 전부 관람한 이시스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그 호의를 냉큼 받았다.
“분명 이시스 님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기예요?”
“흥, 이 몸을 뭐로 보느냐? 네가 주는 도토리 따위 받아서 뭐 하려고?”
도, 도토리……. 이시스가 얼마나 내 존재를 하찮게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이 내기에 내가 걸 게 없다는 사실에 그저 신났다. 자존심은 이미 개나 줬기 때문에. 작게 한숨을 내쉰 이시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래, 뭐. 어쨌든 기왕 성공시켜 보겠다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렇게 나는 바라던 대로 온도 유지 마도구 판매 프로젝트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그것으로 오늘 방문 용건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시스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입술을 삐쭉 내밀며 비꼬는 모습이 영락없이 심통 난 어린아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신전에 다녀온 후에 내 앞으로 쌓여 있었던 십여 통의 서신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시스에게 죄악과 관련된 말을 할 수는 없으니, 나는 대충 둘러대었다.
그런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심드렁하던 이시스의 눈이 과하게 반짝였다.
“왜. 그 망할 실베스터 페르디아 놈이 고혈압으로 쓰러지기라도 했느냐?!”
왜 하필 고혈압이지? 내 부정에 이시스가 노골적으로 낙담한 티를 냈다.
이 못 말리는 유교 보이가, 도대체 나 몰래 뭘 시도한 거야? 도무지 마탑주의 범상치 않은 사고방식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괜히 두 사람 사이에 끼었다가 못 볼 꼴을 볼 게 뻔하니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네가 조언해 준다고 했잖아. 그래서 오라고 부른 건데.”
여전히 비관적인 이시스를 보며 나는 마도구를 잘 팔아먹기 위한 고민에 들어갔다. 우선 계절에 맞지 않는 마케팅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여름이니까 언제나 차가운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전면에 내세워요.”
진심으로 이시스는 용도를 불필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물론 그럴 만도 했다. 마탑은 물론이거니와 페르디아 저택의 실내는 사시사철 적정 온도가 유지되는 온도 유지 마법이 발동되어 언제나 쾌적했으니까. 이건 어느 정도 돈이 있다는 고위 귀족이나 상인 집단들은 필수적으로 자택에 설치하는 마법이기도 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살인적인 더위를 평소에 경험하지 못했으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확인 삼아 물어보았다.
“이시스 님. 주로 마도구를 사러 오는 구매층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귀족들이지. 혹은 돈 많은 상인이거나 외국에서 온 관광객이라든가.”
주 판매대상인 귀족들이나 상인들은 이 마도구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물론 휴대용으로 가지고 다니거나, 군 보급용으로 사용한다면 훌륭하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주 판매 계층이 평민들이라면 어떨까.
아무래도 그 부분은 이시스와 더 논의를 해 봐야 할 듯싶었다. 조만간 열릴 발표회까지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는데, 이시스가 뜬금없는 물음을 건넸다.
“요새 네 이름이 자주 들리던데. 네가 1황자한테 차였다고.”
난 또 갑자기 무슨 말 하나 했네.
“합의 하에 파혼한 거였는데, 소문이 그렇게 났나 보네요. 뭐, 상관없어요.”
내가 차든 차이든 어쨌든 파혼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어차피 만신창이인 사교계 평판 따위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마도구나 팔련다. *** 볕이 조각조각 드는 주랑을 가로지르던 아덴미르는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그는 장식이 양각된 큰 기둥을 응시했다.
몸도 발도 손도 다 작았던 어린 여자아이와 처음 마주쳤던 곳이. 제왕학 수업이 끝나고 검술 수업을 위해 길을 걷던 아덴미르는 기둥 뒤에서 숨어서 자신을 바라보는 연분홍색 커다란 눈과 마주쳤다.

한가득 물기가 어린 눈동자는 제가 울었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는 건지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길을 잃은 주제에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아이의 모습이 제법 인상적이었다.
아덴미르는 그대로 아이를 지나쳐 주랑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기둥을 지나치는 순간 뒤돌아본 아덴미르는 뜻밖의 풍경을 보았다. 아이는 기둥 뒤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은 모습은 꼭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서일까. 아덴미르는 저답지 않은 일을 했다. 근처에서 두리번거리는 아이의 유모로 보이는 여자에게 다가가 위치를 알려 주었으니까. 그때는 몰랐다. 그 아이가 페르디아 공작의 사생아로 유명한 엘로디 페르디아이며, 더 나아가 제 약혼녀가 된다는 사실을. 약혼이 쉬웠던 만큼 파혼 또한 쉽다는 사실도.
61화. 엘로디 IS FREE!
6–8 minutes
황제의 침실 앞. 목적지에 도착하자 아덴미르의 상념도 끊어졌다. 그는 짧게 노크한 후 부황의 침실에 발을 들였다. 늘 그렇듯 어두컴컴한 암실 같은 침실 속에서 가만히 누워 있던 황제가 상체를 일으켰다. 아덴미르는 향로의 불을 끄고 커튼을 걷으며 물었다.
“훨씬 낫다……. 네가 준 해독제의 효험이 뛰어나구나.”
가문에 뛰어난 약제사가 있다는 엘로디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정말로 보내온 해독제를 복용한 이후 황제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살아 있기’만 하던 과거와 달리 침실 내를 몇 바퀴나 돌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호전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밖에 새어나가게 되면 독을 쓴 자들이 꼬리를 자를 것이므로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황제도 아덴미르의 의견에 동의하여 연기에 동참했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는 자신의 상태에 새삼 감탄했다.
“황실 약제사도 알아내지 못한 독을 해독할 뛰어난 약제사라니, 대체 누구란 말이더냐?”
“추후 독의 배후를 밝힌 후 부황께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덴미르는 약제사가 누군지 궁금해하는 부황의 물음을 능숙하게 넘겼다. 페르디아와 연관되는 것을 경계하던 부황이었다. 출처가 엘로디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혹여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직 말하지 않았다. 더구나 도움을 주는 자가 파혼 상대라니, 웃기지도 않는 이 상황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아덴미르가 홀로 조소하며 부황의 상태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황제가 물었다.
갑자기 거론된 ‘엘로디’라는 이름에 아덴미르는 하마터면 동요할 뻔했다. 마침 엘로디를 생각하던 중이기도 했고. 그는 덤덤함을 가장하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파혼 협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이변이 없다면 오늘 공식으로 파혼 발표를 할 것입니다.”
황제가 침음을 내뱉으며 제 턱을 쓸었다. 그는 불과 얼마 전 만났던 엘로디를 떠올렸다.
제 치부를 오히려 무기처럼 쥐고 흔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가진 거라곤 자존심밖에 없는 치기 어린 아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모습이 제법 인상적이라 아직도 종종 떠오르곤 했다. 무엇보다 병석에 누워 있다고는 해도 황제인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페르디아가 아니었다면, 엘로디 그 아이의 처지도 달랐을 터인데.’
여러모로 안쓰러운 아이였다. 하지만 이미 끝난 약혼 건에 대해 말을 얹을 생각은 절대 없었다. 황제는 무심한 표정의 제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황족, 그것도 황자와의 약혼은 귀족가의 레이디에게 있어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영예였다. 무사히 혼인이 끝나고 나면 황가의 일원이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엘로디 페르디아는 파혼했다. 사람들은 파혼의 이유를 멋대로 추측하며 그녀를 있는 대로 깎아내릴 것이다. 실제로 파혼 소식이 새어나간 이후로 사교계에서는 파혼 이야기로 온갖 추측과 낭설이 떠돌고 있었다. 이런 불명예가 있을까. 진실이 무엇이든 ‘파혼당했다’는 낙인이 찍혀 앞으로 엘로디 페르디아는 결혼 시장에서 가치 없는 매물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훨씬 못 미치는 사내와 결혼하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아덴미르는 조소하며 대꾸했다.
“무정한 녀석. 만나거든 잘 대해 주거라. 안쓰러운 아이가 아니냐.”
아덴미르는 황제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화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을 깨달은 황제가 짧게 코웃음을 쳤다.
“우선 부황을 해하려 한 자를 색출하여 처단할 생각입니다.”
아덴미르의 답에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는 가만히 제 아들을 응시했다.
모호한 질문에도, 황제와 아덴미르는 똑같은 생각을 했다. 배후에 살바트리체 황비가 있다는 것. 이번 사건으로 덜미를 붙잡더라도 그녀의 세력을 몰아낼 수 없다는 사실 또한. 황제는 실소를 터트렸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황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건강을 잃고 침대 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황비의 세력은 야금야금 황제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허수아비 황제가 되어 버린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제 아들을 지키는 것조차 할 수 없다. 그저 독인 줄 알면서도 약을 삼킬 수밖에.
독의 배후를 지목할 경우에는 더 이상 전면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황제는 지금 아덴미르가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할 바엔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낫다. 섣불리 들쑤셨다가는 도리어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
단호하게 대답한 아덴미르가 말을 이었다.
아덴미르와 눈이 마주친 황제는 그 속에 단단한 각오를 엿보았다. 그것은 이미 몇 번이고 고민을 거듭한 후에야 만들어지는 결연한 눈빛이었다. 누구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맞서겠다는 선언.
무모했기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적의 딸을 두 번째 아내로 맞을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남편이자 아버지. 아들만은 그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랐을 뿐인데. 그러나 핏줄을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엘로디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너처럼 성격 고약한 녀석과 약혼하고 싶어 하는 아이는 그 아이밖에 없을 것이다.”
아덴미르는 수하에게 보고 받았던 엘로디의 행적을 상기했다.
‘저택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던가.’
좋아하는 쇼핑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길 며칠째라고 했다. 분명 자신이 먼저 거론했던 파혼일 터인데, 무엇을 그렇게 조심하는 건지 아덴미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상처받기라도 한 건 아닐 테고. 그런 아들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황제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름이 오르내릴 테니,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않겠느냐.”
자존심 강한 성격이니, 사람들의 낭설에 진짜 상처라도 받았는지도 모른다. 의도치 않게 아덴미르는 마음이 불편한 것을 느꼈다. . . . 한편, 파혼 발표 직후. 황제와 아덴미르의 예상과 달리 엘로디는-.
환호 중이었다.

***
마사가 선물해 준 도넛 모양의 쿠션에 쏙 들어가 자리 잡은 탐욕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황실에서 공식 발표한 파혼 공문의 네 귀퉁이에 꽃과 별을 잔뜩 그렸다. 순식간에 파혼 공문이 러블리해졌다. 이름하여 파혼 공문 꾸미기. 줄여서 ‘파꾸’ 되시겠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후 나의 가장 큰 흑역사는 바로 1황자 아덴미르와의 약혼이었다. 어떤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할 거라며 약혼을 졸랐던 나의 부끄러운 과거 말이다. 패악질을 부렸던 다른 사건들은 과거로 흘러갔다지만, 약혼만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건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그랬던 걸 드디어 치웠으니,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약혼 상태로 수도를 떠난다면, 황가의 추적이 따라붙을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줄곧 찝찝했는데, 이젠 어디든 갈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나를 죽이려고 했던 암살자 무리의 배후를 알아내기 전에는 어느 정도 울타리가 되어 줄 페르디아를 뜰 수 없을 테지만. 어쨌든 그것만 제외하면, 남은 건 돈을 버는 것뿐. 그리고 바로 오늘이 대망의 마탑 주최 신제품 마도구 발표회였다. 마도구 발표회는 주로 신제품 홍보를 위한 장이었다. 그때 많이 팔린 마도구는 상단과의 입찰을 통해 계약을 맺어 대륙 전역에 유통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잘 팔리기만 한다면, 투자자로서 이후에 떼돈을 벌 수 있다는 말씀. 준비는 모두 끝났다. 그동안 내 방에 틀어박혀 이번 마도구를 잘 팔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하지만 이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오늘로써 252번째로 탐욕이 용트림했다.
*** 발표회는 마탑 홀에서 이루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마도구를 출시한 마법사들의 신제품을 전부 모아 발표하기에 구경하기 위해 들른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대부분 귀족이었고, 그다음으로는 상단의 직원이나 부유한 상인 계층 등이 있었다. 아는 얼굴이 곳곳에 보였다. 연회에서 마주치곤 했던 가문의 영식, 영애들, 그리고 저택에서 몇 번 인사를 나눈 적 있는 페르디아 상단 소속 직원이었다. 어차피 마법사 엘비의 투자자가 나라는 걸 다들 모를 테니 신분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이곳에 있는 수많은 레이디처럼 나 또한 마법에 관심 있는 한 명의 레이디로 보일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시기였다. 내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쑥덕대기 시작했다. 마침 공식적으로 파혼 발표가 난 직후라 화제성 또한 최고조였다.
“요새 통 모습이 보이질 않더니, 발표회에는 웬일일까요?”
“파혼당했다더니 얼굴이 제법 수척해졌네요, 안타깝게도.”
억울하다……!
하지만 굳이 오해를 정정할 필요는 못 느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하는 저들은 내가 낙담하길 바라는 거겠지?
탐욕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네네, 맞습니다. 제가 바로 1황자한테 파혼당한 불쌍한 엘로디 페르디아입니다.’
떠들 테면 떠들어라. 뒷담을 가장한 앞담을 들으며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자, 레이안이 한 발짝 다가와 흘끔흘끔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일부 차단해 주었다. 내 위로 레이안의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었다가 나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건 몰랐다. 괜히 나 때문에 레이안이 곤란해지지는 않을지 걱정되었지만, 정부까지 될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리곤 입을 꾹 다물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어색한 분위기가 되는 건 싫었다. 그러는 사이, 발표회가 시작되었다.
유망한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제 마도구를 최선을 다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공격형 마도구로 전투 상황에나 쓸 법한 것들이었다. 마도구의 장점이란, 마력을 다룰 수 없는 일반인들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이기에 공격형 마도구는 인기가 많았다. 상대적으로 생활 밀접형 마법은 가치 없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가운데 무대에 오른 마법사 엘비의 마도구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마탑주 대신 무대에 오른 신입 마법사가 손을 덜덜덜 떨며 마도구를 소개했다.
“이, 이 마도구는…… 선배이신 마법사 엘비께서 만든…… 제가 대신 소, 소개를-.”
아무리 마탑주라는 신분으로 나서고 싶지 않다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데려다가 노동을 시키면 쓰나. 보는 내가 더 안타까울 정도였다.
신입 마법사의 소개가 끝나자 놀랍게도 엄청난 반응이 뒤따랐다. 물론 긍정적인 반응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발표회의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혹평을 해 댔다.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그렇게 놀랍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나는 출입문을 힐긋 쳐다보았다.
설마, 실패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점점 초조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시시각각 마법사 엘비의 신 마도구 시연은 끝나가고 있었다.
절망에 빠지려는 바로 그때였다. 쾅! 마탑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안에 들어섰다.

62화. 나, 부자된 거 맞지?
6–7 minutes
외마디 외침과 함께 밀고 들어온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사람도 아니었다. 쿵, 쿵! 저돌적인 기세로 마탑에 들어온 그들은 바로…….
드워프였다.
갑작스러운 이종족의 등장에 마탑 홀에 있던 사람들이 일동 경직되었다.
그도 그럴 게, 드워프들은 좀처럼 자신들의 마을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었다. 괄괄한 성격에다 고집스러운 장인 정신을 가지고 있어 제 신념에 반한다면 상대가 귀족이건 황족이건 개의치 않고 맞섰다. 하지만 그들이 제작하는 각종 분야의 무기나 예술품은 인간들이 만든 것에 비해 훨씬 우수하고 뛰어나 누구나 거래하기를 희망하는 최고의 장인들이었다. 그런 드워프가 마탑의 신제품 마도구 발표회에 오다니? 척척, 짧은 다리를 큰 보폭으로 움직여 무대 앞까지 걸어온 한 무리의 드워프들은 험악한 얼굴로 무대 위 마도구를 뚫어져라 보았다. 방금까지 참석자들의 혹평을 한 몸에 받던 마도구였다. 사람들은 당연히 드워프들이 무언가 착각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놈들이 무작스럽게 다 사 버리면 우린 어떻게 사라고? 꺼져! 스무 개 줘!”
돈이 든 주머니를 치켜들며 드워프들은 우렁차게 ‘내놔!’를 외치는 게 아닌가. 졸지에 신입이라는 죄로 대타로 나온 신입 마법사는 안쓰럽게도 홀로 드워프를 상대하게 되었다. 마법사는 허둥지둥 어리숙하게 고개를 숙이며 매뉴얼대로 대응하려 했다.
그렇게 시연회는 그대로 중단. 이후는 일방적인 사재기의 현장이었다.
“비켜! 밀지 마! 저게 있어야 ‘이 몸의 지상 최대 최강 미스릴 갑주’를 만들 수 있다고!”
“이름이 뭐 그따위야? 나야말로 ‘이 몸의 전대미문 기상천외한 최강 아다만트 방패’ 만들어야 되거든? 더 줘!”
드워프들은 서로 최강의 어쩌고를 만들어야 한다며 경쟁했고,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서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드워프들이 좋아한다는 맥주랑 같이 한번 써 보라고 마도구도 같이 보냈지.’
드워프들처럼 제작에 미친 종족이라면 분명 저 마도구의 가치를 알아보리라 생각했다. 아주 미세한 온도 변화에도 달라지곤 하는 게 작품의 결과일 테니까. 그리고 결과는…… 보는 대로 대성공! 드워프들에게는 미안한 사실이지만, 사실 지금 판매하는 마도구는 본래 이시스가 발명한 마도구의 열화 버전이었다. 일부러 단가를 낮추기 위해 수요가 그리 많지 않은, 크기가 작은 마석을 사용한 것이다. 마도구에는 한 계절 보낼 수 있을 정도의 마력만 담겨 있었다. 마법사에게 의뢰하면 충전하여 재사용할 수 있지만 몇 번의 재사용 후 그릇인 마석의 수명이 다하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품질 좋은 마석으로 마도구를 만들면 오랜 기간 사용할 수 있지만, 평민들은 꿈도 꿀 수 없을 테니까. 이후에 새로 사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당장 구매할 수 있다는 점에서 꽤 시장 가치가 있을 거라 판단했다. 파는 입장에서도 일회성으로 판매하고 마는 것이 아닌, 꾸준히 판매가 발생한다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 거고. 하지만 모든 상황이 내 의도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드워프들 외에도 한 군데 더 마도구를 홍보했지만,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드워프들만으로 준비한 마도구를 전부 파는 데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아쉽긴 했다. 그렇게 마탑 무대 앞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기웃, 기웃-. 이질적인 차림새의 사람들이 무대 근처로 다가왔다. 기존에 참관하러 온 귀족들의 고급 옷감과 화려한 장식이 달린 차림새가 아닌, 수수한 모습. 평민들이었다.
“간만에 밤에 안 깨고 시원하게 자겠구나 싶었는데, 아쉽구먼그래.”
드워프 마을에 홍보용 마도구 시제품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수도 시장의 상인들에게도 홍보 전단과 시제품을 뿌려 놓았었다.
시연이 끝나 갈 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관심이 없는 건가 싶었는데, 장사 시간 때문에 늦게 온 거였다. 드워프, 그리고 상인들. 둘 중 하나만 걸려라 하는 마음으로 홍보했는데, 두 집단 모두 오다니. 하지만 상인들이 온 시점에서 드워프들이 돈주머니를 흩뿌리며 마도구를 전부 산 탓에 남은 물량이 없었다.
헛걸음한 상인들이 축 처진 채 마탑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돌연 드워프들 중 한 명이 버럭 호통을 쳤다.
마탑 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우레 같은 외침에 같은 드워프들은 물론 귀족들과 나가던 평민들까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돌아보았다.
“그렇게 다 사 버리면 어떡해? 이 무식한 놈들아. 이 사람들도 사게 하나씩만 덜 사라고!”
드워프의 일침에 하나라도 더 사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다른 드워프들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드워프들의 선심에 나가려던 평민들이 도로 돌아와 그들이 건넨 마도구 하나씩을 품에 껴안았다.
아주 훈훈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사지 못한 사람 없이 원하는 자들은 마도구를 다 살 수 있었으니까. 나는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레이안에게 속닥거리며 물었다.
“본격적으로 판매가 진행된 후에 대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부자다. 아직 부자는 아니지만 예비 부자다!
어김없이 탐욕이 용트림했다. 아직 판매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마법사 엘비의 마도구는 모두 팔리고 말았다. 매진!
탐욕의 용트림을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뿌듯한 기분으로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광경을 목격한 귀족들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최대한 많이 사려고 안달 내는 것. 마법은 비싼 것이라 치부하며 관심 두지 않던 평민들까지 와서 사 갈 정도의 마도구. 이 마도구의 가능성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신인 마법사 엘비가 첫 번째로 출시한 마도구는 그야말로 대히트했다. 현재 판매는 마탑에서 이뤄지고 있는데, 소문을 들은 평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집 안에 온도조절 마법을 상시로 발동할 수 없는 사람들, 즉 하급 귀족들도 사용인들을 시켜 무더기로 사 갔다. 매일 매진 행진이라 마탑주 이시스의 명령 아래 마탑 소속 마법사들은 매일 엘비의 마도구를 제작하는 데 매진했다. 그런데도 미친 듯 폭주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소속 마법사들의 콧대를 콱 눌러 줘서인지 전과 달리 이시스는 의기양양한 상태였다.
“크하하! 네가 봤어야 한다.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이 몸의 눈치나 보던 그 광경을! 얼마나 속 시원하던지!”
“와, 좋으시겠어요. 역시 최고의 마법사 이시스 님.”
고저 없는 내 감탄에 이시스가 부끄러운지 턱을 매만지며 시선을 피했다.
“바로바로 이 시대를 풍미할 대마법사 이시스 님이시죠.”
이게 바로 사회생활 아니겠습니까. 이시스에게 듣기로,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은 마법사 엘비가 마탑주라는 걸 다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자기들 기준에 못 미치는 마도구를 이시스가 개발하자 하나라도 팔리기나 하겠냐고 조롱했단다.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나는 열심히 맞장구를 치다가 이시스에게 물었다.
오늘치 아부도 했겠다, 나를 부른 이유를 들을 때였다. 뚝, 싱글벙글 웃던 이시스의 귀여운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도구 유통 독점 계약. 마법사들이 발명한 모든 마도구가 계약하는 건 아니었다. 상품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마도구를 유통하기 위해 여러 상단과 길드가 계약을 제안하는 경우에만 체결할 수 있었다. 마탑 판매분을 제외한 이외의 유통을 독점하는 계약이었다. 전국 각지의 상단 지부에서 판매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비율은 계약 상단이 먹지만.
나는 이시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송보송한 분홍색 머리칼. 앙증맞은 체구. 심통 맞은 귀여운 얼굴…….
영락없는 사기 계약 당할 상이었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마탑주라고 해야 할까. 속마음을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보던 이시스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독점 계약 제의가 왔거든. 제법 많이.”
앙겔로스 싫어.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인데. 아, 곰곰이 생각을 더듬던 나는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렸다. 펠릭스 히클마이어. 이슈타르 신전에 세베레스 공작의 대리인으로 참여했던, 공작의 방계이자 보좌관인 남자. 즉, 내 사촌이었다.
아는 사이냐고 묻는다면 아니지. 나는 그쪽을 알아도, 그쪽은 나를 모를 테니까.
“그리고, 도브, 주르탱, 살르 상단. 그 외에도 있긴 한데, 계약할 만한 곳은 이렇게 다섯 군데 정도야.”
펠릭스 히클마이어를 제외하고는, 다 들어 본 적 있는 상단이었다.
“외국에 큰 상단 하나 소유하고 있다던데. 이번에 윌렌티아에서도 사업 시작한다더라.”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이시스의 말대로라면 규모 있는 상단일 듯싶었다.
“예상했겠지만 이 몸이 마법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계약 뭐 그딴 건 젬병이거든.”
얼마나 마법 실력이 뛰어나면 실무 능력도 없는 인간을 탑주 자리에 앉혔을까. 이시스의 부하들이 불쌍했다.
“어쨌든 조건 들어 보고 결정하려 하는데, 투자자께서도 함께 가는 건 어떤가 싶어서.”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단 한 번도 독점 계약에 투자자가 관여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유일한 투자자라고 해도, 동행하는 건 파격적인 대우인데. 하지만 이시스는 거리낌 없이 답했다.
내가 특별하다고?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나를 쓸모없는 존재처럼 대했으니까.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어렵사리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이시스의 푸른 눈동자에 내 모습이 가득 담겼다.
“왜인지 널 보고 있으면,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 같거든. 이상하게.”
이시스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 이유를 찾으려는 듯. 하지만 나는 옛날에 이시스를 만난 적이 없는데.
그러다 픽, 웃은 그가 또다시 물었다.
“마법사 엘비는 없는 사람이잖아요. 어떻게 하려고요?”
그러자 그게 무슨 걱정이냐는 듯 이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어떻게 변장한다는 뜻일까. 어째선지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가는 가운데, 이시스가 씩 웃으며 선언했다.

63화. 앙겔로스 전문 저격수
6–7 minutes

앙겔로스 상단과의 교섭 당일.
“네가 마법사 엘비 역이고, 이 몸은 네 조수다. 알겠느냐?”
무슨 오늘부터 1일인 연인도 아니고, 뭘 차차 알아 간단 말인가. 하지만 영락없는 꼬마 모습인 이시스가 못 미더운 것도 사실이니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마법사 엘비 역을 맡게 된 나. 키를 제외한 다른 신체적 특징을 알 수 없도록 발끝까지 내려오는 마탑 소속의 로브를 입고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후드를 꾹 눌러썼다. 봉인석 속 탐욕이 낄낄 웃으며 내 모습을 조롱했다.
드디어 탐욕 녀석이 조용해졌다. 나는 성별을 감추기 위한 음성 변조 마도구를 소중히 쥔 채 이시스와 함께 마탑 응접실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앙겔로스 상단의 부대표라는 인간이 와 있었다. 그자는 우리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시선의 끝에 있는 건 이시스가 아니라 나였다. 역시 내 허리 정도까지 오는 이시스가 마도구를 발명한 마법사로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최대한 목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피차 시간 낭비일 테니 곧바로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마법사 엘비.”
쓸데없는 대화로 인사치레할 생각이 없던 건 나도 마찬가지라 또다시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자 부대표가 씨익 웃으며 준비해 온 조건을 제시했다.
“비율은 7할 제시하겠습니다. 특별히 업계 최고로 맞춰 드리는 겁니다. 이보다 높은 비율을 제시하는 상단은 없을 거라고 자부하지요.”
7할. 확실히 평균 독점 유통 계약의 비율이 6할이니, 높은 비율이긴 했다. 정말 이 비율을 준다면 진지하게 계약을 고민해 볼 만했다.
앙겔로스 상단은 옛날부터 악평이 자자했다. 온갖 분야에 공격적으로 뛰어들어 독과점은 물론이고, 소상공인들의 생계마저 위협했다고 들었다. 계약한 마법사들의 처우는 어떤지 미처 조사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높은 조건을 제시할 줄은 몰랐다.
정말 좋은 조건만 제시했다면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누구나 앙겔로스 상단과 계약하려 했겠지. 저쪽도 마법사 엘비의 마도구의 가치를 인정했으니 그만한 비율을 제시했을 터. 그러니 좀 더 협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도 괜찮을 것이다. 그때 내 팔뚝을 콕 찌른 이시스가 작게 귓속말했다.
어차피 이시스는 돈이라고는 차고 넘치는 마탑주일 테니 전적으로 내 판단에 맡겼다.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마도구를 발동했다.
영락없이 앳된 남자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미 테스트해 봤는데도 잠깐 놀랄 정도였다.
당연히 교섭 타결이라 생각하는 듯한 부대표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내 용건을 이야기했다.
“그 전에, 가계약서를 살펴본 후에 결정하고 싶습니다만.”
자고로 계약은 신중하게 하는 거라고 했다. 제 말이 도중에 끊겨서 짜증이라도 난 건지 부대표의 표정이 언뜻 굳었다가 얼른 펴졌다.
그는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우리 앞으로 계약서를 밀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첫 장에 우리 상단이 제시했던 비율이 적혀 있습니다. 이 조건이 업계 최고 비율이라는 데에는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나불나불. 묻지도 않았는데 부대표는 본인들이 제시한 조건이 얼마나 특별하고 엄청난 비율인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끄러운지 도무지 계약서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보통 사람들 기준으로. 하지만 나는 그 시끄럽던 교실에서도 수능 공부를 했던 기억을 가진 인생 2회차.
부대표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차분하게 계약서를 살폈다. 가장 첫 페이지는 저 작자가 말한 대로 비율이 명확히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페이지에는 마도구의 유통 범위, 즉 어느 나라 어느 지점에서 팔 것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었고. 세 번째 페이지는 판매 대금을 언제 어떤 방법으로 지급할지 자세히 나와 있었다. 거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네 번째 페이지로 넘기려던 그때였다.
갑자기 부대표가 나를 불렀다. 계약서를 넘기다 말고 고개를 들자 엄숙, 근엄, 진지한 얼굴로 부대표가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도 신입 마법사에게 이만한 투자를 하는 건 처음이라서요.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릅니다.”
얼씨구? 투자?
일단은 무슨 말을 하나 보기 위해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어디 더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부대표가 여전히 심각한 분위기로 말을 덧붙였다.
“최대한 빠른 결정을 내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혹시나 대표님께 연락이 오면 조건이 바뀔 수도 있으니…….”
부대표는 내가 내려놓은 계약서를 은근슬쩍 끌어가더니 첫 페이지로 되돌렸다. 그러고는 그 위에 깃펜을 올려 두었다. 나는 그 일련의 행위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잠깐.
이 인간, 분명 뒤에 장수가 더 있는 걸 봤는데, 어물쩍 서명하길 유도하고 있었다. 분명 3페이지 이후에 내가 본다면 본인들에게 불리할 조항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앞선 부대표의 경고를 상큼하게 무시하고 깃펜을 치운 후 계약서를 다시 펼쳤다. 흘긋 본 부대표의 표정이 언뜻 굳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네 번째 페이지를 바로 펼쳤다.
“다른 상단에서는 제시하지 않는 조건입니다. 놓치면 후회하실 텐-.”
마지막까지 부대표는 내가 곧바로 서명하길 종용했다. 도대체 무슨 조항이 있기에 읽지도 못하게 하는가 보자. [갑은 을에게 ‘온도 유지 마도구’의 제작 레시피를 제공한다.] 여기서 갑은 마법사 엘비였고, 을은 상단이었다. 그제야 나는 부대표가 하려는 짓을 이해했다. 설명을 구하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게 여유롭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마도구 제작 레시피 포함하여 특별히 독점 계약 3년 제안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조건을 말했다는 듯, 더없이 뻔뻔한 태도는 아주 가관이었다. 그 태도에 나는 기가 찼다. 제작 레시피까지 빼 가겠다고?
하지만 분명히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으니 저들의 요구조건이 맞았다.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부대표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지만, 남자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결론이 났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지레 찔리기라도 하는 건지 부대표가 말을 덧붙였다.
“레시피를 제공하는 대신 계약 기간은 현저히 짧습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다른 상단과도 계약할 수 있으니 아주 괜찮은 조건이지요.”
개뿔. 짧은 기간 동안 제작 비법만 쪽 빨아먹고 버리겠다는 뜻이잖아? 하지만 나는 마치 호구처럼 감탄하며 계약서를 계속 살펴보았다. 뒤 페이지에는 더 가관인 조항이 있었다.
이러니 앙겔로스 상단과 계약한 마법사들이 저들의 만행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구나. 마법 계약서인 만큼 어기게 되면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니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던 이시스가 내 팔뚝을 콕콕 찌른 후 속닥거렸다.
“걱정 마세요, 이시스 님. 제가 탈탈 털어드릴게요. 앙겔로스는 제 전문이거든요.”
나는 이시스의 전폭적인 믿음을 등에 업고 깃펜을 쥐어 서명란에 가져갔다. 그리고 사인하기 직전-.
옆에 있던 애꿎은 잉크 통이 계약서 위로 쏟아졌다.
나는 부러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찬 후 계약서를 소파 옆에 있는 통 안으로 집어 던지며 요구했다.
부대표가 가방에서 여분 계약서를 꺼내 내 앞에 내려놓았다.
“우리 상단은 대륙 최고입니다. 마법사 엘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부대표는 마치 계약이 성사된 듯 특유의 오만한 미소로 웃었다. 어차피 로브로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을 테지만, 나 또한 마주 보고 웃었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성사 직전까지 갔던 계약이 불발될 위기에 처하자, 분위기는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저는 고작 비율이 높다고 사인하는 속물이 아닙니다. 제 위대한 걸작 마도구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금전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제 새끼입니다.”
그냥 해 본 말인데, 옆에 있던 이시스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된 계약이 엎어지자 부대표가 급히 수습하려 했다.
그리고 3초 후.
나의 완강한 태도에 몇 번이나 설득하려던 부대표도 결국 포기했다. 그렇게 끈질긴 앙겔로스를 떨쳐낸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부대표는 내게 엿을 날렸다.
“마침 앙겔로스에서 후원하는 남마탑의 마법사도 온도 유지와 증폭 마도구를 개발하고 있던 차라, 마법사 엘비의 마도구 기술과 접목하면 어떨지 기대했는데…… 아쉽군요.”
그냥 넘겨들을 발언이 아니었다. 나는 부대표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저 거기 친구 많습니다. 말해 보세요. 몇 기?”
저 자식 저거 거짓말이네. 남마탑의 마법사가 정말 그런 마도구를 개발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예상하건대, 이건 미리 밑밥을 깔아 두는 것이었다. 추후에 마법사 엘비가 발명한 마도구와 유사한 마도구가 출시되더라도 아무 말 못 하게 하려고.
내가 단호하게 말을 자르자 부대표가 난색을 보였다.
“앞으로 마도구를 내려면, 우리 상단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을 텐데요…….”
어쭈? 이젠 협박까지? 나 또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앞으로 서마탑과 거래하려면, 나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을 텐데.”
내 본체는 사실 마탑주니까. 부대표가 제 귀를 의심하는 듯 되물었다.
“아, 혼잣말입니다, 혼잣말.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내 인사에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부대표가 찜찜한 표정을 한 채 응접실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지자 나는 얼른 잉크를 쏟았던 계약서를 이시스에게 건넸다.
“계약서만큼 확실한 증거가 없지. 그럼 일부러 잉크를 쏟은 것이냐?”
일부러 계약하는 척 상대를 방심하게 만든 다음에 잉크를 쏟아 정신을 쏙 빼놓은 거였다. 그 이후에 계약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기까지 했으니 내 손에 들어온 계약서는 까맣게 잊었을 테고.
하지만 놈들을 본격적으로 조지기 위해서는 마탑주의 적대감을 키워 놓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이시스를 나지막이 불렀다.
그러자 이시스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나는 고요히 앙겔로스 상단에게 묵념했다. 특히 부대표.

64화. 펠릭스 히클마이어
6–8 minutes
그 이후로도 도브, 주르탱, 살르 세 군데 상단과 교섭을 시도했다. 하지만 어느 곳을 고르기 어려울 정도로 다들 비슷한 조건을 내세웠다. 나는 조건을 정리해 놓은 도표를 보며 한마디했다.
이시스는 눈앞에 있지도 않은 세 상단에게 사과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마탑주는 정말 범상치 않은 또라이였다.
아무래도 생각이 강하면 나와 계약 관계인 탐욕에게도 들리는 듯했다.
아무리 탐욕과 제법 친해졌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7대 죄악 중 하나였다. 녀석의 능력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내 비밀을 들켜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시스가 탁, 서류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소속 마법사들이랑 면담해서, 앙겔로스와 불공정 계약을 체결한 이가 있는지 전수조사했다.”
하는 짓이 제법 익숙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마법사 대부분이 당했다니.
“주로 신입 때 당하고, 그 이후에는 앙겔로스와 계약을 끊었다지만 이미 앙겔로스는 계약 기간 동안 뽑아먹을 대로 뽑아먹었지. 제작 레시피도 손에 넣었으니 잃을 게 없는 장사 아니더냐.”
이시스는 아까 내가 했던 발언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일리 있어서 차마 할 말이 없네. 넌 정말 한마디도 안 지는구나.”
어깨를 으쓱거린 이시스가 문득 짜증이 나는지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감히 이 몸의 마탑에서 사기 행각을 벌이다니, 가만 안 둘 테다.”
“마법사라는 종족이 얼마나 끈질기고 성가신지 보여 줘야지. 잘 보고 배우거라.”
정말이지 적으로 돌리면 피곤해질 스타일이었다.
이시스가 장하다는 듯 까치발을 들어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나는 옆에 꼭 붙어서 열심히 아부하리라 다짐했다.

*** 이제 교섭 대상 중 마지막으로 남은 건, 히클마이어 상단이었다. 히클마이어 상단에서는 무려 상단 대표인 펠릭스 히클마이어가 직접 온다고 했다. 펠릭스 히클마이어. 이슈타르 신전에서 본 적 있는 남자는 핏줄대로라면 내 사촌 오빠 되는 사람이었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한 건 아니지만, 눈은 몇 번 마주쳤다. 의미심장한 눈길이었지. 이번 계약 교섭에서 원래의 나와 마주친 적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응접실로 향하는 길. 매번 그랬던 것처럼 로브를 꾹 눌러쓰고, 음성 변조 마도구도 잘 챙겼지만 다른 상단과의 교섭 때보다 유독 불안했다. 나는 짧은 다리로 열심히 내 옆을 걸어가던 이시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멈춰 서서 가만히 턱을 괴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이시스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는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이안이 호위하기 위해 따르던 중이었다. 갑자기 나와 눈이 마주친 레이안이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가 곧바로 눈을 맞춰 왔다.
거창한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다. 답이 정해진 물음이지만 이시스가 말한 것처럼 본래의 나로는 안 보인다는 건성인 대답 정도면 족했다. 하지만 레이안은 상상도 못 한 대답을 내놓았다.
물론 레이안의 대답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윽고 우리는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 앞에 다다랐다. 들어가기 전, 나는 레이안을 돌아보았다.
“레이안. 혹시 너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눈에 안 띄는 곳에 있을 수 있어?”
호위에 관해서는 철저한 레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그 모습을 감탄하며 보던 이시스가 응접실 문을 눈짓했다. 이제 마법사 엘비 역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응접실 문을 열자 미리 도착해 차를 마시고 있던 펠릭스 히클마이어가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서 본 게 전부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단발 길이의 회색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오른쪽 눈가의 두 개의 눈물점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전반적으로 만만할 것 같지 않은 생김새와 분위기였다.
나로선 친부인 세베레스 공작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밖에 추측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친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세베레스 가주의 딸이라는 사실이 내 생존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이상 알아볼 가치는 있었다. 그러려면 펠릭스라는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체를 감춘 이 교섭은, 내게 퍽 유리한 자리이자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펠릭스의 맞은편에 우리가 앉자 그는 곧바로 인사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어서 오시지요, 마법사 엘비. 히클마이어 상단의 대표 펠릭스 히클마이어입니다.”
과묵한 콘셉트였기에 짤막하게 이름만 내뱉었지만 상대는 전혀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조건 협상에 들어가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야, 이번에 출시하신 마도구 정말 인상적이었네요! 투자 때 미리 알았으면 저도 투자했을 텐데, 안타까워요! 듣기로 투자자가 한 분이었다는데, 맞나요?”
갑자기 활발한 태도로 돌변한 펠릭스가 엄청난 기세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침착한 인사와 다르게 감당하기 힘든 친화력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콘셉트를 머릿속에 되뇌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하늘 꼭대기까지 치솟은 펠릭스의 텐션은 도무지 내려올 길이 보이지 않았다.
“크으으, 그분은 정말 복 받았네요. 이 엄청난 마도구의 유일한 투자자라니!”
“온도 유지 마도구라니, 사용 방법이 무궁무진하지 않습니까?! 차갑게도, 그리고 뜨겁게도 만들 수 있다니! 사실 발표회 전에 마도구 출시하셨을 때 마탑에 들렀다가 마법사 엘비의 마도구를 보고 하나 사서 써 봤는데, 자다가 얼어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다다다 쏟아지는 수다의 향연에 정신이 멍해질 때쯤, 가만히 있던 이시스가 부르르 떨더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제가 샀습니다! 하하. 아니, 그보다 두 개밖에 안 팔렸나요? 어이가 없네요.”
이젠 이시스까지 가세해서 마도구의 엄청남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조수님? 조수님 맞으시죠? 역시 조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군요! 대단한 분을 모시고 있으니 아주 뿌듯하겠습니다!”
“암, 뿌듯하고말고. 마법사 엘비는 최고의 마법사야!”
졸지에 그 사이에 낀 나는 두 눈이 핑핑 돌았다.
혹시 상대방의 정신을 쏙 빼놔서 계약을 따 내려는 고도의 수작인가?! 나와 같은 생각인지 탐욕도 괜스레 짜증을 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정신 공격에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단 말이지. 이미 앙겔로스 부대표가 비슷한 수법을 쓰려다 실패한 전적도 있었다. 이대로 두면 이시스는 몇 날 며칠을 마도구에 대해 떠들어 댈 것만 같은 기세였다. 회심의 마도구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이니 흥분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상대의 수작에 말리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그만하라는 의미로 이시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펠릭스를 호명했다.
“아, 제가 너무 혼자 신나서 떠들었네요. 예, 말씀하시지요, 마법사 엘비.”
정말로 순수하게 흥분해 버렸다는 듯 펠릭스가 수더분하게 웃으며 가지고 온 협상안을 제시했다. 협상안의 내용을 본 나는 순간 잘못 본 건가 눈을 의심했다. 그러자 펠릭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로운 음성으로 굳이 조건을 되뇌어 주었다.
앞서 교섭을 시도했던 다른 상단 어디도 제시하지 않은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심지어 나를 상대로 등쳐먹으려고 했던 앙겔로스조차 7할을 제시하지 않았나. 그러고는 엄청나게 당당해져서는 지금 계약하지 않으면 이 조건은 못 준다면서 되지도 않는 협박을 했는데. 펠릭스는 지금, 그 조건보다 1할이나 많은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을 살피기 전에 나는 앙겔로스가 했던 수작을 전면 차단했다.
그러자 펠릭스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앙겔로스가. 하지만 뒤이어 펠릭스는 조건을 덧붙였다.
당연히 다른 조건이 있을 것 같았다. 8할이나 되는 비율을 제시하는데, 아무 조건이 없으면 이상하지.
“같은 조건으로 이후 마법사 엘비가 출시할 마도구 두 개를 묶어서 계약하고 싶습니다.”
사실 상단의 전속 계약 마법사 개념도 존재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여러 마도구를 한 번에 계약하는 사례도 많으니 그렇게 특이한 조건은 아니었다. 고작 묶음 계약 때문에 8할이나 제시한다고?
“이후에 출시할 게 뭔 줄 알고 묶음 계약을 하려는 건지 궁금합니다만.”
내 물음에 침착했던 펠릭스가 다시 흥분하며 외쳤다.
“그거야 마법사 엘비의 마도구는 최고니까요! 지금껏 나온 마도구는 빌어먹을 쓸데없는 공격 마법밖에 없었는데, 마법사 엘비의 마도구는 달라요. 사용하는 사람을 위해 발명했다는 게 느껴지는 그런 마도구…… 저는 바로 그런 마법을 꿈꿔 왔습니다!”
“그러니 이후에 출시하는 마도구는 또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보면 압니다! 저는 마법사 엘비, 당신의 가치를 독점하고 싶은 거란 말이에요!”
펠릭스의 열정에 당황한 사이, 이시스가 또다시 대화에 난입했다.
이시스의 어깨를 붙들었지만 흥분한 마탑주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언제는 나더러 결정을 도와달라더니 마도구 칭찬에 홀랑 넘어가 버린 저 마탑주를 어쩌면 좋을까. 어쨌든 조건 자체는 우리에게 불리할 것 없었다. 애초에 8할은 업계 기준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었고, 이후 마도구 유통에도 같은 조건이라면 손해 볼 게 없으니까. 오히려 너무 좋은 조건이라 꺼림칙할 정도였다.
“계약서는 여기 있습니다. 천천히 살펴보시고 세베레스 수도 저택으로 보내 주세요. 저는 그곳에 머물고 있으니까요.”
무려 계약서를 충분히 살펴볼 수 있는 말미를 주는 여유까지. 그렇게 왁자지껄했던 협상이 끝나고, 나는 펠릭스 히클마이어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펠릭스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멀리 나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조만간 뵙도록 하죠.”
조만간? 그 의미를 묻기 전에 펠릭스는 빠르게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 오래간만에 맞는 아무 일정도 없는 꿀 같은 휴일이다.
“파혼도 무사히 했고, 황제 폐하 해독제도 어제 보냈고, 마도구 독점 계약도 끝났고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장나게 쉴 테다. 나는 이불 속에 폭 파묻힌 채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안락함을 즐길 수가 없었다. 타다닷, 퍽!
내 몸 위로 착지한 탐욕이 앞발로 이불을 와다다 긁었다.
“안 돼. 난 오늘 침대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갈 거야…….”
눈만 떼면 침실의 무언가를 박살 내는 사고뭉치 탐욕까지 밖으로 나가니 드디어 온전한 고요가 찾아왔다. 지금 돈 열심히 벌어서 독립한 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이렇게 살아야지. 행복한 상상을 하며 침대 위를 하염없이 뒹굴거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나의 평온한 안식을 방해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내 휴식. 침대에 걸터앉아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는 동안 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상하다. 사교계의 왕따인 내게 초대장이 올 리는 없을 텐데. 물론 간간이 오기는 했지만 파혼 이후에는 뚝 끊긴 상태였다. 황자에게 파혼당한 끈 떨어진 사생아에게는 볼일 없다는 뜻이겠지. 그런 내게 초대장을 보낼 정도로 할 일 없는 사람이 대체 누구일까.
기껏해야 초대장 하나겠지 싶어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집사가 문밖의 누군가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하인 한 명이 카트를 끌고 오더니. 우수수-. 엄청난 양의 초대장을 쏟아 내었다.
대체 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집사가 특유의 깐깐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사, 사람 살려.

65화. 지금, 나를 피하는 것 같은데
6–8 minutes

정신을 빼고 있기에는 너무 엄청난 양의 초대장들이었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며 집사를 돌아보았다.
“집사. 어떤 경위로 이렇게 많은 초대장이 내 앞으로 왔는지 혹시 아는 거 있어?”
사교계에서 딱히 주목도 받지 않던 내게 초대장이 쏟아진 데에는 분명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저택 내외 사정에 밝은 집사라면 아마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 내 예상대로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이슈타르 신전에서 있었던 사건이 가십지 기사로 실렸다고 합니다.”
“예. 아가씨가 바로 도탄에 빠진 세계를 구원할 구원자라는 신탁 말입니다.”
으윽! 내가 갑작스레 밀려온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건 말건 집사는 침착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주인님께서 신문사에 압박을 넣어 기사로 싣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감시망을 피해 삼류 가십지 하나가 기사를 터트렸다고 합니다. 그 결과 우후죽순 모든 신문사가 아가씨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시길, 이슈타르 신전이 유력하다 하십니다.”
언제까지고 언론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걸 알긴 했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그제야 내 앞으로 온 이 무수한 초대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조용히 있다가 수도 솜니아를 떠나려고 했던 내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건국제 때 이슈타르의 신단 주관을 아가씨께 맡기려 소문을 퍼뜨린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인님께서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페르디아 공작이라면 이슈타르 신전이나 다른 귀족들, 혹은 황제가 뭐라 지껄이건 힘으로 누를 것이다. 다소 반발이 있겠지만…….
욕받이 구원자 역할은 절대 사양이다. 전후 사정은 잘 알겠고, 이제 내 앞에 닥친 것은 이 엄청난 양의 초대장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인데…….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처량한 눈으로 집사를 올려다보며 불쌍하게 물었다.
“어차피 내 사교계 평판은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닌데?”
이대로 그냥 무시하더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지만 집사는 단호했다.
“그래도 쓰셔야 합니다. 페르디아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시지요.”
망할 답장 예법 같으니라고. 어쩔 수 없이 꿀 같은 휴식을 반납한 나는 책상 앞에 비척비척 앉아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당연히 미사여구를 잔뜩 늘어놓은 거절이었다. [친애하는 땡땡에게…….] [어느덧 푸르렀던 잎사귀가 붉은색으로 물드는 가을이네요. (중략)] [실로 안타깝게도 몸이 좋지 않아 부인의 초대에 응할 수가 없네요. (후략)] 저 많은 초대장에 각자 다른 거절의 대답을 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복사, 붙여 넣기 신공을 발휘하여 똑같은 거절 답신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답신을 썼을 때였다. 초대장 중에 눈에 띄는 이름이 몇 있었다. 첫 번째, 앙겔로스 공작 부인으로부터 온 초대장. [친애하는 레이디 페르디아에게. 선선한 바람이 부는…….] 요약하자면 나를 앙겔로스 저택의 가든파티에 초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내게 시비를 못 걸어서 안달이던 앙겔로스 모녀와 페르디아 공작을 견제하는 앙겔로스 공작을 생각하면 결코 순수한 의도로 초대하는 게 아니리라. 대체 무슨 수작일까. 잠깐 고민하던 나는…….
초대장을 찌익 찢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어차피 안 갈 거니까 앙겔로스 인간들의 의중 따위 파악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복붙 답신을 쓰고 나니 마지막 초대장 하나만이 남았다. 나는 겉 부분에 쓰여 있는 가문의 인장과 서명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펠릭스 히클마이어.]
마탑 계약 건에 이어서 초대장까지 오다니. 하지만 의아한 점은, 마법사 엘비가 아닌 엘로디 페르디아와는 아무 접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한 손으로는 테이블을 톡, 톡 두드렸다. 초대장의 내용은 다른 가문에서 온 내용과 별반 차이 없었다. 나와 친밀하게 교류하고 싶은데, 머물고 있는 세베레스 저택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
눈이 번쩍 뜨이는 단어였다. 세베레스 가문의 가주 리하르트 세베레스 공작의 잠적 이후로 외부인에게 단 한 번도 개방된 적 없다는 ‘그’ 세베레스 수도 저택! 펠릭스 히클마이어와는 대화 한마디 한 적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구원자라는 소문에 혹해서 초대장을 보냈을지, 그도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 초대한 건지 의중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회였다. 마지막 답신을 쓰기 위해 깃펜을 들었을 때, 소란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가라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카를로트가 샐샐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와 비비적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다시 답신을 쓰려는데, 카를로트가 한가득 쌓인 초대장을 발견하더니 물었다.
녀석은 어쩐지 못마땅한 기색으로 종이의 무덤을 들춰 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기 많다고 자랑하는 거냐.
무시하고 ‘친애하는’까지 썼을 때였다. 얼마나 가까이 있는 건지, 내 뒤통수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돌린 나는 어쩐지 광기가 번뜩이는 듯한 카를로트의 불길한 눈빛을 보고 말았다.
“신전에서 동태 눈깔로 쳐다보던 그 자식이잖아. 이 자식이 울 누님한테 서신은 왜 보내?”
펠릭스의 서신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종이가 처참하게 구겨졌다.
“이 망할 자식이 감히 누님한테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리는 거냐고?”
뭐가 그렇게 분한 건지 씩씩거리던 카를로트가 내게 불쑥 물었다.
아까부터 카를로트가 했던 행동은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도가 지나쳤다. 멋대로 들어와 다가오더니 개인적인 초대장까지 대놓고 보고, 참견까지. 내 표정이 싸늘해지자 카를로트가 잔뜩 시무룩해진 채 내 눈치를 살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구는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약해졌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쉰 후 누그러진 목소리로 카를로트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미련 뚝뚝 떨어지는 카를로트의 만류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결정하자 녀석이 입술을 삐쭉였다.
그렇게 말한 카를로트는 잠시 쭈뼛쭈뼛 내 눈치를 보더니 슬쩍 떠보듯 물었다.
“그 자식은! ……그놈 데리고 갈 바엔 날 데리고 가!”
레이안에게 알 수 없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카를로트가 발끈하며 외쳤다. 하지만 나는 짐만 되는 카를로트를 달고 갈 생각이 없었다.
언제 또 세베레스 저택에 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번 기회를 최대한 잘 이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카를로트는 비열했다.
“아버지가 아시면 못 가게 할 텐데……. 아버지 세베레스 공작 싫어하니까.”
이놈 봐라.
이번에 초대장이 내 앞으로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집사도 꼼꼼히 살피지 못한 것 같았다. 히클마이어 백작이 세베레스 공작의 조카라는 것도 간과한 채 확인도 하지 않고 들여보냈으니까. 그렇다는 건, 페르디아 공작도 초대 사실을 모르고 있단 건데……. 카를로트가 이른다면 정말 곤란했다.
내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카를로트를 노려보자, 녀석이 퍽 간절하게 외쳤다.
“얌전히 있을게. 가만히 있을게. 누님이 하라는 대로만 할게!”
하아. 고집부리는 카를로트의 태도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얀시가 아닌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해맑게 대답하는 카를로트를 뒤로한 채 나는 드디어 마지막 초대장의 답신을 썼다. 초대를 승낙하겠다는 내용이었지만. [친애하는 히클마이어 백작께. 어느덧 푸르렀던 잎사귀가 붉은색으로 물드는 가을이네요…….] 물론 인사말은 복사, 붙여 넣기였다. *** 마부의 기합과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아덴미르를 맞이한 건 페르디아 저택의 집사였다.
“어서 오십시오, 황자 전하.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덴미르는 새삼스레 페르디아 저택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들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실상 마지막 방문으로부터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약혼 동맹은 파했다. 그러나 당사자 간 합의에 따른 완만한 파혼이었기에 정치적 협력 관계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페르디아 공작과 직접 대면하여 논의해야 할 사안이 많았다. 응접실에 들어선 아덴미르는 미리 와 있던 페르디아 공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파혼 협의를 위해 나누었던 무수한 서신을 이르는 말이었다.
가벼운 너스레를 시작으로 그들은 최근 흘러가는 황실 상황에 관해 이야기했다. 대개 살바트리체 황비의 근황이나, 그녀가 꾸미고 있는 수작 등이었다.
“공녀에게 들었겠지만, 페르디아의 약제사가 만든 해독제로 기운을 차리셨소.”
페르디아 공작이 잠깐 뜸을 들인 후 대답했지만, 아덴미르는 어떤 미심쩍음도 느끼지 못했다.
“공녀가 폐하를 뵙고 향과 약이 독이라는 걸 알아내지 못했다면, 부황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오.”
“내 딸의 활약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마음에 들지 않던 며느리가 사라졌으니 근심도 더셨을 테고.”
뼈가 있는 말에 아덴미르가 잠자코 물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페르디아 공작이 자조적인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한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라는 말에 칭찬해 달라던 아이. 공작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던 엘로디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좀 더,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 먼저 응접실을 나선 아덴미르는 본 저택을 빠져나와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목적지는 엘로디가 머무는 별채였다.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텐데도 엘로디는 정말로 한 주에 한 번씩 해독제를 보내오고 있었다. 서신으로 감사를 표했지만 글로만 전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사용인 한 명 보기 힘든 유령 저택 같은 과거와 달리, 곳곳에 일하는 하녀와 하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엘로디를 찾아 방에 도착한 아덴미르는 엘로디의 전속 하녀인 마사를 불러세워 물었다.
“방금까지 여기 계셨는데 나가셨나 보네요. 아마 정원에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정원에 갔지만, 없었다. 정원에 있던 하인을 불러세워 묻자-.
“어, 방금까지 여기 계셨는데……. 다시 들어가셨나 봐요.”
문득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뭐가 이상한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아덴미르는 하인의 말대로 다시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이나 사용인들에게 주인의 행방을 물었지만 아덴미르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다시 침실로 돌아가 기다릴 요량으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아덴미르는 보았다.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여린 금발을.
아덴미르는 호전적으로 웃었다. 오기인지, 뭔지. 심사가 이토록 뒤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66화. 나는 누님의 개거든
5–6 minutes

대낮에 벌어진 난데없는 추격전. 상대는 무려 제국의 1황자이자 나의 전 약혼자였던 아덴미르였다.
“아가씨. 누가 별채 쪽으로 오는데요? 어? 1황자 전하?”
문득 창밖을 본 마사가 1황자의 출몰을 알린 것을 기점으로 나는 별채 안팎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귀찮게 해서 죄송했어요. 파혼하면 그 후로는 최대한 전하 눈에 안 띄도록 할게요.”
한 번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할 것 아닌가. 그런 내 노력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1황자는 별채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나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게 침실, 정원, 후원, 응접실, 식당, 별채의 온갖 장소를 돌아다닌 끝에 힘이 다 빠지고 말았다.
후원에 있는 나무에 기대 숨을 골랐다. 아까 마구간 쪽에 있는 것 같던데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리겠지. 그나저나 파혼도 잘 끝났고, 해독제도 꾸준히 잘 보내 주고 있는데 왜 이렇게 끈질기게 찾아다니는 걸까.
그럼 서신으로 전하면 될 걸 왜 굳이 만나러 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깐 휴식을 취한 나는 다시 도주하기 위해 건물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째서인지 스산하게 웃고 있는 아덴미르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주춤 한 발짝 뒤로 물러나자 그는 두 발짝 다가왔다. 갑자기 좁혀진 거리에 당황하는 내게 1황자가 추궁하듯 물었다.
아덴미르의 물음에 오히려 어리둥절한 건 나였다.
“그거야, 파혼하면 전하 눈에 안 띄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 조건으로 파혼에 동의한 것일 테니, 잊지 않았을 텐데 왜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구는 걸까. 어째서인지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게 이런 식으로 도망 다닌다는 소리였나? 언제까지?”
아덴미르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았다. 하지만 정작 어이없는 건 나였다. 파혼한 전 약혼녀를 보는 게 마뜩잖을 테니 배려해 준 나의 눈물겨운 노력을 몰라주다니.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나를 향해 몇 걸음 더 다가왔다. 과하게 가까워지는 거리가 부담스러워 물러나고 싶었지만, 내 뒤는 아름드리나무가 가로막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숨이 막히는 기분에 최대한 몸을 나무 쪽으로 붙이며 입을 열었다.
1황자 아덴미르가 나를 싫어하는 건 나도 알고, 마사도 알고, 수도의 귀족들도 알고, 하물며 제국의 백성들까지 전부 아는 사실이었다. 온몸으로 나를 싫어한다고 광고하고 다녔으면서. ‘누가 그래’라니. 전제국민이 다 안다고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냐 싶기도 했고, 본인이 아니라는데 굳이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차마 할 말을 잃은 내가 입을 닫자, 그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1황자에 대한 유감이 없으니 불편할 이유도 없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상대, 딱 그뿐. 하지만 아덴미르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뭐가 잘됐는데?
종잡을 수 없는 남자의 태도에 질색하던 나는 문득 눈을 좁히며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나는 짐짓 진지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환청, 환시…… 뭐 그런 증상이 있으신 게 아닌가 의심이 되거든요, 지금.”
이번에도 아덴미르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았다. 하지만 나는 더없이 진지했다. 황제에게도 독을 쓰는 마당에 1황자에게 독을 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아덴미르는 내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웃음 섞인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이제는 진단까지 하는군. 누가 보면 공녀가 내 주치의인 줄 알겠어.”
농담에 농담으로 대꾸했을 뿐인데, 아덴미르가 의아한 듯 물었다.
뜨끔. 별 의미 없는 물음일 텐데 찔리는 건, 아무래도 내가 켕기는 게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
농담까지 주고받았는데도 분위기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덴미르는 내가 도망쳐 다닌 것에 큰 유감이 있는 듯했다.
“공녀가 나를 피하면, 제삼자는 우리 사이에 뭐라도 있는 줄 알 거 아니야.”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오랜 약혼 기간 동안,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물론 약혼 기간 대부분 내가 1황자의 얼굴이 잘생겼다는 이유로 조금 좋아하긴 했지만, 뭐가 있다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었다. 신체접촉이라고 해 봐야 에스코트 정도가 전부였으니, 약혼했을 때도 그리고 파혼한 지금도 우리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내 눈이 조금 이상해진 걸까. 왜 1황자가 허무한 듯 웃는 모습이 아쉬워하는 걸로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스스로에게 경고한 후 나는 지금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니까 1황자의 주장은, 파혼했어도 우리는 어차피 별일 없었으니까 피할 필요가 없다 이건가?
이렇게 쿨할 수가. 이혼하고도 잘 교류하는 할리우드 스타 뺨치는 아덴미르의 사고방식에 감탄했다. 나라고 못 할 것도 없었다. 나는 팔짱을 낀 후 비장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인사라도 하고 지내자는 거죠? 서로 피하지 말고?”
대답이 한 박자 늦은 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니 다행이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도 없는 요구조건이었다. 나도 도망쳐 다니느라 제법 힘들기도 했고, 앞으로 공식 행사에 참석하면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볼 수밖에 없을 텐데 그때마다 숨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인사하는 것 정도는 쉽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작별 인사도 인사니까. 그런데 아덴미르는 나의 예의 바른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뭔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는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로 용건이 있었던 건지 잠깐 헛기침을 한 아덴미르가 입을 열었다.
생각지도 못한 감사 인사였다.
“그래. 서신에서도 전했지만, 폐하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모두 공녀 덕분이야.”
황제의 모습이 마치 산송장 같아서 줄곧 마음이 불편했는데, 상태가 호전되었다니 마음이 놓였다.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 아덴미르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너무 일방적인 은혜 갚기에 당황한 나를 둔 채 아덴미르가 뒤돌아 걸어갔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여전히 잘난 뒷모습을 유심히 보며 생각했다.
*** 펠릭스 히클마이어가 나를 세베레스 수도 저택에 초대한 날이 되었다. 가문의 마차를 이용하여 이동하면 페르디아 공작의 귀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일부러 사설 마차를 잡아타고 이동했다. 맞은편에 앉은 카를로트는 처음 타보는 사설 마차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윽고 녀석이 감탄하며 말했다.
“누님, 생각보다 철저하네. 거기까진 생각 못 했어.”
내가 네 뒷바라지라도 하라는 말이냐. 나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나를 보며 웃던 카를로트가 문득 내 무릎 위 꼬물거리는 생명체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카를로트의 지적에 심사가 뒤틀린 탐욕이 녀석을 죽일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저러다 깨물기라도 할까 봐 탐욕의 몸을 내 쪽으로 돌렸다.
“이름은 블랙이야. 원래 울음이 좀 특이해. 혼자 있으면 외로움 타니까 데리고 왔지.”
하도 봉인석에 안 들어가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소환된 상태로 데리고 왔다. 죄악 주제에 주인을 쥐락펴락하다니, 주객전도가 따로 없지. 그런데 카를로트가 멍한 표정으로 탐욕을 내려다보았다.
“걔는 하루종일 누님이랑 붙어 있잖아. 외로울까 봐 누님이 데리고 다니고, 누님 무릎 위에서 잠도 자고, 누님이 쓰다듬어 줄 거 아니야. 나도 누님이 쓰다듬어 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 카를로트는 탐욕을 질투 가득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나는 최대한 등받이 쪽으로 몸을 붙이며 카를로트를 경계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순조롭게 세베레스 수도 저택에 당도했다.
“어서 오십시오, 레이디 페르디아.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도 저택의 총괄 집사로 보이는 노신사가 정중하게 나를 맞이했다. 나는 처음 와 보는 세베레스 수도 저택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정문 안 풍경이 돌멩이를 던져 파문이 이는 호수 표면처럼 일렁이며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저택 전체에 결계가 처져 있어 밖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렇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런데 총괄 집사가 내 옆에 당당하게 서 있는 카를로트를 보며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만, 레이디. 히클마이어 백작 각하께서 방문을 허락하신 건 레이디 페르디아뿐입니다.”
물론 나만 초대하긴 했지만, 통상 호위나 하녀를 데리고 다니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보다 세베레스 가문은 보수적이었다.
그러자 불만 가득한 표정의 카를로트가 내 품에 안긴 탐욕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카를로트는 잘되었다는 듯 웃었다.
“아하. 반려동물은 된다고? 그럼 상관없겠네. 나도 누님의 반려동물이니까.”
당황한 집사를 보며 카를로트가 보란 듯 내 어깨에 제 머리를 비볐다.

67화. 친아빠를 만나다
6–8 minutes

아양 떠는 듯한 카를로트의 물음에 나는 가만히 녀석을 응시했다. 윤기 나는 결 좋은 붉은 머리칼과, 반듯한 이마 위 동글동글한 정수리를 보다가……. 깡! 카를로트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그러자 카를로트가 두 손으로 제 정수리를 감싸며 후다닥 멀어졌다. 세베레스의 집사도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떨리는 음성으로 카를로트가 물었다.
어지간히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두 손을 허리에 척 얹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헛소리하면서 상대방 곤란하게 하는 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두어 번 정도 카를로트가 자신이 나의 개라고 말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지만 그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둘만 있을 때는 무슨 헛소리를 해도 상관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나와만 있을 때 이야기였다. 개니 뭐니 하면서 다른 사람까지 당황하게 만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짐짓 엄하게 카를로트에게 명령했다.
카를로트가 고집스러운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왜 내가 화를 내는지, 어째서 자신이 맞았는지 하나도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는 조용히 카를로트의 풀네임을 불렀다.
“네가 이러면 너를 데리고 온 내 결정을 후회할 수밖에 없어.”
분명 사고 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말도 안 되는 말로 들어가겠다고 우기는 건 내 신뢰를 배반하는 일이었다. 여전히 불퉁한 얼굴을 한 채 카를로트는 세베레스의 집사에게 짤막한 단어를 내뱉었다.
나는 여전히 반항적인 카를로트를 타이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세베레스의 집사가 중재에 나섰기 때문이다.
면구한 듯 손사래를 치던 집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동행하신 분의 방문을 백작 각하께 알리고 출입 허가를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폐쇄적인 세베레스 저택의 분위기상 파격적인 대우임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같이 온 카를로트를 두고 혼자 들어갈 수도 없으니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가 정문 안으로 사라지자, 문을 지키고 있는 세베레스 가의 사병 외에 남은 건 우리밖에 없었다. 툭, 툭. 카를로트는 내게 등을 돌린 채 괜히 발에 치이는 작은 돌멩이를 차고 있었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내가 슬쩍 카를로트의 앞으로 갔지만 녀석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홱 돌렸다. 삐쭉. 댓 발 나온 입술이 카를로트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아니긴. 삐쳤구먼. 나를 힐끔 쳐다본 카를로트가 볼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야 너는 귀하디귀한 페르디아의 직계시니까. 당연히 그러시겠지. 나는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달래듯 카를로트를 타일렀다.
카를로트의 단호한 대답에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카를로트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 왔을 테니까. 가문의 이름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암흑가의 제왕 페르디아 가문. 애초에 자식들이 어떻게 자라든 관심 없는 집안인데, 진짜 자식도 아닌 내가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어차피 내 한 마디로 그렇게 자라 온 카를로트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했다. ‘암살자랑 자금 문제만 해결되면 떠날 거니까, 정은 주면 안 돼.’ 속으로 카를로트와의 거리를 두자고 다짐하기 무섭게 녀석이 꿀밤 맞은 제 머리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카를. 머리통을 갈긴 게 아니라 꿀밤 한 대 먹인 거잖아.”
“누님한테는 꿀밤이지만, 나한텐 세상이 멸망하는 듯한 충격이었다고.”
고작 꿀밤 한 대에 세상 멸망을 운운하는 카를로트의 말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심으로 상처받은 듯 시무룩해진 모습은 더 어이가 없었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카를로트는 계속 내 시선을 피했다. 귀한 도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긴 듯했다.
에휴, 삐친 애를 달래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뺨을 긁적이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그 순간 카를로트의 두 눈이 번뜩인 것 같다면, 내 착각일까. 내가 멈칫하는 사이 카를로트가 두 발짝 다가왔다.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 카를로트가 당당하게 요구했다.
“누님이 해 준다고 했잖아. 호, 해 주면 싹 나을 것 같아.”
멀대같이 크기만 해서는 아이처럼 호, 해 달라는 유치한 요구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녀석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카를로트가 엄살 부리며 또다시 입술을 삐쭉였다. 꿀밤의 공격력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는가.
‘세베레스 사병들 앞에서 나 창피 주려고 이러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카를로트는 그 정도로 영악하고 똑똑한 아이는 아니었다. 이러다 더 큰 사고를 칠까 봐 나는 얼른 녀석의 머리를 붙잡고 대충 ‘호’ 해 주었다. 그러자 카를로트의 입이 귀에 걸렸다.
카를로트는 뭐가 좋은지 금세 싱글벙글해져서는 내 옆에 꼭 달라붙었다. 중간이 없는 카를로트의 태도에 나까지도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줄곧 내 품에 안겨 있던 탐욕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나와 카를로트를 번갈아 보았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에야 세베레스 저택의 총괄 집사가 결계 밖으로 나왔다.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공자께서도 함께 들어오셔도 좋다고 하십니다.”
워낙 폐쇄적이라 카를로트의 출입을 불허할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던 터라 다행이었다. 집사의 허가 아래 우리는 정문의 결계를 그대로 통과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탐욕이 냅다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황급히 주둥이를 틀어막는 소동이 벌어졌지만, 다들 고개만 갸웃할 뿐 그냥 넘어갔다.
‘뭐 하는 거야! 그러다 죄악인 거 들키려면 어쩌려고?’
그러자 탐욕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 귀에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저 결계 통과하는 순간 몸이 억겁의 화염에 타오르는 것처럼 아팠단 말임!]
흐잉. 제법 아팠던 건지 탐욕은 칭얼거리며 내 품에 파고들었다.
정화의 권능이 죄악인 탐욕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듯했다. 다행히도 결계 안쪽은 괜찮은지 탐욕은 더 칭얼거리지는 않았다. 난생처음 들어와 본 세베레스 수도 저택의 분위기는 예상과 달랐다. 순백의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건물 자체가 대부분 흰색이었고, 곳곳에 화려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아 전체적으로는 정갈하고 반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또한 인상적인 건 저택 자체가 햇살에 잠긴 것처럼 화사하고 눈부시다는 것이었다. 다소 어둡고 묵직하며 고풍스러운 분위기인 페르디아의 저택과는 분위기가 아예 달랐다.
드러내지 않아도 풍기는 고아함이 정화의 세베레스와 잘 어울렸다. 하지만 카를로트의 감상은 내 감상과 달랐다.
카를로트 녀석, 검만 잡다 보니 예술이나 건축 쪽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네. 그러거나 말거나 세베레스 저택 곳곳을 홀린 듯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히클마이어 백작 각하께서 먼저 와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나는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이윽고 햇살이 쏟아지는 응접실 안에 앉아 있는 펠릭스 히클마이어의 옆모습이 보였다.
혹시나 실수할까 봐 마음속으로 되뇌며 안으로 들어서자 펠릭스가 고개를 돌렸다.
“어서 와요, 페르디아의 아가씨. 그리고…… 불청객?”
발끈한 카를로트가 버럭 소리 질렀다. 펠릭스가 나지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이니 그리 성내지 마세요, 페르디아의 둘째 공자.”
카를로트는 코웃음을 치며 소파에 앉았다. 내가 카를로트를 흘겨보며 주의를 주었지만 이번에도 녀석은 시선을 피했다.
단순해서 제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버릇없이 굴 건 예상을 못 했다. 난감해하는 내게 펠릭스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에 탐욕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내 품에 얼굴을 콕 박았다.
도대체 나를 부른 이유가 뭘까. 그 의중을 추측하며 앞에 있던 찻잔을 들자 카를로트가 기겁하며 말렸다.
상대방이 들으라는 듯 대놓고 말하는 카를로트의 무례에 눈가를 찌푸리며 간접적으로 경고했지만, 전혀 들어먹지를 않았다. 에휴, 별걱정을 다 하네. 나는 한숨을 내쉰 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카를로트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당연히 독이 들어 있을 리 없었다. 한숨 돌린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백작과는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 없는데, 이렇게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음, 편지에 썼던 대로 레이디 페르디아와 친분을 다지고 싶어서랍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줄곧 타지에 살았던 터라 솜니아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고.”
내 말에는 다소 뼈가 있었다. 아무리 수도 솜니아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해도 내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한 것이다. 그 누가 페르디아의 망나니라고 불리는 레이디와 친해지고 싶어 하겠냐고. 그러자 펠릭스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물론 들었습니다. 제가 들은 소문은 크게 두 가지인데, 각각 다른 사람인 줄 알았지 뭐예요?”
빙그레 웃은 그가 손가락 하나를 폈다.
“하나는 페르디아 가문의 미운 오리 새끼이자 사생아.”
그 말에 카를로트가 주먹을 꽉 쥐었다. 펠릭스가 손가락 하나를 더 폈다.
펠릭스가 웃으며 손을 내렸다.
“너무 극명한 소문들이라 더욱 궁금해지더군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나라는 사람에 대한 흥미, 단지 그뿐일까.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단순히 그런 이유로 나를 불러낸 게 아니라는. 그런 내 속내를 간파하기라도 한 듯 펠릭스가 카를로트에게 양해를 구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레이디 페르디아와 단둘이 나누고 싶은데, 페르디아 둘째 공자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카를로트가 펄쩍 뛰었지만 나는 녀석을 부드럽게 타일렀다.
“카를. 잠깐만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래? 금방 이야기하고 나갈 테니까.”
“호위를 떨어트리는 게 어디 있어? 저 자식이 무슨 짓 할 줄 알고!”
아까 한 번 나한테 혼난 전적 때문인지, 이번에는 카를로트도 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누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소리 질러. 그럼 내가 권능으로 세베레스 저택을 다 무너뜨려 버릴 테니까.”
무시무시한 협박을 남긴 카를로트는 나가기 직전까지 펠릭스를 흉흉하게 노려보며 나갔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펠릭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펠릭스가 벽의 조형물을 몇 번 매만지자 소리 없이 벽이 열렸다.
나는 남자를 경계하며 물었다.
“저도 페르디아 무서운 줄 아니까요. 특히 세베레스 저택이 무너지면 곤란하기도 하고요.”
그것도 그렇겠지. 펠릭스의 너스레에 실소를 터트린 나는 남자의 뒤를 따랐다. *** 방과 방 사이에 연결된 무수한 비밀 통로를 거친 끝에, 우리가 다다른 곳은 어느 온실이었다. 독초가 가득한 페르디아 공작 부인의 온실과는 달리, 세베레스의 온실에는 화사한 봄꽃들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펠릭스의 손짓에 어느 곳으로 다가가자 그곳에는 유리로 된 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잘생겼다는 감탄이 나오는 금발의 남자가. 죽은 듯 누워 있는 남자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가슴뿐이었다. 갑자기 나를 저택의 온실로 데리고 오더니, 도착한 곳에는 관 속에 잠든 남자가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펠릭스를 돌아보자 그가 웃음기라고는 없는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네. 세베레스 가문의 가주 리하르트 세베레스 공작입니다.”
나는 다시금 관을 내려다보았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는 세베레스의 가주이자, 원작에서 이르길 엘로디 페르디아의 친부.
친아빠와의 첫 만남이었다.

68화. 날 버린 게 아니었어
6–7 minutes

세베레스 수도 저택에 초대받았을 때부터 어쩌면 친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단번에 얼굴을 볼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친부의 얼굴은 그저 낯설기만 했다.
모르겠다.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친부라는 자각이 없어서인지. 소문으로만 접했던 세베레스 공작이 눈앞에 있다는 것도 현실감이 없었다.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일 텐데 유리 관 속에 누워 있는 모습이 기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근, 두근. 나는 평소보다 더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나를 관찰하듯 보는 펠릭스 히클마이어를 돌아보았다.
저 남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어떤 패도 드러내선 안 된다. 내 친부가 페르디아 공작이 아닌 세베레스 공작이고,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전부. 펠릭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관 속 외숙부를 응시했다.
“뭐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있어서, 가문의 비밀도 뭣도 아니지만…… 세베레스의 가주는 현재 부재중이랍니다.”
“그 사실을 외부인일 뿐인 저에게 굳이 알리신 이유가 뭔가요?”
소문으로만 퍼져 있는 것과,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 두 가지의 무게는 다르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만, 그 소문이 사실이 되는 건 아예 다른 이야기니까. 막말로 내가 이대로 저택을 빠져나간 후, 세베레스 공작이 유리 관 속에 잠들어 있다는 걸 떠벌리기라도 한다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런 내 걱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펠릭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의식이 없는 사람 앞에 일부러 레이디 페르디아를 불러온 이유가 뭐겠어요.”
나는 나름대로 추측을 시도했다.
‘역시 내가 세베레스 가주의 친딸인 걸 알고 있나? 그렇다면! 혹시! 펠릭스 이 남자가 유일한 혈육일 나를 제거해서 세베레스 가문을 먹으려고……?!’
펠릭스에게서 슬쩍 뒷걸음질 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을 때는 모르쇠가 답이다. 세베레스 공작을 내려다보던 펠릭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침잠하듯 가라앉더니, 이내 입술이 열렸다.
“부탁합니다. 레이디 페르디아. 부디 외숙부를 깨워 주세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더러 세베레스 공작을 깨우라니. 황당한 요구에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입술만 벙긋거리자 펠릭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외숙부께서는 부활한 7대 죄악 중 하나와 대적하다 혼수상태에 빠지셨어요.”
부활한 7대 죄악? 움찔, 품 안에 있던 탐욕이 그 말에 반응했다.
나는 여우의 주둥이를 틀어막으며 아무 말도 할 수 없도록 했다. 다행히 펠릭스는 그런 내 행동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세베레스 공작 각하께서 그런 사정으로 혼수상태에 빠지신 건 알겠는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음, 그때가 약 20년 전이던가…… 저도 워낙 어릴 때라 기억이 잘 나는 건 아니에요.”
“당시 가주가 혼수상태에 빠지니까 세베레스 가문은 혼란에 가득 찼거든요. 그때 이슈타르의 화신이자 예언자가 찾아와 예언했어요. 훗날 세계의 구원자가 가주를 깨울 것이라고. 그러고는 홀연히 사라졌죠.”
펠릭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내가 세베레스 공작을 깨울 유일한 존재라도 된다는 양. 갑자기 들이닥친 어마어마한 임무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닐까요. 제가 혼수상태인 사람을 깨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이슈타르의 샘에서 있었던 일조차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죄악과 접촉하는 바람에 벌어진 단순한 해프닝이겠지. 그런 나와 달리 펠릭스의 생각은 확고했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거잖아요? 물론 난 레이디가 외숙부를 깨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나도 모르게 노골적으로 구린 표정을 지어 버렸나 보다. 펠릭스가 머쓱하게 웃으며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저도 일단은 세베레스니까요. 권능을 쓸 수 있거든요.”
세베레스의 방계지만 가문의 피가 흐르니 당연히 권능이 발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교계에선 주로 직계들의 강한 권능만 회자되니 방계의 권능은 잘 몰랐다. 하물며 지금까지 외국에 있던 히클마이어 백작의 권능을 알 리가 없었다.
“영혼의 색을 볼 수 있는 권능이에요. 별로 쓸모는 없지만.”
영혼의 색? 확실히 전투 혹은 보조적으로 쓸 수 없는 능력이긴 했다. 그런데 그게 내가 세베레스 공작을 깨울 수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펠릭스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관 속의 세베레스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도 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무척 애를 써야 했다. 영혼의 색이 같다니…….
가능성 높은 가정이었다. 선조의 권능이 피를 통해 대대로 내려오는 4대 가문의 특성상 부녀 사이에 영혼이 색이 같은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세베레스 공작을 깨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왜 펠릭스 히클마이어는 확신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걸까. 그의 과한 기대가 나로선 그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잘못 판단한 제 잘못이겠죠.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차마 펠릭스의 요청을 차갑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대화도 한번 해 본 적 없는 외부인을, 영혼의 색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이곳까지 데려왔다는 건 이 남자도 외숙부를 깨우길 간절하게 바란다는 의미겠지.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품 안의 탐욕을 내려다보았다.
겉으로는 다정하게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탐욕에게 짧고 굵게 경고하며 바닥에 녀석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다시 시선을 펠릭스에게로 돌린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내 영혼의 색을 봤다는 건, 마탑에서 만났던 ‘마법사 엘비’가 나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인데.
‘그럼 그때 다시 만나자고 했던 건, 오늘의 만남을 이야기한 거였나?’
펠릭스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지만, 그는 그저 능글맞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나는 세베레스 공작이 잠든 유리관을 향해 몇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정말로 방법을 모른다는 듯 펠릭스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관 옆에 주저앉은 나는 유리 관 속의 세베레스 공작을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단정한 이마, 반듯한 이목구비, 살짝 창백하게도 보이는 안색……. 깨어 있었다면, 당신은 어떤 아빠였을까. 내 존재를 알고는 있었을까? 그랬다면 일어나지 않은 가정 속 과거에서, 나는 외롭지 않았을까……. 덧없는 생각이 흘러가는 가운데 나는 결심했다.
우선 손부터 잡아 보기로 하고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내 손끝이 세베레스 공작의 손등에 닿는 그 순간이었다.
파아앗! 시야를 가득 뒤덮는 빛과 함께 의식이 멀어졌다. *** 빛과 어둠이 깜빡이며 점멸했다. 점차 밝아지는 시야에 적응하기도 전에 음성이 들려왔다.
낯선 남자의 음성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처음 들어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지만 다정한 남자의 목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대답하는 여자의 목소리 또한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았다. 아르셀리아, 그리고 리하르트. 두 사람의 이름은, 내 친부모의 이름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눈앞에 풍경이 펼쳐졌다. 내가 있는 장소는 누군가의 침실이었다. 문득 내려다본 내 몸은 마치 유령처럼 투명했다.
그런 내 모습은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당황할 때도 세베레스 공작과 친모 아르셀리아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옅게 웃으며 뒤도는 여자의 모습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진한 금색의 머리칼, 연분홍색의 눈동자,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웃음.
정확히는, 좀 더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저 사람이 내 친모라는 걸.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는 남자의 옆모습을 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붉은 눈동자가 아로새기듯 엄마를 담았다. 세베레스 공작은 담요를 들고 가 엄마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세베레스 공작이 어렵사리 물었다.
실베스터라면, 페르디아 공작의 이름인데.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페르디아 공작의 이름에 당황했다. 이어진 그들의 대화는 그런 나를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맙소사. 페르디아 공작이, 엄마한테 처절하게 매달렸다니.
‘내 친부랑 친모와 가짜 아빠(?)가 삼각관계였다고?’
하지만 페르디아 공작은 엄마 이야기를 철저하게 불문에 부칠 정도로 싫어했는데. 뜻하지 않게 알게 된 격정의 삼각관계에 당황하길 잠시, 나는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야. 세베레스 공작을 깨워야 하는데.’
하지만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텐데 무슨 수로 깨운단 말인가. 내가 그런 고민에 빠질 새도 없이 목소리는 이어졌다.
“아르셀. 아르셀리아. 당신이 나를 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세베레스 공작의 그 말을 기점으로 장면이 뒤바뀌었다. 어느 침실이었던 공간은, 전혀 다른 장소로 바뀌었다. 기시감이 든다 했더니 나도 알고 있는 장소였다. 세베레스 공작이 잠들어 있던 유리 관이 있었던 세베레스 가의 온실이었으니까. 그런데 바뀐 장면에서는 내 친모인 아르셀리아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안타까운 듯 찡그린 얼굴을 한 채, 공작이 손끝을 움찔거렸다. 눈물을 닦아 주고 싶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왜,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요. 이건 내 의무잖아요, 리하르트.”
“당신 것이 내 것이잖아……. 그러니까, 당신의 의무도 내 것이었습니다.”
버석하게 마른 웃음이 세베레스 공작의 입가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어째서 세베레스 공작이 쓰러져 있고, 엄마가 울부짖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엄마를 지키기 위해 공작이 무언가를 희생했다는 사실.
기어코 힘겹게 들어 올린 손이 엄마의 뺨을 감쌌다.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공작이 내 존재를 알고 있었어? 내 놀라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흐릿해지는 공작의 시야처럼, 풍경과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툭, 공작의 손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지는 순간 내 의식도 까무룩 꺼졌다. 그 가운데, 자장가처럼 나긋한 음성이 이어졌다.
“조금만 기다려 줘요, 리하르트. 우리의 아이가 당신을 구할 테니까.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 유영하는 의식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 친부모는 나를……. 날.
69화. 물론이지, 나만 믿어!
6–8 minutes
그 시각, 세베레스 저택은 지반 붕괴의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얌전히 있으라는 누님의 명령을 마음속으로 수백 번 되뇌던 카를로트는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펠릭스 히클마이어와 단둘이 대화하겠다며 카를로트를 내보낸 엘로디가 벌써 몇십 분 째 감감무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안 된다는 엘로디에게 억지로 졸라 따라왔다는 자각이 존재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알 수 없는 초조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지금. 카를로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세베레스의 기사들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카를로트로서는 도저히 엘로디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후회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자신은 엘로디에게 한없이 을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카를로트도 알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엘로디가 전과 달라졌다는 걸. 페르디아의 일원이 되기 위해 부모의 눈치를 보고, 또 저를 무시하던 카를로트에게 날을 세우던 과거의 엘로디는 이제 없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묵묵히 지낼 뿐. 그에 카를로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우습게도, 누이가 어딘가로 사라질 것만 같다는 느낌. 그도 그럴 게, 아버지에게 애정을 갈구했던 과거 따위는 없다는 듯 지금의 엘로디에게는 그 어떤 미련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단 한 조각도. 묘하게 바뀐 태도와 뚜렷하게 느껴지는 거리감에 오히려 안달 나는 것은 카를로트였다.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낸 카를로트가 한 발짝 내딛자 기사들이 창을 교차로 겹쳐 앞을 막아섰다.
카를로트가 나지막이 경고했으나 세베레스의 기사는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뚝, 간신히 버티던 이성의 끈이 기어코 끊어졌다. 동시에……. 콰아아앙!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오더니 저택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정원이고, 다음번은 이 저택이야. 막으면 죽는다.”
카를로트는 당황한 기사들을 지나쳐 응접실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멋대로 밀고 들어온 것에 대해 엘로디에게 뭐라 변명할지 고민하던 카를로트는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엘로디가 없었다. 응접실 그 어디에도.
엘로디를 부르는 카를로트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쿠구궁-. 땅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카를로트의 낌새에 뒤이어 들어온 기사들이 소리쳤다.
아, 맞다.
저들의 말대로였다. 엘로디가 이 저택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 빌어먹을 세베레스 저택을 파괴하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쉽지만, 엘로디가 휘말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호위로 따라왔음에도 눈앞에서 엘로디를 놓쳤다는 사실에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카를로트는 주먹을 쥐며 ‘아아악!’ 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권능이 폭주할 것만 같아서. 응접실 테이블을 쾅, 내리친 카를로트가 소리쳤다.

*** 페르디아의 사생아. 미운 오리 새끼. 망나니. 페르디아 공작에게서 막대한 돈을 받은 후 친모가 잠적하며 버려진 아이. 모두 내 처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갓난아이였던 내가 사고란 것을 하기 시작할 때, 내가 가장 처음 입 밖으로 꺼낸 단어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유모’였다.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던 나를 보살펴 준 건 유모가 유일했으니까. 페르디아 공작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노력하고, 외면당하길 여러 차례. 나는 내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친모는 나를 버리고 떠났고, 새로운 가족들조차 나를 배척했으므로.
그동안 믿어 왔던 고집과 신념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를 지탱하던 아집이라는 둑이 허물어졌다.
몸에 힘이 빠져 가는 그 순간에도 세베레스 공작은 그렇게 말했다.
아무도 나를 그렇게 다정하게 부른 적 없었는데.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그렇게 부르는 세베레스 공작의 그 말이 진심이 아닐 리 없었다. 애증의 대상이었던 엄마도, 내 상상 속 무정한 괴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실체 없는 무언가를 원망해 왔다는 것일까. 허탈하고, 또 허무했다. 하지만 친부모가 나를 버린 게 아니라고 한들 내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나는 페르디아의 사생아로 길러졌으니까.
하지만.
세베레스 공작, 아니, 아빠가 깨어난다면 상황은 지금과 달라질 것이다. 내가 고민하는 문제가 대부분 해결되었다. 하지만 해소되지 않는 의문점이 많았다. 첫 번째, 엄마는 왜 나를 페르디아 공작의 사생아로 속이고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두 번째.
“조금만 기다려 줘요, 리하르트. 우리의 아이가 당신을 구할 테니까.”
엄마가 세베레스 공작에게 했던 그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엄마 유품이 깨지면서, 내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것도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마지막으로 세 번째, 도대체 엄마의 의무가 무엇이고, 아빠는 어떤 희생을 치른 것일까. 아직은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 말은 즉.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건 자신 있었다. . . . 천천히 눈을 뜨자 보이는 건, 과하게 가까운 펠릭스의 얼굴이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관 속의 아빠를 돌아본 나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공작의 기억을 엿본 만큼 눈을 떴을 수도 있다는 내 기대와는 달리,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죄악과 상대하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을 고작 닿는 걸로 깨울 수 없겠지. 깨우지 못했으니 마찬가지로 실망해야 마땅할 펠릭스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흥미로운 듯 내게 물었다.
“그렇게 반응하는 걸 보니, 뭔가 있긴 있었나 본데…… 뭘 봤어요?”
“당연히 중요하죠. 어쩌면 그게 외숙부를 깨울 수 있는 힌트가 될 수도 있잖아요.”
듣자 하니 애초에 내가 아빠를 깨울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듯했다.
괘씸하긴 했지만 덕분에 내 부담도 한결 나아졌다. 재차 펠릭스가 물었다.
나는 최대한 담백하고 간략하게 내가 보았던 장면을 설명했다. 펠릭스는 감탄하며 내 말을 경청했다.
“사실 도박하는 심정으로 부탁드린 건데, 기억을 봤을 줄이야. 기대 이상이에요.”
“지금 와서 세베레스 공작을 깨워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조카라는 이유만으로는 이렇게까지 깨우려 혈안인 태도를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해외에만 있던 펠릭스가 귀국한 원인이 있을 터. 의미심장하게 턱을 쓸던 펠릭스가 입을 열었다.
“음, 이것까지 말하면 가문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네요.”
하하, 내 말에 짧게 웃은 펠릭스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현재 세베레스 가문은 위태로운 상태예요. 겉으로는 소문도 차단하고, 저택의 출입도 통제하니 티가 나지 않겠지만, 안은 썩어 가고 있거든요. 가주의 오랜 부재에 가신들 권력이 강해져서 가문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어요.”
주인 없는 가문을 차지하려는 피라미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아빠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그 전에 들킨다면 세베레스의 가신들이 나를 어떻게든 제거하려 들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어찌 되었든 펠릭스와 나는 아빠를 깨워야 한다는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히클마이어 백작. 각하께서는 죄악을 상대하다가 잠드셨다고 했잖아요.”
내 물음에 멀찍이서 나비를 쫓아 뜀박질하던 탐욕이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이내 펠릭스가 짧게 답했다.
나는 눈을 찡그렸다.
아펠리테 가문은 비에탄 가문처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가문이었다. 그 말은 곧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봉인석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비에탄 가문이 보관하던 탐욕의 봉인석은 레이안의 도움으로 쉽게 구했다지만, 교만의 봉인석을 구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봉인석을 손에 넣은 후 교만을 다스려 아빠를 깨우는 걸 시도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의 바쁘디바쁜 일정에 할 일이 또 추가되었다.
펠릭스가 바닥에 앉아 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며 그를 보았다. 아직 해결하지 않은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펠릭스가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 그랬죠. 당신 권능이 영혼의 색을 보는 거라고.”
“세베레스 공작과 같은 색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 정말 저뿐이에요?”
그 대답에 추측이 확신이 되었다. 이 남자, 내가 마법사 엘비라는 걸 알고 있다. 마탑에서 마주쳤을 시점에 이미 펠릭스는 이슈타르 신전에서 내 영혼 색을 본 이후였으니까.
내 부탁에 펠릭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까요. 그편이 더 재밌기도 하고.”
그렇게 이야기가 잘 끝났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런데, 레이디가 진짜 마법사 엘비예요? 레이디 페르디아가 마법사라는 소문은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몰래 마법사로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페르디아 공작은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아, 다음 출시 마도구가 뭔지 살짝 힌트만 알려 주면 안 될까요? 우린 파트너잖아요?”
마도구 마니아 펠릭스가 질문 공세를 퍼부었기 때문에……. *** 탐욕을 품에 안고 다시 응접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 온실로 통했던 비밀 통로가 아닌, 사람들이 지나는 외부의 길을 이용했다.
들켜? 내가 펠릭스의 말뜻을 알아차린 건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정원사의 세심한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정원이 쑥대밭이었다.
아름답던 정원을 삽시간에 이렇게 뒤집어엎을 사람은 내가 알기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바로 이 녀석. 얌전히 있으라고 했더니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구나. 나는 정말로 개라도 된 양 허겁지겁 달려오는 카를로트를 보며 물었다.
카를로트가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내 시선을 피했다. 누가 봐도 자기가 한 사람처럼 말을 더듬는 카를로트를 빤히 쳐다보자, 녀석이 제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으며 외쳤다.
“시간 한참 지났는데도 누님은 안 나오지, 세베레스 놈들은 못 들어가게 하지!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그래서 들어갔더니 누님은 또 온데간데없고-.”
말을 하다 말고 카를로트가 성큼 다가와 내 어깨를 붙들었다.
카를로트는 목소리를 잔뜩 내리깔며 내 등 너머의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나는 나를 붙든 카를로트의 손을 하나하나 떼어 내며 답했다.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몰래 다녀오려고 했는데 들켰네. 미안, 카를.”
마치 들어선 안 되는 걸 들었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카를로트를 흘겨보았다. 괘씸하긴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나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카를로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우리가 세베레스 수도 저택에 방문한 것도. 그게 조건이었잖아.”
자칫 오늘의 방문이 페르디아 공작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하다.
그건 아무래도 엄마를 사이에 둔 연적이었기 때문이겠지. 끈적한 치정극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다.
내 물음에 찔리는 게 많을 카를로트가 자신 있게 외쳤다.
*** 그날 밤, 카를로트는 난데없이 페르디아 공작에게 호출당했다.
묵직한 호명에 카를로트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설마 누님에 관해 물어보는 건 아닐 테고. 그런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페르디아 공작이 물었다.
“오늘 엘로디와 함께 어디에 갔지? 오늘 행적을 보고하거라. 하나도 빠짐없이.”
카를로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70화. 서신, 에스텔 발견
5–7 minutes
페르디아 공작이 재차 호명했다. 카를로트의 머릿속에 불과 몇 시간 전 엘로디와 했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호언장담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기다렸다는 듯 이런 질문을 받다니. 혹시 아버지가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이미 알고 물었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카를로트는 딴청을 피우며 먼 곳을 보았다. 자세한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가 세베레스 공작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세베레스 공작이 잠적하기 전, 두 가주는 마주칠 때마다 사사건건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고 했다. 거의 20년이 지난 이야기건만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니 말 다 했지.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앙겔로스 공작과도 마찬가지지만 궤가 달랐다. 앙겔로스 공작은 아예 공기 취급한다면, 세베레스 공작은 존재 자체를 혐오한다고 해야 할까. 그런 아버지 앞에서 차마 누이와 함께 세베레스 수도 저택에 갔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대답을 끝으로 카를로트는 입을 꾹 닫았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아들을 빤히 바라보던 공작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질책하는 의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감한 물음이었건만, 카를로트는 괜히 얼굴이 화륵 붉어졌다. 엘로디에게 자신이 했던 언행이 고스란히 떠오른 탓이었다.
아이가 아니라며 당당하게 대답하는 카를로트였지만, 페르디아 공작의 눈에는 영락없는 애였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던 공작이 다시금 질문했다.
“다시 묻지, 카를로트. 오늘 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
“호위의 기본은 비밀 엄수니 아무리 아버지께서 보고하라 하셔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유사시에 엘로디를 호위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바로 페르디아 공작이었으니 비밀 엄수 따위가 존재할 리 없었다. 카를로트도 제 논리가 빈약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아버지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카를로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비밀을 지켜 달라는 엘로디의 부탁을 꼭 들어주고 싶었다. 자신이 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것밖에 없으니까. 가만히 턱을 괸 페르디아 공작이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난데없는 칭찬에 카를로트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았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공작이 말을 이었다.
“남서쪽에 최근 이형의 마수가 빈번히 출몰한다더군. 기사 몇을 붙여 줄 테니 출몰 경위를 조사하고 와라.”
급작스러운 임무 할당에 카를로트는 곧 임무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것은 벌이자 협박이었다. 감히 가주의 명을 거역한 죄를 치죄하라고. 평소의 카를로트라면 결코 아버지의 물음에 입을 닫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물러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카를로트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버지를 향한 그의 첫 번째 반항이었다.

*** 세베레스 수도 저택에서 돌아온 이후로 카를로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 예상보다 꽤 오래갔다. 죄책감 탓에 잘해 준 거니 일주일 정도 그러고 말겠거니 했는데.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페르디아 가문의 둘째 아들이자 직계이며 강한 권능을 가지고 있는 데다 검술에 재능이 있는 잘난 카를로트 녀석의 안위가 아니었다. 세베레스 저택에서 어쩌다 보게 된 친아빠. 죄악과 대적하다 깊은 잠에 빠진 아빠를 깨우는 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미 멸문당해 사라진 아펠리테 가문이 지키던 교만의 봉인석을 도대체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탐욕도 웬 경매장에 매물로 나온 걸 주워 왔는데 말이야…….”
작게 중얼거렸을 뿐인데 그걸 용케 들었는지 탐욕이 귀를 쫑긋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천진난만하게 기물파손을 일삼는 탐욕의 뒤통수를 보다 탁,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이로써 가문 서고에서 찾아온 책은 모두 살펴보았다. 애석하게도 마지막 책에서도 아펠리테 가문에 대해서는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았다. 분명 7대 죄악을 봉인한 영웅 가문인데, 어떤 책에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취급이 형편없었다. 심지어 어떻게 멸문되었는지조차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았으니까.
내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경로가 책이라 그쪽을 파 봤지만 이렇게까지 소득이 없을 줄이야. 다음 방법으로 떠오른 건 창공의 매 용병단에 이번에도 정보 조사를 맡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당장 실행할 순 없었다. 쓸 수 있는 돈이 없었으니까.
‘괘, 괜찮아. 조만간 첫 번째 마도구 판매 수익 들어온다고 그랬어.’
그때를 기약하며 교만에 대한 조사는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 마차는 앙겔로스 수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외출을 끝내고 마차에서 내리는 앙겔로스 공작을 맞이한 것은 그의 보좌관이었다.
도대체 무슨 용건이기에 이렇게 유난을 떤단 말인가. 앙겔로스 공작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며 보좌관에게서 서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서신을 읽어 내려갈수록 앙겔로스 공작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 갔다. 꾸깃……. 공작의 손아귀에서 서신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내용은 즉, 서마탑의 모든 마법사가 앙겔로스 상단과 거래를 끊겠다는 통보였다. 더하여 마탑과 계약했던 마석 공급 거래도 모두 종료하겠다고. 하. 앙겔로스 공작은 보좌관의 시선을 의식하며 표정을 수습했다. 아랫사람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타격은 있겠으나 괜찮을 것이다. 마탑이 서마탑만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서마탑을 제해도 3개의 마탑이 남아 있으니 타격은 있을지언정 수습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보좌관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봐도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모양새였다.
그 말에 보좌관이 머뭇거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남마탑을 제외한 나머지 두 마탑도 거래 종료를 알려왔습니다.”
다른 두 마탑까지 나서는 건 앙겔로스 공작의 계산 밖이었다. 앙겔로스 공작은 순간 눈앞이 하얘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럴 수는 없다. 그렇지 않아도 남마탑주인 게이브 제나이드가 연구비 명목으로 엄청난 금액을 뜯어 가고 있는 마당에 상단에서 들어오는 수익이 줄어든다면? 그 연구비는 도대체 어떻게 감당하지? 앙겔로스 가문 자체가 흔들릴지도 모른다. 이번만큼은 공작도 무너진 표정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타격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들과의 교류가 끊기는 것은 예상해 왔던 결과지만, 마석 공급 계약 종료는 상상해 보지도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말인가? 곧장 집무실로 돌아간 공작은 앙겔로스 상단의 수뇌부를 호출했다. 그중 가장 사색이 된 자는 다름 아닌 앙겔로스 상단의 부대표였다.
공작의 한마디에 부대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서슬 퍼런 목소리에 부대표는 다급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서마탑의 마법사 엘비라는 자와 최근에 마도구 유통 계약을 체결하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 탓에 상단의 계약 조건이 새어나간 듯합니다만…….”
웬만하면 신입 마법사들의 첫 계약은 따내는 앙겔로스기에 실패는 이례적인 경우였다.
“한데 이상하지 않은가. 고작 신입 마법사 하나 건드렸다고 세 마탑이 단합하여 거래를 끊으려 든다고?”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계약 때도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어 인상착의를 알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예. 마탑 측에 정보를 요청했으나 바로 거절당했습니다. 또 다른 마법사들에게 은근히 물어봤지만 알려 줄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고…….”
그때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보좌관이 한마디 거들었다.
“이번에 마법사 엘비의 마도구가 크게 성공했기에 개인적으로 투자를 알아본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예. 게다가 뒤이어 출시 예정인 마도구 또한 마찬가지로 투자자가 한 명뿐이라고 합니다.”
성공할지 아닐지 모르는 신입 마법사의 마도구에 줄줄이 투자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런 위험 부담이 큰 투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배포가 큰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자의 뒤를 캔다면 마법사 엘비의 정체도 알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앙겔로스 공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의 비호를 받는 정체불명의 신입 마법사의 뒤를 캐는 것보다, 개인 투자자의 뒤를 밟는 것이 훨씬 부담이 적을 터.
공작의 물음에 보좌관이 곧바로 대답했다.
*** 며칠 후, 드디어 첫 번째 투자 수익 분배금이 들어왔다. 상인 층과 백성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만큼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배당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내가 허기지지 않도록 욕심을 부리는 네 탐욕이 엄청남.]
탐욕 이 자식은 나한테 비아냥거리기 위해 존재하는 게 틀림없다.
귀여운 얼굴로 신랄한 조롱을 일삼는 탐욕을 쉴 새 없이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돈만 생기면 독립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나를 암살하려는 자가 누구인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고. 또.
‘친아빠를 깨워야 하는 계획이 갑자기 생겨 버렸으니까.’
그때까지는 페르디아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안으로 들어온 마사가 은쟁반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오늘도 한가득 서신이 쌓여 있었다.
오늘도 복사, 붙여넣기 답신 전쟁이구나. 질린 표정으로 서신을 살피던 나는 의외인 발신자를 발견했다.
다행히도 집사가 먼저 뜯어 보지 않았는지 봉인은 그대로였다. 얼른 서신을 펼쳐 본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A로 유력한 자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미래에 입양될 나의 언니, 에스텔에 대한 서신이었으니까.

71화. 나도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어
5–6 minutes
진짜 에스텔일지 아닐지 확신할 수 없지만,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찾은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명확한 계획이 없지만…….
원작에서 에스텔이 입양되는 건 약 3년 후. 하지만 원작과 많은 게 바뀐 이상 에스텔이 페르디아에 입양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음, 지금 상황으로만 봐서는 1황자와 대신 약혼할 딸을 입양할 것 같지는 않은데.’
원작과 달리 약혼 건은 완만히 마무리되었다. 내가 죽게 될 근본적인 원인이 없어진 셈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에스텔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원작을 바꾼 건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였지만, 그렇다고 한들 에스텔의 가능성을 뺏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페르디아를 떠날 사람이니까, 그 이후에 에스텔이 햇살 여주로서 사랑받든 말든 나와 관계없기도 하고.
1황자 앞에 에스텔을 데려다 놓으면 원작처럼 첫눈에 반하지 않을까? 정말 선남선녀가 따로 없겠네. 문득 열심히 도망치던 나를 기어코 쫓아와 붙잡았던 1황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를 혐오하는 줄로만 알았던 1황자가 날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황자, 엄청난 효자였어. 그래서 황제가 해독되도록 도와준 나한테 큰 고마움을 느낀 거겠지.
어쨌든 본의 아니게 황제를 해독해 준 덕분에 원작의 남자주인공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역시 착하게 살고 볼 일이다.

*** 용병단 본부, 레이안의 집무실. 레이안 앞에서만 유독 얌전해지는 탐욕 녀석을 품에 안고 레이안과 마주 보고 앉았다.
마법사 엘비 대역으로서 히클마이어 상단과 계약을 끝낸 후로 레이안을 찾지 않았다. 그 이후로 여러모로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파혼한 1황자와 친구를 먹질 않나, 펠릭스에게 세베레스 저택에 초대받고 갔더니 친부를 만나질 않나, 예기치 않게 친부모의 과거를 보질 않나. 파란만장했다. 원래대로라면 레이안과 함께 갔을 테지만, 이번에는 카를로트가 자기를 데려가지 않으면 페르디아 공작에게 이르겠다 협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함께 가지 못했다. 그런데 왜 레이안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지? 나는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애꿎은 테이블 위를 노려보는 레이안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남동생이랑 좀 놀아 주느라고. 그동안 카를이 호위해 줬거든.”
확실히 카를로트가 ‘누님, 누님’ 하며 엉겨 붙고, 또 시시때때로 찾아와 차를 마시자고 귀찮게 굴기는 했다. 불과 얼마 전 나를 ‘야’라고 부르며 재수 없게 대하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이긴 했다. 예전처럼 앙숙처럼 지내는 것보다는 낫지만, 사이가 좋아진 건 모르겠다.
지금 와서 가족 대우해 준다고 우리가 가족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애초에 피 한 방울 섞여 있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상념을 털어 낸 나는 팔짱을 끼며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레이안을 바라보았다.
농담으로 놀리듯 말했는데, 레이안이 눈매를 더 찌푸리더니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맙소사. 신기해라. 표정 변화 없고 늘 담담하기만 하던 레이안이 삐쳤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안은 여전히 내 눈을 피한 채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그건, 호위할 때 말고도 나를 만나고 싶다는 뜻일까? 혹시나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른다. 요새 하도 카를로트와 얀시가 나를 귀찮게 해서 나도 모르게 착각한 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레이안의 말은 조심스러운 내 추측에 쐐기를 박았다.
“줄곧 엘로디 님이 저를 불러 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되물었지만,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른 뜻 없이 레이안이 호위 중독이라 내가 부르길 기다린 걸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 거지? 그때 내 무릎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워 있던 탐욕이 시니컬하게 한마디했다.
한 손으로 탐욕의 머리를 꾹 누르자 녀석은 조용해졌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나는 일부러 아하하 웃으며 유쾌한 척 대답했다.
“꼭 호위 아니더라도 만날 수 있지. 우린 동료잖아.”
“자, 자. 이제 의뢰 얘기하자. 이번 의뢰 건 진짜 궁금했거든.”
말없이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레이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속으로 안도하며 레이안이 건넨 서류를 펼치자 그게 짧게 설명해 주었다.
“수하가 올린 보고서입니다. 성명, 에스텔. 인상착의는 일전에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의뢰했던 에스텔의 인상착의를 떠올렸다.
“외모는 갈색 머리칼에 벽안.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많을 거야.”
고작 그 정도 정보로 인물을 추릴 수 있다니, 용병단의 능력은 정말 뛰어나구나.
일단 해치우자는 생각으로 탐욕을 들쳐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레이안은 따라 일어나지 않았다.
“에스텔이라는 자의 발견 장소가 헤이보트 영지입니다.”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도로 소파에 앉았다. 헤이보트 영지라면 수도 솜니아에서 말을 타고 꼬박 하루를 달려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엄밀히 따져서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그 정도면 가까운 편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문제는-.
내가 외박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전에 절벽에서 떨어져서 본의 아니게 실종되었을 때, 그리고 회합일에 이슈타르 신전 결계를 뚫고 들어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페르디아 공작이 과연 외박 허락해 줄지가 문제였다. 친구도 없는 터라 마땅한 핑곗거리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 확인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조차 얼굴을 본다고 상대방이 원작의 에스텔이 맞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데, 남이 본다고 뭘 알겠는가. 내가 심각해지자 레이안이 잠깐 고민하더니 물었다.
“그건 어려워. 서류에 의뢰 대상의 거주지가 영주 성이라고 나와 있거든.”
하필 또 에스텔로 의심되는 사람이 영주 성에서 근무하는 하녀일 건 또 뭐람. 다른 영지의 영주와 괜히 얽히게 된다면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었다.
역시 어렵더라도 페르디아 공작에게 외박 허락을 받고 직접 가는 게 좋겠다. 그것만큼 확실한 게 없으니까. 그 이후에도 다른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레이안의 수하가 올린 보고서를 전부 살펴보았지만 별다를 건 없었다.
의뢰 내용도 확인했겠다 용병단까지 온 용건은 끝났다. 하지만 내게는 다른 용건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레이안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가만히 보았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일부러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자 레이안도 더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바라는 답 대신 다른 대답을 했다.
“교만은 가장 다루기 힘든 죄악입니다. 자칫 교만의 능력에 휘말리게 되면 목숨이 위험해질 겁니다.”
“영원히 시공의 틈에 갇힐 수 있다고 해도 말입니까?”
교만의 힘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능력. 가장 포악하고 강력한 죄악이라 봉인석을 가지게 되어도 통제하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나는 죄악의 봉인석을 손에 넣어야 했다.
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가족이 생겼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친아빠인 줄로만 알았던 페르디아 공작은 물질적으로만 풍요롭게 키웠을 뿐이었다. 그런 내게, 나를 위해 희생했다는 친아빠가 생겼다. 그러니까 선택지는 없어. 아빠를 구할 수밖에 없다. 내 결연한 표정을 본 레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제가 거래한 이후 다른 자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 이후는 저도 모릅니다.”
나는 절망하며 탐욕을 짤짤 흔들었다.
왜긴. 같은 죄악끼리 연대 책임이다! *** 호기롭게 외박 허락을 받아 오겠다고 말했지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가시방석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자리를 뜻하는 것일까?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 오늘은 바로 페르디아의 월례 행사인 가족 식사 날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카를로트가 웬일로 불참한 것일까. 원래도 불편한 자리이긴 했으나 오늘은 더 불편했다. 그 와중에도 맛있는 음식을 야금야금 먹으며 제발 아무도 내게 관심을 두지 않기를 바랐다. 식사 끝 무렵에 얼른 페르디아 공작에게 허락받고 조용히 별채로 돌아가는 게 내 목표였다. 하지만 그런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요히 식사하던 페르디아 공작이 나를 불렀다.
“이번 달 네게 할당된 돈이 그대로던데,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냐?”
헉.
까먹고 있었다. 워낙 할 일이 많기도 하고, 가문의 돈이 내 돈이 아니라 생각해서인지 신경도 쓰지 못했다. 나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서 얼른 대답했다.
내 딴에 훌륭하게 대답했다고 생각했지만 페르디아 공작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왜 돈을 아껴 쓰냐는 엄청난 발언에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일반인의 전생 기억이 있는 나와는 금전 감각이 아예 달라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우리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공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도대체 얼마를 할당했는데 이 애가 아껴 쓴다는 소리를 하는 거지요?”
공작 부인의 물음에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무서운 페르디아.

73화. 남은 방은 하나
5–7 minutes
당황해서 굳어 버린 나를 보며 피식 웃은 레이안이 나를 지나쳐 옆에 있던 말에 올라탔다. 애초에 동승 생각은 없었다는 듯. 멍하게 움직이는 레이안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나 또한 허탈한 미소를 터트렸다.
레이안을 도발하려다가 오히려 내가 당해 버렸다. 머쓱해진 나는 말고삐를 고쳐잡으며 레이안을 불렀다.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내 품에 답삭 매달려 있던 탐욕이 득달같이 정정했다.
“예. 용병단 인력이 모두 다른 곳에 투입되어 이번에는 저만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마수 소탕 작전이라도 벌어진 걸까? 하지만 그 정도로 큰 소탕이라면 종종 확인하는 신문에 기사로 실렸을 텐데, 본 적이 없었다. 기밀 임무는 아닌지 레이안이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의뢰자는 실베스터 페르디아 공작이며, 호위 대상은 그자의 여식인 엘로디 페르디아입니다.”
용병단 전 인력이 투입되는 대형 작전의 대상이 나였다니! 그러고 보니 가족 식사 시간에 페르디아 공작과 부인이 그런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났다.
“아이가 처음으로 친구와 놀겠다고 부탁한 거예요. 들어주는 게 어때요?”
“용병단에 일러 용병을 더 고용해 집 근처에 배치하도록 하면 되지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용병을 고용해서 우라니아 집 근처에 배치해 놓다니. 나는 침착하게 레이안에게 당부했다.
“혹시 다른 감시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안 들키게 조심히 빠져나가자.”
우리는 나란히 후드를 꾹 눌러쓴 채 우라니아의 집 뒤쪽으로 은밀히 빠져나갔다.

*** 가을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기분이 상쾌했다. 막 추워지려는 시기지만 외투만 잘 걸치면 괜찮은 그런 날씨였다.
평소에도 저택 안은 답답하다며 아우성치던 탐욕은 밖에 나와 빠르게 달리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렇게 무서워하던 레이안의 눈치도 보지 않고 환호성을 내지를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달렸을까.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바로…….
내 체력이었다. 귀족가의 여식인 만큼 교양으로 승마를 배우고, 또 곧잘 타긴 했지만, 이렇게 오래 몬 적은 없었다. 더구나 늘 별채에 박혀 있고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몸이 약하기도 했다. 예전보다 잘 먹고 많이 돌아다녀서 훨씬 건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내 착각이었다. 내가 힘들든 말든 탐욕은 말 안장 위에 팔자 좋게 걸쳐져서는 퍼질러 자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와 동행하는 레이안에게 미안한 마음에 최대한 속력을 내고 있는데, 함께 달리는 레이안의 말이 점점 속도를 줄였다.
“말도 지칠 테니 중간중간 쉬어 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말 핑계를 대긴 했지만 나 때문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천천히 말을 모는 레이안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몰래 훔쳐보다 들킨 탓인지 도둑질하다가 걸린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레이안은 전혀 개의치 않고 내게 물었다.
훅 들어오는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처음 의뢰를 넣을 때부터 의뢰 대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때까지도 레이안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질문이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사실도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늘 궁금합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숲 냄새 섞인 바람과 함께 흘러 들어왔다. 무심한 듯 굴던 레이안이, 나에 대한 모든 게 궁금하다고 말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엘로디로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물며 나조차.
“그러지 마, 레이안.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거든.”
나는 말없이 나를 응시하는 레이안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에스텔. 에스텔 이야기하고 있었지? 자세한 건 말해 줄 수 없지만, 중요한 사람이야.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 중에 대부분을 해결해 줄 수도 있고.”
혹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될 수도 있지. 뒷말은 마음속으로 삼켰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 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만약 에스텔이라는 자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사람이라면 어떡하실 겁니까?”
생뚱맞은 레이안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곧바로 대답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애초에 그렇게 판단했던 내 책임이니까.”
“책임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지. 그리고, 원점으로 돌아와서 전부 다시 시작할 거야. 안 되면 될 때까지.”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레이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대화가 끝난 건가 싶어 다시 속도를 내려 정면을 응시했을 그때, 속삭이는 듯한 레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안은 무심하게 대답한 후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 . . 출발했던 건 분명 오전이었는데, 도착한 것은 이미 별이 쏟아지는 한밤중이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헤이보트 영지 내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숙소를 잡아서 날을 보내고, 아침 일찍 영주성으로 확인하러 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 직후 출발하면 늦지 않게 솜니아에 도착할 겁니다.”
레이안의 계획에 따라 우리는 우선 숙소를 찾았다. 오는 동안 잠만 퍼질러자던 탐욕은 봉인석 행이었다.
열은 받지만 반박할 말은 없는지 탐욕은 조용해졌다. 한참을 어두컴컴한 마을을 돌아다닌 우리는 겨우 불 켜진 작은 여관 하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반긴 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야, 마침 방이 하나 남았는데, 다행입니다. 두 분 부부께서 쓰시면 되겠군요.”
방이 하나밖에 없다니. 깜짝 놀라 레이안을 올려다보자 그는 ‘부부…….’ 하며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와는 다른 부분에서 놀란 것 같은데, 여관 주인의 착각 따위야 사실 알 바 아니지 않은가. 레이안의 팔을 잡아당기자 그가 정신을 차렸는지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레이안이 뒤돌아 다시 나가려고 했지만, 여관 주인이 황급히 그를 불렀다.
“이 마을에 여관은 여기뿐입니다. 워낙 사람이 오지 않는 마을이고 가끔 마수 사냥꾼들이 오가는데, 오늘 하필 사냥꾼들이 몰려왔지 뭡니까?”
마을이 작다 싶었더니 여관이 하나일 줄이야. 다른 선택권이 없으니 이곳에 묵어야 했다. 레이안도 같은 생각인지 여관 주인에게 선금을 지급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레이안은 정말로 노숙이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그 태도에 우리가 부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여관 주인이 머쓱하게 구경했다.
나는 주인에게 방 열쇠를 건네받고는 레이안의 손을 덥석 잡고 끌고 갔다.
탐욕이 흥분하며 감탄했다. 레이안은 내 손길에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대로 끌려왔다. 하나 남았다는 소중한 방에 레이안을 밀어 넣은 나는 얼른 문을 닫았다.
도통 감정을 표현하지 않던 레이안이, 웬일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더는 노숙 소리를 하지 않는 걸 보니 내 뜻에 따르기로 한 듯했다. 페르디아 공작과 약속한 시각 내에 솜니아에 도착하려면 내일도 종일 말을 몰아야 했다. 그런 강행군을 버티기 위해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좋았다. 나는 재빨리 취침 준비를 끝내고 방에 돌아왔다.
발뺌하는 탐욕을 흘겨보다가 문득 느껴지는 위화감에 깜짝 놀라 물었다.
분명 잘 준비하러 욕실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레이안이 있었는데, 준비를 끝내고 나오니 탐욕만 덩그러니 있었다.
[모름! 그보다 내가 마사지해 주겠음! 이슈타르 님한테 자주 해 줬었음.]
말 위에서 잠만 자서 그런지 평소보다 힘이 넘치는 탐욕은 계속 나에게 침대에 엎드려 보라며 종용했다. 못 이기는 척 침대에 길게 눕자 탐욕이 수상하게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내 몸 위를 사정없이 밟고 다니는 게 아닌가. 조그마한 발로 근육 뭉친 곳을 꾹꾹 밟아 대자 시원하긴커녕 고통스러웠다.
이 여우 자식이!
탐욕과 티격태격하며 한참을 격투를 벌였다. 그런데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레이안이 오지 않았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탐욕에게 ‘쉿’ 하며 조용히 만든 후에 문가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벌컥, 문을 열자마자 문 옆에 서 있는 레이안을 발견했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레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레이안은 잠깐 돌아보고 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계속 문밖을 지키고 있을 셈이었던 듯했다. 문밖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호위에 충실한 레이안이 나만 두고 먼 곳에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방에 들어온 레이안의 등을 떠밀며 명령했다.
잠깐 버티던 레이안은 별수 없이 욕실에서 씻은 후 방으로 돌아왔다. 불을 끈 나는 어김없이 멀거니 서 있는 레이안을 질질 끌어 침대 위에 넘어뜨렸다.
그러자 레이안이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나는 아무래도 보수적으로 구는 레이안을 배려해서 최대한 떨어져서 누웠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는데, 나란히 누우니 옆이 신경 쓰였다. 슬쩍 고개를 돌린 나는 레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눈도 피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는 레이안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갑자기 높게 점프한 탐욕이 우리 둘 사이에 뛰어내리는 바람에 미묘한 분위기는 깨어졌다.

75화. 통금 시간을 어기면
5–7 minutes

착 내리깔린 음성, 묘하게 초점이 나간 눈동자. 금방이라도 무슨 짓을 벌일 것 같은 위험한 모습이었다. 순간 레이안의 분위기에 짓눌려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놈만! 지난번 카를로트와 있을 때 있었던 습격에 이은 두 번째 습격. 이번에야말로 배후가 누군지 알아내야 했다. 그래야 내가 페르디아의 성을 떼고 난 이후에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지난번 습격의 배후와 같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만 솔직히 그럴 가능성이 클 것 같진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배후를 알아내 싹을 잘라 버리자. 적의 숫자는 어림잡아 서른이 훌쩍 넘었다. 고작 나 하나 제거하러 몰려왔다기엔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원작에서 내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았고 역할도 별 볼 일 없어서 누구의 표적도 된 적이 없었는데. 어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런데 레이안의 낌새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레이안에게 맡겼다가는 배후는커녕 그냥 몰살해 버릴 것만 같았다. 이게 어떻게 생긴 기횐데, 허망하게 날릴 수는 없었다.
숨겨진 나의 힘을 사용할 수밖에. 나는 품속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레이안에게 건넸다.
그러자 레이안은 뭔지 묻지도 않고 곧바로 약병 속 액체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가끔 이런 식으로 무한한 신뢰를 보여 줄 때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다. 물론 불필요한 실랑이가 줄어서 좋기는 하지만……. 레이안이 약병에 든 것을 다 마신 것을 확인한 나는 우리를 둘러싼 암살자들을 크게 둘러보았다. 언제라도 공격할 것처럼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는 암살자들은 척 봐도 실력자들이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권력이 있어 보이는 놈을 점찍었다. 그리고-. 쨍그랑! 다른 약병을 꺼내 암살자들을 향해 내던졌다. 암살자가 약병을 쳐냈지만, 당연히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액체가 흘러나왔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깨진 약병과 가장 가까이 있던 암살자부터 괴성을 내지르며 풀썩 쓰러진 것이다. 한 사람을 시작으로 마치 도미노처럼 차근차근 암살자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첫 습격 이후로 언제나 품속에 열 개는 훌쩍 넘는 독을 품고 다니는 나였다.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한 것이었는데, 정말로 쓸 줄은 몰랐지.
물론 암살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독과 거리가 있던 쪽의 암살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곧바로 달려들었다.
어째서인지 의미심장한 눈으로 잠깐 나를 내려다본 레이안이 재빠르게 암살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탐욕마저 감탄할 정도로 레이안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탐욕과의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레이안이 전방의 적들을 상대하는 사이, 그 틈을 노린 암살자가 뒤에서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습을 눈치챈 레이안이 재빠르게 공격을 차단했다.
그런 내 인사가 무색하게도, 레이안은 정말 재빠르게 적들을 처치했다. 내가 독으로 암살자를 처치했다고 한들 그 수는 고작 서너 명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전부 레이안이 단신으로 처치한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레이안의 무력을 볼 기회가 거의 없어서 잘 몰랐지만, 괜히 용병왕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모든 상황이 끝나자 주변은 그야말로 살풍경했다. 인적 드문 숲길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암살자의 시신들. 레이안이 워낙 깔끔하게 처치해서 피가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인 부분이었다. 레이안이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독에 당한 암살자들을 바라보았다. 기껏 행동 불능 상태로 만들었는데, 이대로 제거해 버리는 건 좀 아깝다. 처리한 놈들 중에 입이 가벼운 놈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레이안이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일단 수도로 수송한 후에 조사하는 건 어떻습니까.”
마침 독에 당한 암살자가 그 정도 되니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안이 검을 칼집에 넣었다. 나는 암살자 중 하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암살자를 부른 거였는데, 레이안이 대답하는 바람에 흠칫 놀랐다. 무슨 명령이라도 들을 것 같은 맹목적인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레이안을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아니, 레이안 말고. 저 깜둥이 암살자 부른 거야.”
나는 우두머리로 보이던 암살자 앞에 가 쭈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겨 내었다. 당연히 처음 보는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평범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였다. 나는 방긋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남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눈을 깜빡이는 게 전부였다. 눈빛만으로 알 수 있는 정보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남자의 현재 상태였다. 숙련된 암살자답게 고통을 참는 게 익숙할 텐데도 감추지 못하는 동요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럴 만도 하지. 페르디아 공작 부인의 독제술만큼은 정말이지 최고였으니까. 아주 잠깐 노출된 것뿐인데 전신 마비와 통증이 동반되어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그 독성을 겪어 본 적 있는 바, 나는 암살자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약병이 깨진 장소에서 떨어져 있어서 나는 다행히 중독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그저 눈만 깜빡거리는 남자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나 해서 물어볼게. 배후가 누군지 털어놓을 거야? 승낙이면 연속으로 세 번 눈을 깜빡여.”
깜빡……. 느리게 한 번. 명백한 거절이었다.
당연히 쉽게 배후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도 아니라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곧바로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남자의 얼굴 옆에 자리 잡고 앉은 나는 눈을 관찰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라더라. 암살자들은 고문 훈련을 받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해도 입을 열지 않겠지.”
깜빡…….
“음, 그래도 몇 대 갈기면 내 화는 좀 풀리지 않을까?”
남자는 아무 동요 없었다. 역시 물리적인 폭행 따위는 고문 훈련을 받았을 암살자에게는 통하지 않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떨까?
“어디 보자, 당신 머리털이 제법 풍성하네. 매일 조금씩 뽑다 보면 대머리가 될 것 같은데…….”
움직이지도 못하는 암살자 옆에서 온갖 종류의 협박을 속살거리며 시시각각 변하는 눈빛을 관망했다. 간혹 절망하는 눈빛을 발견하면 상당히 재미있었다.
심지어 죄악마저 혀를 내두르며 내게서 슬금슬금 멀어질 정도였다.
“아, 또 내가 갖고 있는 독 중에 그런 것도 있어. 장기가 점점 썩어 들어가는데 속도가 아주 느려.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심장이 멈추려면 일 년 정도? 어때?”
얼마나 협박했을까. 슬슬 레퍼토리가 떨어질 즈음 레이안이 천천히 다가왔다.
퍼뜩 고개를 든 나는 지상에 고즈넉하게 깔린 땅거미를 보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망했다. 통금 시간! 페르디아 공작과 약속했던 귀가 시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아까 분명 레이안이 서둘러야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겠다고 했는데, 이젠 서둘러도 가망이 없었다.
에잇! 퍽! 조곤조곤 협박하던 태도를 집어치운 나는 암살자를 냅다 발로 한 대 차 버렸다. 그러자 탐욕이 경악하며 앞발로 제 입을 가리며 한마디했다.
탐욕의 말이 맞았다. 쓸데없는 언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안은 이미 출발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내가 암살자 우두머리를 협박하는 동안 주변을 수습하며 시신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치우고, 살아 있는 암살자는 손발을 포박하여 말 위에 떨어지지 않게 차곡차곡 올려 두었다. 남은 한 놈까지 군더더기 없이 말 위에 올린 레이안이 그 위로 담요를 덮었다. 그러자 영락없이 짐 더미처럼 보였다.
“솜니아에 도착하면 수하들에게 일러 이곳을 완전히 정리하라 명하겠습니다.”
대체 레이안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탐욕의 재촉에 서둘러 말에 오르려던 나는 흠칫했다. 레이안에게 같이 타겠냐며 놀렸던 때가 있었는데, 결국에는 말을 같이 타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민망함을 느끼기에는 현재 내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에 오르자 레이안이 내 뒤에 올라탔다. 그 이후는-.
질주였다.

*** 우라니아는 기분이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지긋지긋하고 재미없는 임무를 나가야 할 오늘,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려, 월급이 나온다니? 유급 휴가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사랑스럽고 천사 같은 데다가 상냥하기까지 한 엘로디 아가씨. 소문이야 어떻든 우라니아가 겪은 엘로디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지금보다 더 친해지고 싶을 만큼.
‘가짜지만 친구가 되어 달라고 말해 주신 것도 기뻤어!’
우라니아는 어릴 적부터 용병 일을 하며 사내놈들과 어울린 탓에 또래 여자친구가 거의 없었기에 엘로디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같이 맛있는 밥도 먹으러 가기도 했고.
물론 집 근처에 깔린 호위 병력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 정도는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우라니아가 집에 남아 있는 식재료들로 대충 저녁 식사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쾅쾅!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스튜를 젓던 국자를 내려놓았다.
밤이 되기 전에는 수도에 도착한다고 했으니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반긴 얼굴은 우라니아의 예상과 너무도 달랐다.
난데없이 나타난 미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새카만 흑발, 매서운 금색의 눈동자. 자식이 셋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섹시한 이 남자…….
77화. 나를 죽이려는 사람
5–7 minutes
외박도, 통금 시간 위반도. 찔리는 게 워낙 많아 뭐 하나라도 걸릴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봉인석 속에서 귀가 따갑도록 졸라 대는 탐욕 탓에 정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복도에 서 있는 누군가의 그림자를 보지 못한 것은. 서둘러 방으로 향하던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어느샌가 손이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달그림자 진 얀시의 얼굴이 보였다.
헤이보트 영지에 출발하기 전날 밤 나눴던 대화가 얀시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펠릭스 히클마이어를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에 알아서 하겠다고 대답했던 그 대화. 분명 선을 그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찾아오다니. 나에게 그런 신경을 쏟을 정도의 효용이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
편안한 음성으로 웃으며 말하던 얀시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이미 아까 페르디아 공작과 한 차례 겪었기도 했고, 대화가 길어지는 건 사절이라 황급히 말을 돌렸다.
서로의 말이 섞이지 못하고 겉돌았다.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티를 팍팍 냈지만 얀시 또한 꿈쩍하지 않았다.
거기다 눈치 없는 탐욕이 재촉하기까지 하니 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니까 이제 좀 놔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잡힌 손을 빤히 쳐다볼 때였다.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목소리로 얀시가 나를 불렀다.
언뜻 무감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저 없는 음성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이런 질문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더구나 질문한 게 언제나 제 속마음을 숨기며 가식적으로만 굴던 얀시 페르디아라는 게 나를 더 놀라게 했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멀거니 서 있자 얀시가 엄지로 내 손등을 은근히 문지르며 물었다.
웃지 않는 얀시의 얼굴은 낯설었다. 가식 없이 제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모습도.

나는 얀시 페르디아의 본모습을 알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만 드문드문 보이는 이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얀시가 날것의 모습을 보여 줄수록 나는 내 마음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경계하는 내 속마음을 알게 되면 얀시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그래서 나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오라버니.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예요. 오해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멍청한 여동생이 되어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얀시는 아무 표정 없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초조해졌다. 원작의 흑막인 얀시가 혹시 내가 거슬린다고 여기고 있을까 봐.
“그래서 왜 온 거예요? 우리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일부러 밝게 조잘대며 얀시의 손을 이끌었다. 하지만 얀시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얀시 페르디아가 고작 보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 리 없었다. 아니, 애초에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조차 거짓말인 게 분명했다.
친절하다가 아니다가, 가식적이다가 본모습을 보이다가…….
“안 될 것 없죠. 오라버니는 제 소중한 가족이잖아요.”
나는 얀시가 툭하면 입에 담는 ‘소중한 가족’ 운운을 그대로 따라 하며 환하게 웃었다. 아무런 의미 없이 무감정하게 내뱉었던 그 말조차 철석같이 믿는 멍청한 여동생을 연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내 연기가 먹힌 것인지 얀시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졌다. 이윽고 다시 다정하게 돌아온 얀시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밤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정말로 얀시는 용건이 내 얼굴을 보는 것이라는 양 손을 흔들었다. 방에 비척비척 들어가면서도 얼떨떨했다.
그런 의문과 함께 문이 닫혔고, 동시에 긴장이 탁 풀렸다. *** 끼이익, 탁. 얀시는 가만히 선 채 닫힌 엘로디의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분명 엘로디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제가 그어놓은 이 선을 넘어오지 말라는 듯.
그래. 선을 그었다. 엘로디가. 얀시로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말도 하지 못하던 갓난아이였던 엘로디가 지금까지 자랄 동안 그녀는 첫째 오라버니인 자신만큼은 잘 따랐다. 적대적인 카를로트를 멀리하고 무관심한 공작 부부를 무서워하더라도.
그뿐만이 아니었다. 엘로디는 폭주하려던 그에게 다 괜찮아질 거라며 도닥여 주고, 꺼지라고 폭언을 내뱉어도 끝까지 곁을 지켰다. 언제까지고 불안정한 자신의 옆에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래 놓고 내 손을 놓는다고…….
얀시는 또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엘로디를 떠올렸다. 자신의 눈치를 보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상냥하게 미소 지었지만 그게 연기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왜 연기를 하는 것일까. 얀시는 자신이 이곳까지 온 이유를 떠올렸다. 시작은 펠릭스 히클마이어였다. 하필 1황자 아덴미르와 파혼한 지금 그 남자와 만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잘생긴 걸 좋아하는 엘로디가 혹시라도 그 반지르르한 얼굴에 속아 그자와 약혼하겠다며 나설까 봐 약점을 더 캐기 위해 조사를 진행했다. 그러다 얀시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인 마법사의 마도구를 유일하게 후원한 후원자이자…… 엘로디의 가짜 신분. 엘로디가 다른 신분으로 뜻 모를 일들을 벌이고 다닌다는 걸. 왜 그런 짓을 벌이고 다니는지는, 차차 알아 가면 되는 일이었다. ***
“미르헤 너는 다른 놈들을 끌고 이 좌표에 시신들을 처리해라.”
미르헤는 단장의 명령에 본부에서 놀고 있던 용병단원 세 명의 뒷덜미를 붙들고 곧바로 말에 올랐다. 전속력으로 달리면서도 미르헤의 얼굴엔 권태로움이 가시지 않았다.
귀찮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귀찮았지만 단장의 명령은 들어야 했다. 단장은 그의 은인이었으니까. 진창과 오물 범벅이던 생에서 자신을 꺼내 준.
단장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는 것조차 귀찮아서 미르헤는 다시 멍하게 속력을 올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미르헤의 예민한 후각에 익숙한 냄새가 흘러들었다.
거의 속삭이는 듯 작은 미르헤의 목소리에도 동행한 단원들은 용케 알아듣고 말을 멈춰 세웠다. 그들이 멈춰 선 곳은 인적이 드문 숲길이었다.
단원 한 명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미르헤를 쳐다보았다. 미르헤는 단장이 준 지도를 확인해 보았다.
이 근처였다. 피 냄새가 진동하니 확실했다. 미르헤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말에서 내려 주변을 살피던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 거침없이 소리의 근원으로 향하던 미르헤는 홱 몸을 낮추었다.
미르헤의 주의에 단원들이 일제히 몸을 낮추며 숨을 죽였다. 우거진 수풀 너머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한 무리의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짐 마차에 무언가를 바삐 실어 담고 있었다.
무엇을 옮기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단장이 일렀던 암살자들의 시신이리라. 판단은 빨랐다. 미르헤는 양옆의 단원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정말이지 빌어먹게도 귀찮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추가 임무가 생겼다.
*** 나는 날이 밝자마자 곤히 자고 있는 탐욕을 봉인석에 잘 챙겨 넣고 레이안을 호출했다. 서신을 받자마자 레이안은 나를 데리러 저택 앞에 도착했다.
혹시나 자진했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들이 혹시나 죽어 버린다면 습격자의 배후를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한시라도 빨리 배후를 알고 싶은 마음에 나는 곧바로 용병단 본부로 향했다.
어떻게 입을 열게 만들지? 보통 방법으로는 배후를 불지 않을 텐데. 진지하게 기선제압 방법을 고민하는 내게 레이안이 말했다.
웬만하지 않으면 도대체 얼마나 혹독하게 굴 거라는 뜻이지? 기껏해야 머리카락 뽑기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 나였다. 이런 건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 듯했다.
늘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늘 그렇듯 이번에도 그냥 넘어갔다.
과거에 봐 두었던 지하실 문 위치를 떠올리며 한 발짝 떼려는 순간이었다. 레이안이 성큼성큼 다가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도, 나를 습격한 놈들인데 내가 옆에서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나로서는 당연한 책임감이었다. 나를 해치려고 한 자들이니 입을 여는 순간을 목도하는 건. 하지만 레이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저는 엘로디 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으니, 가겠다고 말씀하시면 들어드릴 겁니다.”
“하지만 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 보기 좋은 꼴이 아닙니다.”
나도 잔인한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지는 않았다. 레이안은 그런 나를 위해 같이 지하실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레이안이 추궁 끝에 배후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그때 내가 나서도 되니까.
담백한 인사를 남긴 후 레이안이 지하실로 발을 들였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레이안이 검은 장갑을 벗으며 지하실 문을 열고 올라왔다. 그의 표정은 내려갈 때와 별 차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할 때, 레이안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수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암살자들의 입을 열게 한 거지?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 궁금했다. 나를 습격한 배후가. 툭, 장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레이안이 대답했다.
뜬금없는 이름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를 죽이려는 게 앙겔로스 공작이라고?

78화. 감히 내 주인을 해치려고 한 놈들
6–7 minutes
나는 멀끔하게 생겼지만 야비한 족제비 같은 인상의 앙겔로스 공작을 떠올렸다.
제국 내에서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다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살인 사주를 할 줄은 몰랐다. 하물며 그 대상이 나라니.
레이안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짚이는 데가 있긴 했다.
“그럴 만한 인간이니까. 또 앙겔로스 공작은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거든.”
4대 가문 중에서는 그나마 크룬델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였다. 어쨌든 이건 원작에서도 나오는 내용이었다. 원작의 악녀인 도로테아가 페르디아의 양녀인 에스텔을 죽도록 괴롭힐 수 있는 원동력에는 아버지인 앙겔로스 공작의 온갖 지원이 있었다. 앙겔로스 공작은 페르디아 공작에게 깊은 열등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는 페르디아 공작이 에스텔을 아낀다는 것을 알고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에스텔을 제거하려고 했다.
지금 페르디아 공작과 내 관계가 원작의 소원하던 때와 달라졌으니, 그렇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걸리는 점이 있었다. 만약 내 가설이 맞다면 첫 번째 습격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전생의 기억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파혼 선언으로 페르디아 공작의 속을 썩이던 때였으니까. 어쨌든 앙겔로스 공작이 배후라는 암살자들의 실토는 신빙성이 있었다.
고작 귀족가의 영애일 뿐인 내가 상대하기에 앙겔로스 공작은 한 가문을 이끄는 거물이었다. 내 말뜻을 이해한 레이안이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영지전. 황제의 묵인 아래 벌어지는 영지 간의 전쟁. 승리한 가문은 상대 가문의 영지를 흡수할 수 있지만 그만큼 피해가 막심했다. 누가 이기든 애꿎은 각 가문의 병사와 영지민들이 희생될 테니까.
앙겔로스 공작이 계속 나를 노리는 이상, 독립에 지장이 생길 테니 처리하긴 해야 했다. 나도 언제까지고 페르디아의 울타리 안에 있을 수 없을 테니까. 물론 언제 습격당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불안했다. 죽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레이안이라면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의도가 무엇이든 레이안은 늘 나를 호위하는 것만큼은 최우선으로 행동했으니까. 이번 습격도 잘 막아냈으니 다음 습격도 걱정 없었다. 그래도 독은 좀 더 들고 다니는 게 좋을 듯했다. 레이안이 나설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게 생길 수도 있을 테니. 어떤 독을 챙길지 고민하던 나는 문득 레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암살자들 입을 열게 한 거야?”
내가 말로 그렇게 협박할 때는 끄떡도 하지 않던 놈이었는데. 그에 반해 레이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배후가 앙겔로스 공작이라는 걸 알아 왔다. 하지만 레이안은 호기심 가득한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멈칫. 레이안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금 단호하게 대답했다.
잔인하다기엔 피 한 방울 안 튀었는데. 하지만 레이안이 말해 줄 생각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레이안은 내가 얼마나 끈질긴지 아직 잘 모르는 듯했다.

*** 엘로디가 돌아간 후 레이안은 집무실에 틀어박혀 용병단 업무를 보았다. 서류를 보는 건 취미에 없는 일이었으나 어찌 되었든 용병단이 굴러가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었다. 사각사각. 서류 위에 유려하게 서명하던 레이안의 손이 우뚝 멈춰 버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엘로디는 아직 어렸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았을 정도로. 가끔 보이는 놀랍도록 차분한 모습에 간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레이안이 ‘어떤 시기’를 가늠하고 있을 때였다. 쿵쿵! 누군가 집무실 문을 무례하게 두들겼다.
이미 기척으로 바깥에 있는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레이안이 출입을 허락하자 문이 벌컥 열렸다.
“네가 짜증 난다고 나까지 짜증 나게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단장을 건드렸다가 좋은 꼴을 보지 않는다는 걸 아는 마크가 급격히 몸을 사렸다. 레이안은 깃펜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으음, 이번에 잡아 온 놈들 있잖습니까. 정신 차리자마자 온갖 난동을 피우는데요?”
분명 아까 충분히 알아듣도록 이야기했는데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었다. 레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크가 뒤를 졸졸 쫓아오며 물었다.
진심으로 안타까움이 우러난 말이었다. 이렇게 장난스럽게 대하고 있지만 마크에게 단장은 공포 그 자체였으니까.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레이안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암살자들은 가장 끝방에 갇혀 있었다.
레이안은 마크의 보고대로 정말로 발작하고 있는 암살자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뚝. 레이안의 등장에 암살자들의 몸부림이 바로 멈추었다. 빛이라고는 들지 않는 컴컴한 지하, 레이안의 붉은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감히 내 주인을 해치려고 한 놈들. 시린 시선에 암살자들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아까 눈앞의 남자가 보여 준 끔찍한 환상의 잔상이 다시금 전신을 덮쳤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살수들이었다. 어떤 협박이나 고문에도 발설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당연히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저벅.
흠칫, 레이안이 한 발짝 떼기만 했을 뿐인데 그들은 크게 동요했다. 몸으로 겪었던 공포가 각인되어 참을 수 없었다.
레이안이 장갑 낀 손으로 암살자 중 한 명의 재갈을 풀어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혀를 내미는 암살자의 행동에 마크가 곧바로 움직였다.
대기하고 있던 마크가 얼른 뒤로 다가가 느슨해진 재갈을 도로 물렸다. 당연히 튼튼하게 고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없이 내려다보는 레이안의 시선에 암살자는 얼어붙은 듯 굳어 버렸다.
자비라고는 한 터럭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정한 눈빛. 이곳에 갇혀 있는 암살자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아까 눈앞의 붉은 눈의 남자가 찾아왔을 때의 기억. 당연히 그 물음에 배후를 불 자는 없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잔혹한 고문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남자는 그저 그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순간 촛불에 진하게 졌던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사아아-. 투명한 물에 물감이 번지듯 온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암흑. 끝없는 심연. 소리를 질러도, 두 눈을 부릅떠도, 무엇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어둠이었다. 억겁 같은 시간이 흘렀다. 아니, 사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거지? 온갖 상념으로 미쳐 버릴 직전, 시야가 돌아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무심한 목소리가 그들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배후를 말해. 다시 그림자 속에 갇히고 싶지 않으면.”
“자아만 남은 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미쳐 버리고 싶은가 봐.”
“나는 내 주인과 달라서 자비가 없다. 네놈들에게 죽음 같은 평온한 안식은 주지 않아.”
죽음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고문이 있다니. 짧은 순간 그림자에 갇힌 것만으로 강한 위기를 느낀 누군가 절박하게 외쳤다.
한 번 실토하니 그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암살자들은 또다시 그 끔찍한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일념만으로 배후를 불었다. 하지만 레이안이 지하실을 나가고 난 이후, 온몸을 좀먹는 초조함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언제 붉은 눈의 남자가 마음이 변해서 그들을 어둠 속에 처넣을지 모른다. 다시 그곳에 갇힐 바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겠다고 생각했지만. 실패했다.
재갈이 물린 채 자비를 구걸하던 그들에게 구원과도 같은 기척이 느껴졌다.
“단장, 단자앙! 여기 계세요? 방금 미르헤 왔답니다!”
단원의 외침에 뒷짐을 지고 대기하던 마크가 레이안을 흘끔 보았다.
살수들을 한 번 본 레이안은 그대로 뒤돌아 계단을 올랐다. 지하실에서 올라온 레이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것이었다. 저들과 닿은 더러운 장갑을 계속 끼고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마크의 말을 무시한 레이안은 의자에 앉아 먼저 와 대기하고 있던 미르헤를 포함한 단원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임무를 끝내고 바로 온 건지 먼지투성이였다.
말하던 도중에 갑자기 귀찮아졌는지 미르헤가 입을 다물자 어쩔 수 없이 함께 갔던 단원이 앞으로 나섰다.
“넌 뒤로 빠져 있어, 이 숨 쉬는 것도 귀찮은 놈아. 제가 보고하겠습니다, 단장.”
레이안이 작게 고개를 까딱이자 단원의 보고가 이어졌다.
“단장이 말한 곳에 갔는데 이미 저희보다 먼저 도착한 놈들이 있었습니다.”
“예. 정황상 레이디 페르디아를 습격한 놈들과 한패겠죠. 놈들은 시신을 수습하더니 수레에 실어 장소를 옮겼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곧바로 기척을 죽이고 그들을 쫓았습니다.”
“마그누아 남작의 영지입니다. 수레를 끌고 곧바로 영주성에 들어가더군요.”
마그누아 남작. 익히 앙겔로스 공작의 가신으로 알려진 이였다. 이로써 암살자들의 토설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마크의 질문에 단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결계? 결계까지 칠 정도면 남들이 알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는 소린데.”
엘로디를 습격한 자들이었다. 그런 만큼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아 둬야 했다.
레이안의 물음에 단원이 씁쓸하게 웃었다.
“권능으로 만든 결계라 저희는 몰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권능에 대적할 수 있는 건 같은 권능 혹은 죄악이었다. 그러니 평범한 인간인 그들이 뚫고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잠자코 고민하던 마크가 결론을 내렸다.
“흐으음, 아무래도 단장이 직접 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레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그누아 영지까지 가는 건 상관없었다. 다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동안 비게 될 호위의 부재였다.

79화. 왜 또 나대지?
5–7 minutes

앙겔로스 공작은 남마탑주 게이브 제나이드의 연구 일지를 살폈다.
아무리 안하무인처럼 굴고 말도 안 되는 연구비를 요구해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인성을 뛰어넘을 정도로 유능했던 것이다. 지지부진하던 연구는 그의 딸인 도로테아가 조수로 참여하면서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앙겔로스 공작이 다음 서류를 펼치려던 그때였다. 똑똑. 정갈한 노크가 들리더니 보좌관이 들어왔다.
올빼미. 앙겔로스 공작이 비밀리에 키웠던 암살 집단이었다. 한 명의 살수를 키워 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드는데, 한 조가 전부 몰살당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터무니없는 연구비 탓에 자금난에 시달리던 앙겔로스 공작은 모노클을 벗고는 눈가를 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올빼미를 붙인 대상은 그리 대단하지도 않았다. 4대 가문의 여식이라고 하나 고작 여자애 한 명이었다. 처음 엘로디 페르디아를 제거하기 위해 습격했다가 실패한 이후에 당연하게도 호위가 삼엄해졌다. 더구나 솜니아 밖으로 벗어나지도 않아서 제거할 틈이 도무지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집요하면 기회가 오는 법. 앙겔로스 공작은 엘로디를 늘 멀찍이서 감시하고 있다가 틈이 생기면 제거하라고 올빼미 조를 붙여 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엘로디가 교외로 나가기에 추격 끝에 제거하나 싶었는데.
호위는 고작 한 명이라고 했다. 한 명의 호위가 어떻게 수십의 암살 집단을 상대한단 말인가.
“페르디아 공작의 반응은? 저번처럼 배후를 알아내려 들쑤실 것이 아니더냐.”
“저도 그것이 의아합니다만, 페르디아 공작은 아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습격을 당했는데 제 아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참으로 수상한 계집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은밀하게 교외로 나갔다는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 호위와 은밀한 일탈이라도 벌이는 건가 싶어 가볍게 넘겼는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앙겔로스 공작이 심란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보좌관이 한마디 덧붙였다.
앙겔로스 공작은 페르디아 인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었다. 습격 당시 카를로트 페르디아는 임무 파견 차 국경으로 떠났고, 얀시 페르디아는 수도 저택에 있었다. 페르디아 공작 부부 또한 수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더불어 그가 알기로 페르디아의 방계 중에서 암살 집단 한 대대를 몰살시킬 정도의 권능을 가진 자는 없었다.
페르디아의 반쪽짜리는 권능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니 제외. 그렇다면 용의선상에는 호위 하나만이 존재했다.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앙겔로스 공작이 다시금 모노클을 착용했다.
금방 제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엘로디 페르디아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 부황과 이야기를 나누고 본성 밖으로 나온 아덴미르는 불쾌한 얼굴들과 맞닥뜨렸다.
그와 같은 심정일 살바트리체 황비가 눈을 곱게 휘며 인사했다.
형식적인 대답을 하던 아덴미르는 황비 옆에 있던 2황자 벨트란을 쳐다보았다. 벨트란이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자 살바트리체 황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벨트란이 부러 당당하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아덴미르는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덴미르는 그저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살바트리체 황비는 요요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폐하께서도 이리 편찮으신데, 황자도 다시 어여쁜 약혼녀를 맞아야지요?”
“장성한 두 아들이 어엿한 가정을 이룬다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황제에게 독을 써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손을 쓴 당사자면서 염려하는 연기가 가히 수준급이었다.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이 참 보기 좋아요, 황자. 종종 들러 폐하께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주세요.”
심드렁한 얼굴로 예의상 인사를 건넨 아덴미르는 대답도 듣지 않고 훌쩍 걸음을 떼었다. 동시에 고아한 미소를 짓고 있던 살바트리체 황비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상냥함은 온데간데없고 무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황비가 벨트란을 질책했다.
“벨트란. 정신 차리렴. 어제 또 수업에 불참하였다지?”
“1황자에게 했던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너도 이제 힘이 되어 줄 상대를 맞이해야지 않겠니.”
벨트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약혼 혹은 결혼은 그가 꺼리는 대화 주제였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헌신하는 건 벨트란의 취향이 아니었다.
“결혼은 중대한 문제니까 신중하게 결정하는 게 좋-.”
한숨을 내쉰 황비가 한심하다는 듯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네 개인의 능력이 1황자보다 뛰어난 것이 뭐가 있지? 부족한 것을 알고 있다면 채우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황비는 벨트란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끊고 물었다.
벨트란은 사교계의 꽃이었다가 한순간에 사교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린 도로테아 앙겔로스를 떠올렸다. 최근 들어 다시 작은 파티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며 평판을 회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로테아는 아주 오래전부터 황비가 벨트란의 상대로 점찍었던 여식이기도 했다.
도로테아와 연락하지 않는다는 말에 살바트리체 황비는 경악했다.
“제정신이니? 4대 가문 직계 중에 네 또래 여자는 도로테아 앙겔로스 그 아이밖에 없다는 걸 몰라?”
도로테아 말고 한 명 더 있기는 했다.
“최근 흥미로운 소문을 들었습니다. 페르디아 공작이 부쩍 사생아 딸을 가까이한다고요.”
그 소문은 살바트리체 황비도 자주 들었다. 페르디아 공작뿐일까. 두 아들도 갑자기 그 아이에게 친절하게 군다는 말까지 귀에 들어왔다. 많은 이들이 입 모아 그렇게 이야기하니 터무니없는 소문이 아닐 터였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황비를 보며 벨트란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추태를 보이긴 했지만 어디 연정이 그리 쉽게 사라지던가. 여전히 엘로디 페르디아는 자신을 마음에 품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하자품을 황자비로 들이겠다는 뜻이더냐?”
계속 주눅 들어만 있던 벨트란은 비로소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황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페르디아. 진작 1황자가 엘로디와 약혼하는 바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지만 아군이 된다면 그보다 든든할 수 없었다. 재력, 명예, 권력, 그 무엇도 뒤처지지 않는 4대 가문 중 최고의 가문이 아니던가.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앙겔로스보다 좋은 패였다. 그 세력을 포섭할 수 있다면 1황자 아덴미르의 뒤통수를 치고 손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을 텐데.
벨트란은 호기롭게 대답했다. 진심으로 자신 있었으니까.

*** 갑자기 레이안이 임무 때문에 수도를 비우게 되었다. 그 탓에 하마터면 얀시를 호위로 달고 다닐 뻔했지만 수도 안이라 안전하다고 극구 설득하여 창공의 매 용병단의 에이스라고 쓰고 사고뭉치라고 읽는 세 명을 임시 호위로 두게 되었다. 특히 내 옆에 딱 붙어 있는 건 우라니아였다.
“저번에 약속도 했으니까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시간 돼?”
우리는 저녁 메뉴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스테판과 미르헤가 착실히 따라왔다.
“우라니아 부럽다. 나도 리리 님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안 그러냐, 미르헤?”
질세라 봉인석 속 탐욕도 한마디 거들었다.
제법 소란스럽게 떠들며 내가 도착한 곳은 서마탑이었다. 호위들을 마탑주 집무실 밖에 두고, 나 혼자 들어가자 이시스가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녀석들 말고. 다른 놈들 말이다. 리리 아르셀의 정체를 캐내려고 안달이더구나. 함구하라고 하긴 했지만 언젠가는 새어 나갈 텐데,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렇게 치밀하게 숨긴 건 아닌 만큼 언젠가는 들킬 수 있을 거라 예상하긴 했다. 이렇게 일찍 찾아내려고 들 줄은 몰랐지만.
안 해 줄 것처럼 굴면서 다 해 주는 것이 정말 할아버지 그 자체였다. 오늘 내가 마탑에 들른 이유는 내일 열릴 시연회 겸 연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온도조절 마도구에 이은 두 번째 마도구의 정식 출시일을 맞아 펠릭스 히클마이어가 연회를 제안한 것이다. 장소는 이곳 마탑의 중앙 홀이었다.
상인과 백성들을 상대로 마케팅을 펼쳤던 이전 마도구와 달리, 이번 마도구의 판매 상대는 귀족들이었다. 이번 마도구는 그럴 법했다. 바로 원거리 통신 마도구, 일명 통신석이라 불리는 천재적인 발명품이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이 마도구로 에스텔이랑 1황자랑 그렇게 썸을 탔었지.’
이건 된다. 이 마도구에 투자한 것도 나밖에 없으므로 성공하기만 하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었다. 최고다, 돈! 이것만 성공하면 이제 돈 걱정은 없다!
탐욕의 우렁찬 트림은 이제 없으면 섭섭할 정도였다. 돈까지 모은 후, 나를 제거하려는 앙겔로스만 처리하면 독립할 수 있었다.
캬, 완벽한 계획 아닙니까? *** 그렇게 시연회 연회 당일.
“예전부터 그랬잖아요. 체통 없이 영식들을 때리기나 하고 말이에요.”
연회에 참석하자마자 익숙한 뒷담이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말이야 그냥 흘려듣고 지나치려는데, 이름 하나가 귀에 박혔다.
“권능도 없으면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는 게 우습지 않나요, 도로테아 양?”
고개를 돌리자 또래 영애들의 중심에 서 있는 도로테아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평판을 회복한 건지 그사이에 선 도로테아가 당당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탐욕이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나 또한 진심으로 궁금했다.
80화. 차인 건 나라고
5–7 minutes

맞붙어 봤자 잃을 게 없는 내가 이길 게 분명한데 왜 계속 저러는 건지. 굳이 싸움을 걸고 싶지 않지만, 나는 걸려 온 싸움을 마다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미 도로테아는 나와 우호적으로 지낼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전생 기억을 찾기 이전에는 내 존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갑자기 저러는 저의가 뭔지 모르겠네. 어쩌면 앙겔로스 공작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데 도로테아 또한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대에게 우호적으로 대해 봤자 나만 호구 되는 거 아니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정했다.
탐욕의 응원에 힘입어 나는 도로테아 무리로 다가갔다.
그들은 정말로 내가 다가올지 몰랐는지 우왕좌왕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늘 외톨이를 자처했고 공식 행사에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었으니까. 내가 그들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도로테아의 측근 중 한 명인 폴워스 백작 영애가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요. 마침 파트너도 없고 홀로 있기 무료한데, 제게도 들려주실래요?”
“엘로디 양에게는 그리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텐데요.”
나는 그녀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장면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할 말이 없겠지. 내 뒷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대놓고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당사자가 이렇게 접근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차피 평판에 신경도 쓰지 않는 나는 누가 뭐라고 떠들든 별로 신경 안 썼으니 늘 듣고 그냥 넘어갔었기 때문이었다. 총대를 메기로 한 건지 폴워스 백작 영애가 입을 열었다.
“사실 엘로디 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저희는 늘 엘로디 양에게 관심이 많거든요. 친해지고 싶으니까요.”
“저와 친해지고 싶어 했는지는 전혀 몰랐네요. 늘 뒤에서 속삭이듯 이야기하셔서.”
덤덤한 내 말에 폴워스 백작 영애의 미소가 살짝 흔들렸다. 나를 상대로 어쭙잖은 사교계 화법을 써 봤자 소용없다는 걸 이젠 알았을까. 나는 웃으며 다시금 질문했다.
뭐라고 뒤에서 씹어 댔는지 이야기해 볼래? 이번에는 입을 꾹 닫은 폴워스 백작 영애 대신 펠레 남작 영애가 앞으로 나섰다.
“소식 들었답니다, 엘로디 양. 1황자 전하와 파혼하셨다고요?”
원하는 대답이 있는 물음이었다. 내 입으로 ‘1황자에게 파혼당했다’라고 시인하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그래도 상관없지만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진 않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들이 원하지 않는, 정석적인 대답 그대로를 내놓았다.
“1황자 전하와 오랜 이야기 끝에 결정한 일이랍니다.”
애매하게 물어서는 내 평판을 깎을 수 없다는 걸 안 것인지 펠레 남작 영애의 질문은 상당히 무례해졌다.
다소 새된 음성으로 내뱉은 영애의 질문에 나는 의뭉스럽게 대답했다.
“정확하게 대답해 주세요, 엘로디 양. 파혼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그 말이 진실인지 정말로 주변에 사람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은근슬쩍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 들릴 정도의 거리였다.
탐욕과 잠깐 담소를 나눴을 뿐인데, 내가 할 말을 잃었다고 생각한 건지 도로테아 무리는 갑자기 의기양양해졌다.
“역시 황자 전하께 파혼당하셨군요. 어쩜, 안타까워라…….”
“너무 슬퍼 말아요, 엘로디 양. 어딘가에 엘로디 양과 약혼해 줄 영식이 있을 테니까요.”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저들끼리 결론을 내리고는 동정하는 척 열심히 깎아내렸다. 어디까지 하나 싶어 아무 말 없이 북 치고 장구 치는 모습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탐욕도 신기한지 조잘조잘 질문했다.
한참을 파혼당한 나를 위로하는 척 까 대던 영애들은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시들해졌는지 대화 주제를 돌렸다.
“참, 그 기사도 읽었답니다. 엘로디 양이, 그…….”
주변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또다시 우리에게 쏠렸다. 신전에서 멋대로 기사를 낸 이후에 페르디아 공작이 수습한 듯했지만, 내가 직접 입장을 밝힌 적은 없었다. 도로테아의 따까리들이 질문을 쏟아 냈다.
“금세 기사가 내려간 걸 보니 그런 것 같네요. 어떤가요, 엘로디 양? 이렇게 된 거 당사자가 직접 말하는 게 좋을 듯한데요?”
“직계도 아니고 권능도 없는데 신전에는 어떻게 들어간 거죠?”
“부친께서 신전 출입에 도움을 줬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로 그런 건가요?”
무수한 질문에도 애매한 대답을 하자 슬슬 그녀들의 인내심이 다하는 게 보였다. 재밌다! 역시 대화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데에 ‘글쎄요’와 ‘그러게요’만 한 게 없다니까. 전생에 명절 때 친척들의 공부, 취직, 다이어트 질문에 ‘그러게요’로 일관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을 이리저리 회피한 끝에 결국 그들이 먼저 포기했다.
“엘로디 양은 어느 하나 떳떳하게 말하는 게 없네요.”
펠레 남작 영애가 분한 듯 소리치며 이르듯 뒤에 있던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바로 도로테아 앙겔로스를. 엘로디 페르디아 청문회 같은 이 소동 속에서도 고고하게 한마디도 하지 않던 도로테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엘로디 양. 그런데 이야기가 자주 들려와서 오랜만에 뵌 것 같지 않네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도로테아 양. 기사에서 자주 읽었답니다. 마치 어제 만난 것만 같아요.”
추문에 휩싸인 건 나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도로테아가 기사에 더 많이 오르내렸다. 앙겔로스 모녀에 관한 기사는 내려도 내려도 끈질기게 올라왔다. 아마도 범인은 페르디아 공작 부인일 것이다. 신문사에 그 정도로 압력을 넣을 수 있는 건 4대 가문과 황가 정도가 끝일 테니까. 제 처지로 공격당할 줄은 몰랐는지 도로테아의 표정이 언뜻 굳었다가 다시 상냥하게 돌아왔다.
“건강이 좋지 않아 조금 쉬었는데, 그게 와전된 모양이에요.”
그래. 피부 건강도 건강이지.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네요, 도로테아 양. 많이 걱정했답니다.”
한쪽 귀걸이를 응시하며 말하자 도로테아는 피하지 않고 내 시선을 마주했다.
“물론이죠. 엘로디 양의 염려 덕분에 깨끗이 나았답니다.”
결국 독을 해독해 낸 건가. 공작 부인의 독이니 쉽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공작 부인도 가볍게 골탕 먹이려는 의도였을 테니 해독했다 한들 별로 상관없었다. 그래도 다시 상냥한 척 뒤통수치려는 도로테아의 얼굴을 계속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기는 했다.
그저 제 흥미 채우기에만 급급한 탐욕에게 한마디할 바로 그때였다. 와글거리는 인파 사이로 익숙한 모습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공식 행사에는 잘 참석하지 않던 아덴미르가 마탑 내에 있었던 것이다. 순간 아덴미르와 눈이 딱 마주친 나는 저도 모르게 그 시선을 피해 버렸다. 하지만 곧바로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걸 상기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다시 아덴미르를 쳐다보았을 때,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덴미르가 긴 다리로 거침없이 나와 도로테아 따까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왜 여기로 걸어오는 거지? 왜 오는 거야?
속으로 그렇게 외쳤지만…….
기어코 아덴미르는 내 옆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황가의 파혼 스캔들의 주인공 1황자와 페르디아 공녀의 만남이라니! 눈앞에서 벌어진 생생한 가십거리에 사람들의 반짝거리는 시선이 죄다 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인사한 후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 히클마이어 백작이 주최한 만큼 마도구 시연 기념 연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구매를 희망하는 자들이 수두룩한 가운데, 아덴미르는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도 그를 알아본 주변 사람들이 흠칫하며 옆으로 비켜났다.
엘로디가 참석한다는 말에 충동적으로 그날 일정을 비웠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이제 약혼 관계가 아니니 공식 행사가 아니고서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자신에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전에 공식 행사 외에 공녀를 만난 적이 있던가?’
아니, 거의 없었다. 그러니 이건 핑계였다. 모순 속에 감정을 감추고 변명하기에 급급한 치졸한 핑계. 그러니 그냥 충동적이었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엘로디를 만날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들어온 마탑 내에서 엘로디를 찾는 건 아주 쉬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면 그 끝에 엘로디 페르디아가 있었다. 만지면 녹을 것처럼 옅은 금색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무료한 듯 멍하게 바닥에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엘로디는, 예뻤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을 정도로. 아덴미르의 감상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최근 엘로디가 파트너로 대동하던 용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째서 혼자일까. 아덴미르가 그녀에게 말을 걸기 위해 한 발짝 떼던 그때였다.
이곳에 아덴미르가 있는 것을 모르는 누군가 키득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자신을 모욕하는 말이 들릴 텐데도 엘로디는 가만히 있었다.
영식들의 머리털까지 뜯어 놓을 성질머리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러고 보면 엘로디가 다른 가문의 여식들과 대거리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아덴미르가 의아해할 무렵, 드디어 엘로디가 움직였다. 키득거리던 무리로 다가가 웃는 얼굴로 상대를 열 받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순진한 얼굴로 영애들을 가지고 노는 엘로디를 보며 아덴미르는 피식 웃었다.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능력이 수준급이었다. 아덴미르가 모르는 엘로디의 새로운 면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관전하고 있을 때, 공교롭게도 엘로디와 눈이 마주쳤다. 한데 곧바로 눈을 피해 버리는 게 아닌가. 어째서인지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래서 아덴미르는 엘로디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의 등장에 도로테아 무리가 크게 동요했다.
황급히 인사하는 그들을 향해 아덴미르가 무심하게 물었다.
퍼뜩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들을 지그시 보던 아덴미르가 진지한 음성으로 운을 떼었다.

81화. 사교계의 트러블메이커
5–6 minutes
차인 건 나라니. 저게 정말 1황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던가. 도로테아 무리도 놀라고, 엿듣던 사람들도 놀라고, 엘로디도 놀랐다.
단호하게 말한 아덴미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그녀들을 차갑게 지나쳤다. 엘로디는 아덴미르의 뒤를 따라 발코니로 향하면서도 잘생긴 은색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탐욕마저 동의할 정도면 말 다 했다.

***
두 사람이 사라진 마탑 홀에서는 한동안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만 잔잔하게 흘렀다. 누구 한 명 섣불리 침묵을 깨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상황을 구경하던 한 영식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그의 파트너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게요. 공녀가 1황자 전하를 찼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1황자와 페르디아 공녀의 파혼 소식은 그들의 존재감이 존재감이니만큼 이미 사교계를 한바탕 휩쓴 후였다. 황실의 공식 발표 이후 온갖 신문사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앞다투어 파혼 관련 기사를 쏟아 내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입을 연 적이 없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자는 없었다. 이런저런 추측만 난무했을 뿐이다. 그 와중에 ‘엘로디 페르디아가 1황자에게 파혼당한 것이다’라는 이야기만은 기정사실 취급되고 있었다. 그런 만큼 1황자가 직접 ‘내가 차였다’고 공언하고 페르디아 공녀를 데리고 떠난 것은 파급력이 엄청났다.
“뭐어, 파혼했다고 서로 얼굴 붉힐 필요야 없긴 한데…….”
“대체 엘로디 양이 파혼당했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예요?”
눈앞에서 믿고 있던 진실을 반박당한 사람들은 첫 수문의 근원지를 찾으려 나섰다.
“당신. 당신이 나한테 말했잖아. 레이디 페르디아가 파혼당했다고. 누구한테 들었어?”
“나? 나야 클럽에 있다가 들었지. 아마 네르웬이 말해 줬던 것 같은데.”
사람들은 서로 추궁해 대며 처음 소문을 퍼트린 사람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물음은 도로테아에게까지 돌아왔다.
“도로테아 양이 저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엘로디 양이 너무 불쌍하다고 하면서-.”
도로테아는 침착하게 그 말을 부정했다.
얼버무리는 대답에 그녀들은 의심하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앙겔로스의 직계인 도로테아의 눈 밖에 나고 싶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도로테아는 상냥한 미소를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남마탑주 게이브가 그녀에게 파혼 소식이 담긴 신문을 건네주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내세울 거라고는 1황자와 약혼했다는 사실뿐인 엘로디에게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졌으니까. 엘로디는 권능도 없는 페르디아의 사생아일 뿐이었다. 그래서 도로테아는 게이브가 준 정체불명의 약을 먹고 피부를 치료한 후에 수치심을 감내하며 온갖 티파티에 참석했다. 옛날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한미한 가문의 파티에도 빠짐없이. 정말이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랬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엘로디의 평판이 바닥을 기는 만큼 4대 가문의 유일한 여성 직계인 자신의 명예가 더욱 드높아질 테니까! 도로테아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그 휘광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는 파티마다 엘로디의 파혼 소식을 동정하는 듯 언급했다.
“엘로디 양이 황자 전하께 파혼당했다고 들었어요. 너무 안타깝네요…….”
도로테아의 말에 다른 레이디들이 두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파혼당했대요? 그럴 줄 알았어요. 어떤 남자가 그런 레이디를 좋아하겠어요?”
“맞아요. 엘로디 양은 볼 거라고는 외모밖에 없잖아요?”
“맞아, 맞아. 도로테아 양처럼 권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잘났다는 듯 으스대는 꼴이란.”
고작 그 한마디 했을 뿐인데 다른 소문을 덧붙여서 부풀린 후에 떠들어 댄 건 자기들이면서. 남의 불행에 그렇게 신나게 씹어 놓고서는 이제 와서는 자신을 원흉으로 몰아가는 게 어이없었다. 도로테아가 굳어진 얼굴로 입을 꾹 닫자 눈치를 보던 영애들이 슬금슬금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도로테아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혼자가 된 그녀는 멀찍이 서서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는 처지로 전락했다. 언젠가의 엘로디가 그랬듯.
“그런데 오늘 엘로디 양이 입고 온 드레스 어느 의상실에서 맞춘 걸까요?”
“그거 지난달에 나온 초고가 액세서리 세트인 것 같은데요?”
1황자 아덴미르의 개입은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고작 그의 한마디로 엘로디는 파혼당한 하자 있는 영애에서, 무려 1황자를 차 버린 엄청난 존재가 되었으니까.
‘이번에야말로 주인공은 나였어. 그런데, 또 엘로디 페르디아야?’
도로테아가 분노의 화살을 엘로디에게 돌리는 한편, 오늘 시연회 겸 연회의 주최자인 펠릭스 또한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이번 연회는 황가를 포함한 웬만한 귀족가 모두에게 초대장이 갔기 때문에 참석한 사람 또한 많았다. 그러니 오늘 일어난 일은 하루가 되지 않아 수도 솜니아에 널리 퍼질 것이다.
‘어디서나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네, 레이디 페르디아는.’
역시 사람을 알아보는 제 눈은 틀리지 않았다.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왔을 때 엘로디를 둘러싼 소문을 들었다. 엘로디 페르디아라는 사람은 그야말로 사교계의 트러블메이커였다. 하지만 펠릭스는 그냥 웃고 넘겼다. 사람을 직접 겪어 보지 않고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겪은 엘로디 페르디아는 상상 이상이었다. 솔직한 듯하지만 제 속내를 감출 줄 알고 정작 자신의 중요한 부분은 드러내지 않는다. 행보는 또 얼마나 파격적인지. 처음 본 게 이슈타르 신전에서 난데없이 떨어졌을 때고, 두 번째로 본 게 마탑 응접실에서 마법사 엘비라며 위장한 모습이다.
어느새 사라진 엘로디를 떠올리며 너털웃음을 짓던 펠릭스는 순간 도로테아와 눈이 마주쳤다.
펠릭스는 얼른 눈을 피하며 연회의 주최자로서 사람들 앞에 나섰다. 어찌 되었든 그에게는 웅성거리는 이 분위기를 잠재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
“자자, 여러분. 오늘 시연회에 이렇게 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초대장에 미리 알려 드렸다시피 이번 마도구는 한정 수량 판매로 진행됩니다.”
한정 판매! 그 말에 귀족들의 눈이 전투적으로 번뜩였다.
“꼭 사 가야 하오. 안 사 가면 마누라한테 맞아 죽소!”
금방 전까지만 해도 황자의 파혼 이야기로 신나게 떠들던 그들의 대화 주제는 금세 바뀌었다. 주제는 온도 유지 마도구를 개발했던 신인 마법사 엘비의 다음 출시작, 통신 마도구였다. 사용인들을 통한 서신이나 우편집배원, 혹은 전서구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던 기존 연락 방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통신 마도구는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아직 통신 범위가 수도 내에 그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했다.
“한정, 특별, 뭐 그런 말이면 다들 사려고 덤벼들걸요? 비싸면 비쌀수록 좋아요!”
엘로디의 조언대로였다. 의구심을 품었던 펠릭스는 제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붙였는데도 귀족들은 통신 마도구 하나 손에 넣어 보자고 눈에 불을 켰다. 가지기 쉽지 않고 거기다 비싸기까지 한 물건을 손에 넣는다는 귀족들의 허영심을 제대로 자극해 버린 것이다. 펠릭스는 어서 판매를 개시하라며 소리치는 귀족들을 보며 곤란한 듯 웃었다. 그러고는 준비했던 말을 늘어놓았다.
“수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다들 이렇게 원하니 어쩔 수 없군요. 종이를 배부해 드릴 테니 그곳에 금액을 써 주시면 가장 높은 금액을 부른 분부터 차례대로 판매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또한 엘로디가 고안한 판매 방법이었다. 귀족들끼리 눈치 싸움 붙이기! 너무 적은 금액을 쓰게 되면 마도구를 손에 넣지 못할 테니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높은 금액을 쓸 것이다. 그렇게 돈 많은 귀족 놈들의 자금을 탈탈 털어 버리겠다는 게 엘로디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심보가 고약하고 악랄한 것이 참 마음에 든단 말이야.’
페르디아의 여식만 아니었더라면 제 상단에 고용하고 싶은 유능한 인재인데, 정말 아쉽게 되었다. 펠릭스가 입맛을 다시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금액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부인. 그거 아세요? 마법사 엘비가 투자자한테만 특별한 통신 마도구를 선물했대요.”
“마법사 엘비 마도구 투자자는 단 한 명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요. 리리 아르셀이라고 하는 투자잔데,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네요.”
마법사 엘비의 유일한 투자자와 그 투자자가 선물 받은 특별한 마도구에 관한 이야기였다.
“특별한 통신 마도구는 얼마나 좋을까요? 혹시 아는 거 있어요?”
“그럴 리가요. 리리 아르셀이라는 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요.”
“제 남편이 말해 준 건데, 사실 신전 쪽 사람이래요.”
리리 아르셀에 대한 근거 없는 추측이 난무했다. 대박 날 마도구를 진작 알아보고 투자한 유일한 투자자니만큼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탑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바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상황을 관전하던 서마탑주 이시스였다. 그는 도로테아 무리가 엘로디를 씹어 댈 때부터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그때였다. 그렇게 경매가 진행되고, 작성한 종이를 제출한 한 귀부인이 구석에 있던 이시스를 발견했다. 후드를 둘러써서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조그마한 키와 드러난 앙증맞은 손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귀부인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홀로 있는 그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이시스는 멍해진 귀부인을 지나쳐 마탑 홀을 유유히 가로질렀다.
귀여운 얼굴 아래로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는 걸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2화. 이번에도 너로구나
5–7 minutes

발코니로 향하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엘로디가 따라 나온 것을 확인한 아덴미르는 제가 가진 빛 속성의 권능 중 하나인 빛의 결계를 생성했다. 혹시나 남 이야기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치들이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까 봐 미리 차단한 것이었다. 정말로 그럴 의도였는지 누군가의 그림자가 발코니 커튼 위로 아른거리다가 사라졌다. 결계에 빈틈이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아덴미르는 고개를 돌렸다가 엘로디와 눈이 마주쳤다.
목적어가 없었지만 아덴미르는 엘로디가 무엇을 묻는지 곧바로 이해했다. 왜 그가 차였다고 말했는지 그것을 묻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잖아. 공녀가 먼저 내게 파혼을 이야기했으니까 차인 거나 마찬가지지.”
“그건 차인 게 아니잖아요. 불필요한 약혼이었으니까 파혼을 요구한 것뿐인걸요.”
“에이, 그렇다고 전하가 저와 결혼할 생각이셨던 건 아니잖아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말하는 엘로디의 태도에 아덴미르가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물론 그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엘로디 페르디아와는 약혼에 그칠 뿐 결코 결혼은 할 수 없겠다고. 엘로디는 황자비, 더 나아가 황후가 될 자질이 없다고 보았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고, 태도 또한 형식적인 약혼녀로 대우했다. 그런데도 엘로디는 확신했다. 그가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걸. 생각 외로 예리한 건지, 아니면 그에 대한 기대가 없는 건지. 사랑스러운 얼굴을 빤히 응시했지만 그의 눈에 비친 엘로디 페르디아는 그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이상해.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것처럼 구는 공녀가.”
뜨끔. 지레 찔린 엘로디가 어색하게 웃었지만 아덴미르는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 신기하군.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데 말이야.”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아덴미르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내가 차인 걸로 해 둬. 그게 그대에게도 좋을 테니까.”
이미 바닥 친 평판에 1황자에게 파혼당했다는 소문 한 가지 추가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남들이 뭐라 떠들든 신경 쓰지도 않고 말이다.
어쨌든 1황자가 순전히 호의로 제 체면이 깎이는 걸 무릅쓰고 평판을 신경 써 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덴미르가 옅게 웃으며 엘로디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이상하다. 전에는 이렇게 다정하게 웃어 준 적이 없는데.’
바라지도 않은 친절을 베푸는 것도, 다정하게 웃어 주는 것도 약혼 관계일 때는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호의였다. 이제 쓸모없는 약혼 관계가 아니니 삭막하게 굴지 않겠다는 의미일까.
‘아니다. 역시 아빠 구해 줬다고 고마워서 은혜 갚은 거야!’
대단한 효자다! 대견한 마음에 엘로디가 흐뭇하게 웃자 아덴미르가 미간을 좁혔다.
“황제 폐하께서는 뿌듯하시겠어요. 첫째 아들만큼은 잘 낳았잖아요?”
대체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건지.
시시콜콜한 농담까지 주고받고 나니 시간이 꽤 흘렀다. 문득 아덴미르는 엘로디의 드레스 차림이 가볍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덧 겨울 초입의 날씨임에도 살결이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였다.
괜찮다고 하지만 엘로디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건강한 몸이 아닌데,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아덴미르는 제 겉옷을 벗어 엘로디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훅, 가까워진 거리에 엘로디의 향기가 물씬 끼쳐 왔다.
갑자기 심장이 쿵 떨어지는 감각에 아덴미르는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엘로디는 겉옷 자락을 쥐며 고개를 갸웃했다.
습관처럼 괜찮다고 말하려던 엘로디는 서둘러 감사를 표했다. 의미 없는 배려에 거듭 사양하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으니까. 어쨌든 따뜻하긴 따뜻하다. 겉옷을 여미며 고개를 든 엘로디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덴미르의 모습에 고개를 기울였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추우세요? 다시 돌려드려요?”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아덴미르는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가장 중요한 용건 하나를 잊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아덴미르의 상태가 영 시원찮았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덴미르가 눈가를 좁히며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덴미르는 입술을 달싹일 뿐 뒷말을 잇지 못했다. 당연했다.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때 곤란에 빠진 아덴미르를 구해 준 물건이 있었다. 엘로디가 고개를 갸웃하며 겉옷을 더듬거린 것이다.
그의 말대로 주머니에 손을 넣자 상자 하나가 만져졌다. 엘로디는 손바닥만 한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갑자기?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엘로디가 얼떨떨한 얼굴로 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바로…….
“그대도 마도구에 관심이 있으니 이곳까지 온 거겠지. 가져.”
통신 마도구였다.
아주 귀한 선물이었다. 귀한 선물인데…….
안타깝게도 그건 엘로디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용병단 본부의 제 방에 한가득 쌓여 있는 게 이시스가 선물해 준 마도구들이었다. 온갖 버전의 통신 마도구가 있다 못해 장거리 통신 마도구까지 소유한 엘로디에게 짧은 거리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마도구는 무용지물이었지만 그걸 밝힐 수는 없었다. 엘로디는 기쁜 듯 환하게 웃으며 아덴미르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데 이게 전에 말했던 선물이에요?”
“그냥. 공녀에게 뭐라도 보답해야 할 것 같아서. 매주 그대가 부황의 해독제를 보내오지 않나.”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엘로디가 생각하는 아덴미르는 엄청난 효자였으니까.
엘로디는 처음 마도구를 보는 것처럼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아덴미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한정 수량이라 아무리 공녀라도 구하기 어려웠을 거야.”
엘로디는 이시스를 상대하면서 다져진 아부 능력으로 열심히 아덴미르를 띄워 주었다. 괜히 민망해진 아덴미르가 말을 돌리려 무심코 물었다.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는 엘로디의 태도에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용병과 가까이 지내는 건 제삼자의 시선에서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약혼자도 뭣도 아닌 아덴미르에게는 발언할 권리가 없었다. 그런 속마음을 감추며 그가 답했다.
무슨 일인지는 엘로디도 자세히 듣지 못했다.
*** 한편, 레이안은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최대한 빨리 일을 해결하고 솜니아로 돌아가는 게 그의 목표였다.
세 놈들이란 엘로디에게 붙여 두었던 세 명의 호위를 일컬었다. 물론 개인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칠칠치 못한 놈들의 조합이라 염려를 덜 수가 없었다. 혹시 방심한 사이 엘로디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한 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졸지에 괴물 같은 레이안의 체력을 따라가야 하는 단원들만 죽어나게 생겼다.
단원들의 아우성을 무시한 채 레이안은 전속력을 강행했다. 그 결과 예상 소요 시간의 절반의 시간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기적을 이뤄 내었다. 말에서 내려 정비하는 레이안을 보며 마크가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가슴께에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며 윙크하는 모습에 레이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행. 그렇게 차갑게 노려볼 건 없잖아요, 단장.”
마크의 실없는 소리를 단호하게 무시한 레이안이 작전을 읊었다. 쓸데없는 일에 낭비할 시간 따위 없었다. 각자 단원들에게 임무를 할당한 레이안은 마그누아 남작의 영주성을 훑어보았다.
권능 혹은 죄악. 어느 쪽일까. 저 안에 엘로디를 해하려는 자가 있는 이상 어디라도 성가신 건 마찬가지였다. 인적이 드문 성벽에 선 레이안은 결계를 관찰했다. 견고한 결계 틈에 검은 그림자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챙! 날카로운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레이안과 단원들이 영주성 안에 돌입했다. 넓은 영주성을 둘러싼 결계의 극히 일부를 깼을 뿐이지만, 상대의 힘이 강하다면 알아챘을 것이다. 그들은 기척을 죽인 채 영주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어딜 가도 성내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물며 식당이나 영주의 침실, 집무실에도. 뭔가 이상함을 느낀 단원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결계로 감쌌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는데, 뭐가 있긴 있나 봅니다.”
단원들이 다시 흩어지려던 그때였다. 레이안은 스멀스멀 끼쳐 오는 누군가의 기운을 느꼈다. 마치 알아 달라는 듯 대놓고 건드리는 불쾌한 기운이었다. 우뚝. 레이안이 멈춰 서자 뒤따르던 단원들도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단장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단원들은 그 즉시 레이안의 명대로 깨진 결계 쪽으로 달려갔다. 반면 레이안은 그들이 향한 곳의 반대 방향으로 발을 떼었다. 불쾌한 기운이 자신을 부르는 쪽으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지하 방향이었다. 비밀 통로를 통해 아래로 내려가니 끔찍한 광경이 그를 맞이했다.
사방에 실험 중인 마수들이 수조 속에 담겨 있었다. 대륙 전역에 출몰한다는 이형의 마수들에 관련된 게 분명했다. 레이안은 연구실을 지나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널따란 지하실이었다. 그가 한 발짝 들어서는 순간, 불쾌한 기운이 공간 전체를 잠식했다. 화아악-!

레이안의 검은 머리칼이 거칠게 흩날렸다. 그는 눈을 찌푸리며 정면을 또렷이 응시했다. 기운을 내뿜는 무언가가 눈앞에 존재했다.
귀에 착 감기는 고혹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83화. 당신, 그러다 후회할 거예요
6–7 minutes
그 순간 레이안의 눈앞을 가득 채운 것은 일그러진 균열이었다. 쭉 찢긴 공간에 생겨난 균열은 주변을 잠식할 것처럼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순도 높은 균열의 암흑은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모아 놓은 듯 새카맣고 짙었다. 마치 무저갱처럼. 레이안은 균열 속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다.
형벌과 죽음을 다스리는 망령의 지배자, 지하의 신, 일곱 죄악의 주인.
[무도하구나. 한낱 인간 주제에 신의 이름을 입에 담다니.]
[이슈타르의 둘째 아이. 내 널 또 보게 될 줄이야.]
레이안이 이르칼라를 알아본 것처럼, 이르칼라 또한 레이안의 존재를 알았다. 신을 눈앞에 두고서도 레이안은 경외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눈앞의 균열은 신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르칼라에게 속한 일부이자 찌꺼기에 불과했다. 이르칼라와 이슈타르 두 자매 신 사이에 이루어진 속박과 맹약으로 이르칼라는 지하를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호시탐탐 인간계를 탐내는 이르칼라는 찢어진 균열을 통해 미약하나마 제 힘을 행사하곤 했다. 그런 만큼 눈앞의 이르칼라가 행할 수 있는 신의 권능은 강하지 않았다. 파편이라지만 신은 신이라, 일렁이는 균열은 자못 주변까지 삼킬 듯 살벌했다.
[흐응, 이상하네. 기껏 훔친 내 힘이 네게서 느껴지지 않는구나…….]
레이안이 대답하든 말든 이르칼라는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감히 내 힘을 훔친 도둑고양이를 찢어발겨도 시원찮지만, 뭐,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하여간 이슈타르가 만든 것들은 마음에 안 들어. 사랑스러운 내 아이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뭘 그리 멀뚱히 보고 서 있는 것이냐? 서둘러 무릎이라도 꿇어라, 이슈타르의 둘째야.]
무릎을 꿇으라는 신의 명령에도 레이안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균열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소름 돋을 정도로 고저 없는 음성으로, 이르칼라가 일갈했다. 하나 이번에도 레이안은 이르칼라의 명령을 무시했다.
“꿈 깨.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당신 뜻이 이루어지는 날은 오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깔깔깔! 귀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지하실 전체를 가득 채웠다. 깔깔깔깔! 깔깔! 깔깔깔! 지하실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이르칼라의 웃음은 반향으로 돌아와 쉴 새 없이 귓가를 때려댔다. 마치 수천 명의 이르칼라가 사방에서 웃는 것처럼. 이윽고 웃음이 뚝 그치자, 이르칼라가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어리석고 맹랑하고 무엄하구나. 예언은 인간인 네가 아닌 신인 내 몫이다. 그래, 어디 한번 네 미래를 보여 줄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텅 빈 지하실이던 눈앞의 풍경이 삽시간에 뒤바뀌었다. 화르륵! 직후 레이안이 본 것은 사방에서 타오르는 맹렬한 불길이었다. 세상은 죄악이 뿌리내린 도탄에 휩싸여 멸망하고 있었다. 대지가 메마르고, 동식물들이 말라 죽었으며, 굶주린 인간들은 서로를 찔러 죽였다. 온갖 마수가 들끓어 인간과 동물의 사체를 뜯어먹었다. 대륙 전역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문명이 쇠락하고 있었다. 바싹 마른 초목이 불타는 가운데, 그곳에 그가 있었다. 피 웅덩이 속에서 숨결이 희미해지는 레이안 자신이. 레이안은 만신창이가 된 제 모습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귓가에 이르칼라가 잔악하게 속살거렸다.
[이슈타르는 인간을 구원해 주지 않아. 아직도 모르겠니?]
레이안은 이것이 일부러 자신을 뒤흔들어 무너뜨리려는 이르칼라의 수작임을 알았다. 이르칼라는 언제나 동생 이슈타르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어 했으므로, 이번에도 어떤 목적이 있을 터. 인간계에 뻗칠 힘이 다한 건지 이윽고 눈앞의 환상이 점점 사라져 갔다. 불타는 전장은 사라지고, 도로 텅 빈 지하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르칼라가 물었다.
레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균열을 응시했다. 정말로 그는 이르칼라가 보여 준 미래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현혹하기 위한 환상임을 아니까. 설령 금방 본 환상이 정말로 제 미래라 해도 상관없었다. 모든 것이 불살라지고 무너지고 파괴된다고 해도.
“원점으로 돌아와서 전부 다시 시작할 거야. 안 되면 될 때까지.”
엘로디가 했던 말처럼, 되돌려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미 해 봤으니 또 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다. 제 도발에도 레이안이 잠잠하자, 이르칼라는 삽시간에 흥미가 식었다.
[요즈음 지상이 너무 시끄러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슈타르의 둘째야. 너 대체 무엇을 꾸미는 거지?]
[기대도 안 했다. 어쨌든 네가 내 일을 방해한 건 맞는 것 같은데. 흐응…….]
이르칼라는 특유의 비음을 내며 잠시간 침묵했다. 균열만이 일렁이는 가운데, 이르칼라가 물었다.
순간 레이안은 동요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어떤 티도 내지 않는 데 성공했다.
[아니. 너 혼자 벌인 짓이 아니야. 분명 다른 존재가 개입되어 있는데…….]
일부러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이르칼라는 추측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누굴까. 네가 그토록 숨기고 싶은 존재가. 신의 눈 밖을 벗어나는 존재라니, 흥미롭구나.]
[네가 숨기고자 하는 게 이슈타르가 숨기고 싶은 거겠지. 오랜만에 동생과 대결이라, 재미있겠는데?]
깔깔깔. 또 이르칼라가 날카롭게 웃기 시작했다. 지하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는 째질 듯한 웃음에 레이안은 결국 그림자 검을 생성했다. 아직은 존재를 들켜서는 안 된다. 이르칼라를 전면으로 상대하기에 엘로디는 아직 준비되지 못했다.
‘더 말을 섞었다간, 쓸데없는 정보만 털리고 말 테니까.’
어차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눌 생각도 없었다. 레이안은 그대로 균열을 갈랐다. 끼애애액-! 기괴한 비명이 허공을 메우더니 이내 균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르칼라가 경고했다.
[언제까지고 이 평화가 유지될 거라 생각하지 말아라, 이슈타르의 둘째 아이야.]
레이안이 무시했지만, 음성은 이어졌다.
[머지않아 이 내가 너희 인간들의 지상을 온전히 삼키게 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이르칼라의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일그러진 균열에서 지하의 마수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레이안은 그림자 검을 쥐고 그것들을 쉴 새 없이 베었다.

*** 온도 조절 마도구도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단거리 통신 마도구는 그에 비할 수도 없는 완벽한 히트를 기록했다.
“역시 돈 많은 놈들 주머니 터는 게 제일 최고라니까.”
원작에서도 마법사 엘비가 두각을 드러낸 것이 이즈음이었다. 어차피 성공할 마도구의 투자를 독점했다니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통신 마도구는 벌써 5년 치 주문이 꽉 찼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황실에서도 엄청난 물량을 선주문했다. 심지어 벌써 입소문이 났는지 외국에서도 수입 요청이 쇄도할 정도였다. 재료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생산력이 달린다는 게 문제일까. 하지만 선금을 두둑이 받았으니 상관없었다.
장부에 적힌 앞으로 들어올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보며 음흉하게 미소 짓자, 탐욕이 시원하게 트림을 갈겼다.
내 물욕이 과하긴 했는지 탐욕이 기겁하며 내 앞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갸웃. 곰곰이 생각하던 탐욕이 그건 생각 못 했다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함을 눈치챈 탐욕이 호들갑을 떨며 나를 째려보았다. 에이, 아깝다. 잘하면 속일 수도 있었는데. 탐욕을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나는 침실 테이블에 상자를 한가득 올려놓았다. 이시스에게서 받은 통신 마도구들이었다. 너무 많이 받은 나머지 임시 호위 3인방에게 선물하고 나서도 한가득 남았다.
몇 번이나 확인해 봤지만 주문자 명단에 페르디아의 성은 없었다. 준비된 물량이 나갈 때까지도. 이시스와 페르디아 공작 사이가 좋지 않아 아예 주문조차 넣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 뿐이었다.
페르디아에 불가능이란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마도구를 가족들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일종의 뇌물이었다. 나는 마사에게 줄 것까지 총 다섯 개의 마도구를 포장했다. 카를로트는 임무를 나갔다고 했으니 녀석에게 줄 마도구는 서랍에 넣어두었다. 포장하는 동안 책상 위에서 꼬리를 살랑이며 구경하던 탐욕이 물었다.
“요새 내가 마탑에 자주 갔잖아. 자연스럽게 관심 생겨서 샀다고 하면 의심받을 일도 없어.”
웬일로 친근하게 아부하는 탐욕을 억지로 봉인석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 공작 부인의 온실에 도착했더니, 그곳에는 페르디아 공작도 함께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두 사람을 향해 미소 지었다.
부인이 찻잔을 들며 우아하게 나를 맞이했다.
나는 미련 없이 떠나려는 페르디아 공작의 팔을 황급히 붙들었다.
그 말에 어째서인지 공작 부인의 표정이 확 굳었다.
내가 뭔가 못마땅한 짓을 했나 싶어 눈치를 보다 챙겨 온 상자 두 개를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페르디아 공작이 상자를 들어 올리며 내게 물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 사람이 상자를 열어보길 기다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상자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머뭇거리던 나는 기다리다 못해 결국 먼저 묻고 말았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는 이시스가 준 마도구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공작 부인은 첫눈에 알아보았다. 나는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에 신인 마법사가 출시한 통신 마도구예요. 그게 있으면 서신 없이도 연락할 수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페르디아 공작은 말없이 마도구를 들어 찬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부인이 나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요새 마탑에 자주 간다고 했더니 이걸 사려고 그런 거였니? 고맙구나, 엘로디.”
“아버지께서 주신 용돈으로 산걸요. 가족끼리 언제든 연락하면 좋으니까요.”
물론 그 가족에 내가 포함되지는 않았다. 페르디아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진작 버린 지 오래기도 했고. 페르디아 공작이 입을 연 건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 말이 끝이었지만 그래도 충분했다.
애초에 공작이 감동 같은 걸 받을 거라고 기대한 적도 없었다. *** 엘로디가 온실을 떠난 후, 테미스는 힐난하듯 남편을 쳐다보았다.
“이미 차명으로 주문해 두었잖아요. 그것도 판매 물량 50퍼센트를.”
각 가문에 카탈로그가 돌기 전부터 정보를 입수한 페르디아는 이미 통신 마도구의 물량을 확보한 후였다. 하지만 엘로디는 그 사실을 몰랐다. 실베스터는 감히 만지기도 아깝다는 듯 마도구를 상자에 다시 넣으며 답했다.
엘로디를 위한 일이지만, 그게 정말로 아이를 위하는 게 맞을까. 테미스는 엘로디가 조심스럽게 건네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마도구를 손에 쥐었다.

84화. 네 이놈, 잘 걸렸다
6–7 minutes
후회하는 시점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관계라는 것은 모래성과 같아서 공들여 쌓아 올려도 단 한 번의 밀물에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 관계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언제나 너를 위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아까 엘로디가 할 말이 있다며 운을 떼었을 때, 테미스는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과거, 엘로디가 했던 고백. 테미스는 그때 엘로디가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떤 기대도 바람도 없는 공허한 눈이었다. 분명 이 아이도 애정을 갈구했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눈을 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마모되고 갉히다가 어느 순간 풍화될 표면조차 남지 않게 된 때가. 이 아이가 무엇도 바라지 않게 된 그때가. 독립하겠다는 결심을 덤덤하게 말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던 건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엘로디를 그렇게 만든 건, 테미스 자신이었다.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해 왔으니까.’
설령 아이의 존재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들, 그래서는 안 됐다. 사실은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베스터는…….
이번에도 테미스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길 뿐이었다. 멀지 않은 언젠가 엘로디가 독립을 입에 담는다면, 이 남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테미스는 그가 과거의 선택을 자책하며 뼈저리게 후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정 표현이 익숙지 않다는 이유로 관계 진전에 노력하지 않는 이 남자가 처절히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그게 바로 엘로디가 독립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독립하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마음이 드는 이유였다. 테미스는 최근 심상치 않은 엘로디의 행보를 떠올렸다. 난데없이 권능이 개화했다고 하며 제게 거래를 시도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무슨 독이든 해독제를 만들어 오기에 거래를 승낙했지만, 음독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당장 그만두게 했다.
혹시 저 몰래 권능을 쓸까 봐 테미스는 엘로디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 피곤해 보일 뿐 특이 사항은 없었다. 그것과 별개로 엘로디 페르디아는 최근 사교계의 가장 흥미로운 주제 거리였다. 1황자와 파혼. 그런데 1황자가 무려 자신이 파혼당한 거라며 발언했다고. 마탑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테미스도 기사로만 해당 사건을 접한 상황이었다.
“요즘 엘로디에게 초대장이 쉴 새 없이 들어온다더군요. 아시죠?”
고작 한마디에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뒷공작은 또 확실하게 하고 있구나.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남자였다. 하지만 백날 말해 봐야 태도를 고치지 않을 테니 입만 아팠다. 테미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다른 주제를 꺼냈다.
“아직. 한창 혈기 왕성할 때니 거기서 스트레스나 풀라고 해.”
카를로트의 처우에 대해서는 테미스도 이견이 없었다. 광범위 공격 권능을 가지고 있으니 차라리 마수를 상대하며 능력을 써 대는 게 좋을 것이다.
참을성도 좀 기르고. 하지만 테미스의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 남은 선물 상자 하나를 들고 내가 도착한 곳은 본 저택의 얀시 침실 앞이었다. 금방 전해 주고 돌아갈 요량으로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몇 초나 지났을까, 문이 벌컥 열렸다.
나를 보며 얀시가 잠깐 놀란 얼굴을 했다. 정말로 내가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다는 듯. 급하게 문을 연 건지 얀시는 강박적으로 단정한 평소와 달리 다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삐쭉삐쭉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이라든지, 세 개 정도 풀어헤친 셔츠 단추라든지.
선물만 전해 주고 금방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초대를 거절했다 얀시의 심기를 어지럽힐 수 있으니 일단 승낙했다.
사실 얀시뿐만 아니라 카를로트 침실에도 들어가 본 적 없었다. 딱히 서로 교류도 없었으니 찾아갈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런 만큼 이렇게 흔쾌히 들어오라고 할 줄은 몰랐다. 처음 들어온 얀시의 침실은 얀시를 그대로 들어다 옮긴 것처럼 황량했다. 딱 있어야 할 가구만 있는 침실에는 흔한 장식품 하나도 없었다.
시커먼 방에 덩그러니 놓인 분홍 쿠션이라, 재밌겠다. 인테리어 파괴 욕구가 절로 드는 방에 감탄하며 잠깐 둘러보다 소파에 앉았다. 책상 쪽으로 간 얀시는 뭔가를 작성하고 있었는지 종이 뭉치를 손으로 가차 없이 구겼다. 그 직후, 종이가 바스스 사라졌다.
기겁하는 탐욕과 달리 나는 그 광경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엄청난 재능……! 이 세계에 있을 인재가 아니었다. 얀시만 있다면 지구 환경 오염이 한결 덜해질 텐데. 지구온난화 해소를 위해 이바지해야 하는 사람이 이곳에 있다니 안타까웠다.
얀시가 플라스틱 쓰레기를 소멸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내 앞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쭉 빼며 어색하게 웃었다.
다행히 얀시는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유를 묻는 듯한 그의 시선에 나는 머뭇거리다 입술을 떼었다.
“제가 그 권능을 가지고 있으면…… 무서울 것 같아요. 자칫 실수로 원하지 않는 걸 소멸시켜 버릴 수도 있으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얀시의 시선에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내 실수다. 얀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남의 입을 빌려 듣는 건 또 다를 텐데.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 오라버니 권능을 무시하는 건 아니고-.”
검지로 내 뺨을 쿡 찌른 얀시가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얼른 무릎 위에 얹어 두고 있던 상자를 얀시 앞에 쭉 밀었다. 손끝으로 상자 표면을 쓸던 얀시가 잠시 후 뚜껑을 열었다. 얀시가 방긋 웃으며 마도구를 이리저리 살폈다.
“아아, 이게 ‘리리 아르셀’이라는 미상의 투자자가 투자했다는 그 마도구구나?”
“요새 마법에 관심 있어서 마탑에 자주 갔다가 운 좋게 구했어요.”
나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핑계를 적절하게 대었다. 그런데…….
뭐지? 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반응은. 어째선지 의미심장한 물음에 내가 두 눈을 깜빡이며 얀시를 쳐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가 나를 마주 보며 웃었다.
“마침 갖고 싶었는데 고마워. 잘 쓰도록 할게, 리리.”
“그보다는 우리 리리가 선물해 줬다는 게 더 의미가 크지.”
늘 있는 가족 타령인가? 내가 그저 머쓱하게 웃을 그때였다. 마도구를 유심히 쳐다보던 얀시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매일 연락이요?
우리가 매일매일 연락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방긋 웃는 얀시의 표정이 괜히 무서워서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강한 압수 충동이 들었다. 나한테 연락한다고 할 줄은 몰랐단 말이야. 어찌 되었든 그 문제만 제외한다면 오늘의 선물 작전, 환심 사기에는 성공한 것 같다. 완만한 독립까지 한 발짝 다가갔다는 생각에 절로 뿌듯해졌다. *** 간만에 나에게 할당된 용돈을 탕진하기 위해 쇼핑 나온 나는 우선 호위 3인방을 데리고 식당을 한 차례 털고 나왔다. 우라니아는 흡족하게 웃으며 한껏 부른 배를 두드렸다.
그러자 봉인석에 있는 탐욕이 말을 거들었다.
[배 터져도 안 죽음……. 나도 알고 싶지 않았음…….]
‘네가 말해 봤자 어차피 우라니아에게는 들리지도 않는단다.’
기분 좋게 웃던 우라니아가 갑자기 눈을 흘겨 나머지 두 호위인 스테판과 미르헤를 노려보았다.
“저 두 놈들은 저한테 감사해야 해요. 원래 리리 님이랑 단둘이 데이트 약속이었는데 끼워 준 거니까요.”
우라니아가 뺨을 감싸며 수줍게 말하자 옆에 있던 스테판이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우라니아가 주먹을 든 채로 스테판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스테판이 미르헤 뒤로 쏙 숨었다.
나는 그런 세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저렇게 격 없이 대할 수 있다는 존재가 있다는 게 부럽기도 했다. 그렇게 왁자지껄하게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웅성웅성.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마찬가지로 쇼핑을 나온 듯한 귀족가의 레이디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를 흘깃거리는 게 느껴졌다. 키가 큰 우라니아가 제 몸으로 나를 가려 그들의 시선을 차단했다.
“사실 저도 기사 봤어요. 리리 님이 1황자 전하를 뻐엉! 찼다면서요?”
아덴미르의 돌발 행동 때문에 내가 1황자를 찼다는 소문은 아예 사실이 되어 버렸다. 아덴미르가 인정한 일을 내가 부정하는 것도 모양이 이상해서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집에 돌아가기에는 환한 날씨였다. 스테판의 물음에 나는 잠깐 고민하다 목적지를 결정했다.
처음 탐욕의 힘을 쓴 이후로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그 이후로 능력을 쓰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작 일주일에 한 번 3초 쓸 수 있는 능력, 시간 가는 게 아깝기도 해서 간 김에 한 번 또 써 볼 생각이었다.
한껏 으스대는 탐욕의 목소리를 들으며 경매장으로 향할 그때였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다니, 역시 우린 운명인가 본데. 그렇지 않나, 공녀?”
얼굴값 못하는 한심한 인간, 2황자 벨트란이 난데없이 나타나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방금까지 좋았던 기분이 벨트란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빠졌다.
벨트란은 잘되었다는 듯 씩 웃었다.
나는 상대가 2황자건 뭐건 따지고 들려는 우라니아를 제지했다. 아무리 나라도 벨트란이 황족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며 우라니아에게 해코지한다면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 내 행동에 자신감이라도 얻은 걸까. 벨트란이 호탕하게 웃었다.
“오, 쇼핑 좋지. 어떤가, 나도 동행하는 게. 이렇게 된 거 공녀의 아름다운 눈 색을 닮은 장신구를 선물해 주고 싶은데.”
갑자기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환하게 웃으며 벨트란을 올려다보자 그가 흠칫 몸을 떨었다.
네까짓 게 그럴 수 있겠냐는 의미로 쳐다보자 자존심이 상한 건지 벨트란이 제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했다.
“나를 뭘로 보는 건가, 공녀. 말만 해. 무엇이든 선물해 주지!”
그렇단 말이지?
오늘 하루 네 놈의 지갑을 탈탈 털어 주마!

86화. 꿈도 꾸지 마세요
6–7 minutes
마탑으로부터 엄청난 금액이 들어왔다. 내 바람대로 죽을 때까지 놀고먹어도 되는 멋진 백수가 된 것이다. 이번에 2황자 벨트란한테 털어 낸 장신구, 드레스, 무기들도 전부 팔아 돈으로 바꿔 버렸다. 고맙다, 호구야.
금전적 문제는 완벽히 해결되었다. 신변의 문제만 아니면 당장 독립해도 상관없는 상태가 되었다. 내친김에 나는 용병단 부단장인 마리오를 찾아갔다.
“무슨 일입니까, 리리 아가씨. 아직 단장님 복귀 안 하셨-.”
“차명으로 부동산을 매입하고 싶어. 그런 의뢰도 받지?”
“예? 물론 돈만 되면 뭐든 하는 게 용병입니다만……. 크흠, 얼마까지 알아보셨습니까?”
내가 냅다 의뢰를 넣어 버리자 잠깐 당황하던 마리오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싹 바꾸고 진지하게 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한화로 따지면 1억 정도 되려나. 다소 비싼 금액이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제3의 신분으로 부동산을 매입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따르니 적절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마리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 비밀 엄수는 철저히 해 줬으면 좋겠어. 나, 엘로디 페르디아가 해당 부동산의 소유주인 걸 그 누구도 모르도록.”
리리 아르셀이라는 이름은 의도치 않게 유명해졌으니, 부동산 매입은 다른 신분을 하나 더 파는 게 안전할 것 같았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객님. 선금으로 5천 라리트 주시면 바로 착수하도록 하죠!”
마리오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조항을 확인한 후 선금을 치르자 마리오가 본격적으로 의뢰 상세 내용을 물었다.
너무 시골이면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관심이 많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았다. 조용한 백수로 사는 게 목표인데, 내가 귀족이라는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피곤할 테니까. 마리오가 펴 놓은 윌렌티아 지도를 쓱 보다가 한곳을 가리켰다.
“적당히 유동 인구 있는 중소도시가 좋겠어. 이 근방 항구 쪽은 어떨까?”
내가 짚은 곳은 대양을 건너면 바로 기간텔 제국으로 넘어갈 수 있는 항구 도시였다. 자칫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여차하면 배 타고 외국으로 튀어 버릴 계산이 깔린 물음이었다. 그런 내 의도를 모르는 마리오는 영 회의적이었다.
“그쪽은 부지 값이 제법 나가서요. 솜니아 근교랑 별 차이 없는데 꼭 항구여야 합니까?”
“부지 값은 상관없어. 지내는 데 불편함 없는지가 제일 중요하거든.”
“살기에는 나쁘지 않습니다. 몇 번 가 본 적 있는데 도시 분위기 자체가 활발하고 좋았거든요. 외국인들도 많이 다녀서 치안대도 잘 유지되고 있기도 하고요.”
솔깃했다. 솜니아와 떨어져 있으면서 유동 인구가 많고 치안도 좋다니.
“그럼 그쪽으로 알아봐 줘. 깨끗한 3층 정도 저택으로.”
마리오는 내가 왜 집을 사려는지 궁금한 눈치였지만 끝까지 묻지 않았다. 그런 부분이 내가 계속 창공의 매 용병단에 의뢰를 넣는 이유였다.

*** 돈도 충분하고, 집도 살 수 있는 내가 독립할 수 없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나를 죽이려는 존재였다. 그 배후는 현재까지로 앙겔로스 공작이 가장 유력했다.
방에 틀어박힌 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골똘히 고민했다. 앙겔로스 공작을 골탕 먹이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지만, 공작을 제거할 능력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다지만, 이미 내가 개입한 이상 전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러니 그건 공작을 제거할 수 있을 정도의 무기가 되지 못했다. 물론 원작에서 앙겔로스 공작은 파국을 맞이하고 만다. 황위에 오른 1황자 아덴미르가 에스텔을 죽이려던 도로테아 앙겔로스와 앙겔로스 공작에게 처단의 칼날을 내리니까 말이다. 그럼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에스텔이 나타난 시점에선 이미 늦었다. 혹시나 나까지 원작의 흐름에 따라 죽을 위험이 있으니까 말이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솜니아를 뜨는 게 내 생존에 이로웠다.
지난번 습격 때 절벽에서 떨어졌던 것처럼 죽음을 가장한 후 홀연히 사라지는 건 어떨까.
그러려면 페르디아 인간들도 전부 속여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 실종 때도 전 대륙을 다 뒤질 기세라 얼마나 놀랐던가. 그 인간들은 그러고도 남을 족속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수도를 뜰 수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존재했다. 친아빠 세베레스 공작을 깨우는 일.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 그 일을 배제하고 독립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역시 해결하지 않고서는 솜니아를 떠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사실상 항구 도시로 떠나는 건 B안인 셈이었다. 조사를 맡겼던 레이안이 자리를 비운 이후로 교만의 죄악을 찾는 일은 전면 중단 상태였다. 역시 레이안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탐욕은 여우 주제에 내 앞에 있는 쿠키를 와작와작 먹었다. 내 돈 욕심에 배부르다면서 잘도 먹네. 그렇게 마리오와 체결했던 계약서를 방구석에 잘 숨겨 놓았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마사는 쟁반 위에 초대장 무더기를 들고 나타났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를 향한 사교계의 관심은 아직도 식지 않아서 밀려드는 초대장은 여전했다. 오늘도 손가락 아프게 거절 답신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귀찮아 죽을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탐욕에게도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귀찮았으니까. 재빨리 해치울 요량으로 전투적으로 깃펜을 집어 들 때였다. 아, 하더니 마사가 초대장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호구 벨트란에 이어 황비의 등장인가. 이미 뜯겨 있는 걸 보니 집사 선에서 확인한 듯했다. 나는 서신을 펼쳐 보며 마사에게 물었다.
“마사. 이번에 2황자랑 있었던 일, 소문 다 났지?”
“울 아가씨가 2황자 전하를 호구처럼 부리면서 탈탈 털어먹은 그 사건 말이죠?”
소문이 그렇게 났다면 극성맞은 헬리콥터 맘 황비가 나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감히 제 아들을 건드렸다며 길길이 날뛰고 있을 게 눈에 선하네. 황비의 초대장에는 조촐한 티타임을 가지자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과연 조촐한 티타임일까?
참석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 줄 알고 제 발로 걸어간단 말인가. 나는 얼른 새 편지지를 꺼내 손에 익은 거절의 답신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사도 소파에 앉아 다른 가문의 거절 답신을 쓰면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황비 전하하니까 생각난 건데, 아가씨 그거 아세요? 황비 전하께서 과거에 세베레스 공작 각하를 흠모한 적이 있대요.”
우뚝. 거절 답신을 쓰는 내 손이 멈췄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절 답장을 쓰는 마사를 바라보았다.
마사는 여전히 시선을 종이에 고정한 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했다.
“자세히요……? 약혼 이야기가 거론될 정도였다는데 어느 날 갑자기 깨졌다는 것밖에는 몰라요. 그 이후로 교류를 딱 끊어 버렸다네요.”
친아빠가 친엄마를 만나기 전의 일이겠지? 친부의 과거를 캐묻다니 자식으로서 찔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야 공작 각하가 혼수상태라는 소문이 돌지만, 옛날에 세베레스 공작 각하 인기가 엄청났다잖아요? 딱 아가씨와 제가 태어날 무렵에 모습을 감추셔서 어떤 외모였는지 궁금하다니까요.”
그건 이미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내용이었다.
종종 사교계의 소문을 이야기해 주고는 하던 마사라 아무 의심 없이 제가 아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실 이건 정확하지는 않은데요. 세베레스 공작 각하가 혼수상태에 빠진 게 독 때문이래요. 그런데 독살 시도의 배후가 황비 전하의 친정인 바레쉬 후작가라나? 그냥 뜬소문이니까 재미로 듣고 넘기세요!”
애초에 전제 자체가 틀려 먹은 소문이었다. 세베레스 공작의 혼수상태 원인은 독살이 아닌 죄악의 대가였다. 직접 과거의 장면을 본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돈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살바트리체 황비의 친정인 바레쉬 후작가는 4대 가문의 직계는 아니지만 방계 쪽 가문으로, 유서 깊은 권세가였다. 대대로 4대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은 걸로 유명했다.
나는 쓰고 있던 거절 답신을 구겼다. *** 황비의 조촐한 티타임은 윌렌티아 황성 제3궁 후원에서 열렸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살바트리체 황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정권을 장악한 실세답게 표정에 사적인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역시 아들의 복수려나. 황비의 맞은편에 앉자 궁인이 내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날이 쌀쌀해서인지 찻잔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너무 긴장할 것 없어요, 엘로디 양. 그저 담소나 나눌까 하고 불렀답니다.”
나는 수줍게 웃으며 말을 아꼈다. 할 말이 없기도 했고, 어떻게 해야 세베레스 공작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지 고민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유심히 보던 황비가 입을 열었다.
“그러셨군요. 좋지 않은 이야기라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물론 파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겠지만,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엘로디 양. 추문은 새로운 소문으로 덮으면 되지 않겠어요?”
그제야 황비가 나를 부른 이유를 깨달았다. 나를 2황자 벨트란과 엮어 페르디아의 권력을 흡수하려는 의도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열이 확 뻗쳤다.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황비의 은근한 시선에 나는 표정 관리를 하면서도 머리를 팽팽 돌렸다. 황비에게 용건이 있었지만, 그것보단 이 문제를 거론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나는 일부러 의기소침한 척 조용조용 대답했다.
“약혼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요. 아무래도 제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서요…….”
“부족함? 그런 말 말아요, 엘로디 양. 그대의 가문은 페르디아인 데다가 그대 또한 어여쁘지 않습니까.”
과연 그럴까.
“하지만 제 손버릇이 나빠서 언제 남편될 사람을 때릴지 모르는걸요?”
“네. 그래서 아버지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거기다 제가 물욕이 워낙 심해서 돈을 흥청망청 쓰거든요. 아마 남편 가문 재산이 금방 거덜 날 거예요…….”
그건 아마 이번 사건에서 벨트란을 털어먹은 바 있으니 신뢰도가 높을 것이다.
“또 투기도 심해서, 혹시 다른 여자를 만나거나 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요…….”
나는 두 눈을 희번덕 뜨며 포크를 살벌하게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황비를 보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꿈도 꾸지 마세요. 황비 전하. 당신 소중한 아들놈 매 맞는 남편 만들고 싶지 않으면.

87화. 내가 그대를 믿고 싶나 봐
5–6 minutes

살바트리체 황비는 기겁했다. 무슨 말을 하나 싶어 듣고 있자니 점점 가관이었다.
저것이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어 표정을 유심히 살폈지만 엘로디는 그저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이 그저 꽃밭인 멍청이인 건지, 아니면 고단수인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후원에 들어와서 대화를 시작하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웃고만 있기에 만만히 여겼는데 그러면 안 되겠다.
페르디아의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 역시 엘로디 페르디아를 짓밟아 두는 편이 좋겠다. 아무리 순진하다고 해도 독설을 퍼부으면 알아듣는 바가 있겠지.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살바트리체 황비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사근사근하게 대답하는 엘로디에게 황비는 자못 냉엄하게 말했다.
“아무리 내가 긴장할 것 없다 말하였지만, 그런 경우 없는 말은 장소를 가리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듣기 거북하군요.”
이 정도 말했으면 잔뜩 겁을 집어먹었겠지. 그렇게 생각한 살바트리체 황비는 엘로디의 표정을 보고 멈칫, 놀라고 말았다. 겁을 먹긴커녕 엘로디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묻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제가 뭘 잘못했는지 가르침을 주세요, 전하!”
뭐지, 금방 일부러 말 끊은 것 같은데. 살바트리체 황비는 혼란에 빠졌다. 아니, 일부러가 아닌가……? 그런 것 치고 엘로디의 태도가 제게 호의적이라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못 알아들었다면 한 번 더 이야기해 주는 수밖에. 황비는 아까 했던 말을 표현을 조금 달리 해서 또다시 입 밖에 내었다.
“아무리 내가 편하게 대해 주었다고 한들 그런 말은 삼가는 게 좋다는 말입니다, 엘로디 양.”
“앗, 조심할게요. 그런 말은 삼가는 걸로. 역시 제가 부족했네요.”
제 말대로 조심하겠다고 했지만, 황비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말을 삼가겠다고 했지 그러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남자야 알 바 아니지만, 그게 제 아들 벨트란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모자란 자식이라도 자신의 아들이었다.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남들이 엘로디 양의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할지 걱정되네요.”
“누군가에게 손을 올리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니에요, 엘로디 양.”
“그러니까요. 그래서 부모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저는 정말 구제 불능이에요.”
살바트리체 황비는 순간 두통이 엄습하는 걸 느꼈다.
분명 대화하고 있는데, 벽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말을 알아듣는 것 같으면서도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기를 꺾어 놓으려 시도하던 살바트리체 황비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악의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저 맑디맑은 두 눈을 보니 의지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생각하기를 포기한 살바트리체 황비는 결국 대화 주제를 돌렸다.
“건국제 때 이슈타르 신단 주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황후는 아니지만, 윌렌티아의 실권을 장악한 실세로서 살바트리체 황비는 이슈타르 신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슈타르 신전에선 엘로디 양에게 주관을 맡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영광스러운 그 자리를 기쁘게 맡아 주겠지요?”
살바트리체 황비는 엘로디가 이 자리를 당연히 덥석 물 거라 생각했다. 1황자가 자신이 파혼당한 거라는 선언을 한 이후로 엘로디의 평판을 회복했다지만, 추문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슈타르 신단 주관을 맡아 신전이 인정한 구원자임을 당당히 드러내는 것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으리라. ‘어쨌든 엘로디 페르디아를 벨트란의 짝으로 맞으려면,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하니. 지금의 평판은 오히려 흠이지.’ 그런데, 엘로디의 반응이 영 심상치 않았다.
“엘로디 양에게 무엇보다 좋은 기회입니다. 신단 주관은 누구나 맡고 싶어 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이지 않습니까?”
엘로디는 골똘히 고민하는 척하면서도 속 시원히 하겠다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살바트리체 황비가 강수를 두었다.
“엘로디 양이 맡지 않으면 다른 4대 가문의 직계로서 도로테아 앙겔로스에게 기회가 돌아갈 겁니다.”
하지만 상대는 엘로디 페르디아였다.
“아무래도 중대한 문제니 아버지와 상의해야 할 듯해요, 전하.”
다른 영애에게 기회가 돌아간다는데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담담하게 저리 대답한 것이다. 이슈타르의 신관에게 페르디아 공작 선에서 정리당하고 있기 때문에 엘로디를 직접 설득해 달라는 요구를 받은 터라 공작과 상의하게 두어서는 안 됐다.
무릇 시간제한을 두면 마음이 급해져서 저도 모르게 하겠다고 대답하는 법. ……하지만 엘로디는 달랐다.
엘로디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눈에 서린 광기를 읽은 살바트리체 황비는 더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 그 이후로도 소소한 잡담이 이어졌지만, 나한테 기가 한껏 빨린 듯한 황비는 정신이 딴 데 팔린 듯 형식적인 답만 늘어놓았다.
나는 미리 생각해 놨던 대화의 서두를 꺼냈다.
“저어, 황비 전하께 긴히 상담 드릴 게 있답니다. 1황자 전하와 관련된 이야기예요.”
아덴미르를 견제하는 황비가 당연히 관심을 보일 거라 생각했고, 그 예측은 정답이었다.
“사실 1황자 전하께서는 제 체면을 위해 본인이 차였다고 말씀하시는데, 사실이 아니에요.”
거짓말은 아니지.
“그럼 그렇지……. 1황자가 엘로디 양을 이용했군요.”
대답 없이 서글프게 미소 짓는 것만으로 살바트리체 황비는 제 추측에 확신한 모양이었다.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다. 첫사랑이긴 했으니까. 지금까지는 밑밥 깔기에 불과했다. 나는 나를 위로하듯 옅게 미소 짓는 황비를 보며 은근슬쩍 물었다.
“외람되지만 황비 전하께서도 첫사랑을 하신 적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전하의 경험을 들으면 아픈 마음이 위로될 것 같아요.”
마사 말고 다른 사용인들에게도 캐물어 본 결과, 살바트리체 황비의 첫사랑이 내 친아빠인 세베레스 공작이라는 다수의 의견을 듣고 온 상황이었다. 생각에 빠진 듯 잠깐 머뭇거린 황비가 입을 열었다.
다정하지만 잔혹해? 그게 무슨 뜻이지? 그 말을 곱씹기도 전에 황비가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 일정이 있는 걸 잊었네요. 다음에 또 이야기 나누도록 해요, 엘로디 양.”
살바트리체 황비는 내 눈을 피하더니 황급히 티타임 자리를 파했다.
나도 탐욕의 의견에 동감했다.
‘뭐가 있긴 한 것 같지? 저렇게 황급히 자리를 뜨고 말이야.’
‘괴롭힌 게 아니라 웃는 얼굴로 철벽 친 거라고 해 줄래?’
역시 저렇게 상대를 찍어 누르려는 상대에게는 ‘아무것도 몰라요’ 작전이 가장 적격이다. 이제 벨트란을 내게 들이미는 말도 안 되는 짓은 벌이지 않겠지. 통제 안 되는 미친 여자를 제 아들 곁에 두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아쉬운 점은 친부에 대해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다는 거였다.
‘황비의 부친인 바레쉬 후작한테 바로 접촉해 봐야 하나?’
4대 가문이 아닌데도 그에 준하는 권력을 누리는 바레쉬 후작가. 그 권력으로 황제가 병석에 앓아누운 지금 바레쉬 후작의 입김은 강했다.
‘그래도 황비까지 앙겔로스의 손을 놓고 페르디아를 취하려고 할 줄은 몰랐어.’
줄곧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앙겔로스를 포기할 정도로 페르디아가 대단하긴 한가 보다.
‘중간에서 줄타기하면서 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제3궁 후원을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황성 안까지 용병 호위가 들어올 수 없어서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나는 혼자였다. 그래도 곳곳에 친위대가 배치되어 있어서 황성 내에서 습격당할 위험은 없었다. 혹시 벨트란을 만날 줄 모르니 빨리 황성을 빠져나가려 걸음을 재촉할 때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보며 딱 굳고 말았다.
뭘까, 이 바람피우다가 남편에게 딱 걸린 것 같은 기분은? 제3궁은 황비의 궁이므로, 누가 봐도 황비를 만나고 온 모양새였다.
‘뭐라고 해야 하지? 오해라고 하면 더 오해할 것 같은데?’
내가 당황한 사이에 아덴미르는 긴 다리로 빠르게 다가와 기어코 내 앞에 섰다.
역시 오해한 게 틀림없다. 그렇다고 변명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뜻밖의 물음에 나는 그저 눈을 깜빡였다.
이거, 설마 날 걱정하는 거야?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아덴미르의 행동이 명확한 걱정이었다.
“다행이군. 다음에 황비가 그대를 부르면, 사용인을 대동하도록 해.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잖아.”
이번에도 걱정. 익숙지 않은 다정한 염려에 어째선지 가슴이 찡하고 울리는 것처럼 아팠다.
전 약혼녀를 대하는 형식적인 걱정인 걸 알지만, 괜히 기대하게 되니까. 내가 아덴미르를 가만히 올려다보자 그가 미간을 좁히며 두 발짝 더 다가왔다.
“황비와 만나고 나오는 걸 보면, 내통을 의심하는 게 정상이잖아요.”
내 말에 아덴미르의 눈이 서서히 커지더니, 이내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
그렇게 중얼거린 아덴미르가 웃으며 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뒤돌아서는 아덴미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88화. 레이안, 네가 숨기던 비밀이 이거야?
5–7 minutes
통신 마도구가 감응하기에 봤더니 마리오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의뢰하셨던 저택 매입 건 정리 끝냈습니다. 아가씨께서 확인만 해 주시면 되는데요.]
확실히 통신 마도구가 있으니 편하네. 서신으로 대화 주고받으면 간단한 용건도 이틀 걸리곤 했는데. 마리오가 보낸 호위 3인방을 거느리고 본부에 도착하니 그가 마탑주의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무 중에는 원래 연락을 잘 안 하시는 분이라, 복귀 시점은 저희로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레이안은 비밀이 많은 남자다. 부단장에게도 행적을 알리지 않고 사라지다니. 어쨌든 나는 내 거처가 될 집 후보들의 조건을 살폈다. 그때 아래에서 ‘와아악!’ 하는 함성이 뒤섞인 시끌벅적한 소음이 올라왔다.
“이놈들이 또 사고를……! 살펴보고 계세요, 아가씨.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마리오가 문을 닫고 나가자 그 새를 참지 못하고 탐욕이 봉인석에서 제멋대로 빠져나왔다.
누가 보면 죄악이 아니라 정말 반려동물인 줄 알겠네. 탐욕과 이 집이 좋네, 저 집이 좋네 한창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쿵.
복도에서 들리는 묵직한 소리에 탐욕과 나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죄악이면서 연약한 인간한테 나가라고 하는 게 말이 돼?”
우리는 서로에게 미루면서도 밖으로 나가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더 이상 복도에서는 비슷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냥 용병단원 중 하나가 무기라도 떨어트린 거겠지.”
다시 부스럭거리며 서류를 펼칠 때였다. 쿵……. 아까보다 작지만, 묵직한 소리가 명확하게 들렸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째니 나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용병단 본부고, 아래층에 용병들이 포진해 있으니 습격자는 아닐 텐데……. 하지만 앙겔로스 공작을 처리하지 못한 지금 암살자가 숨어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나는 품속에 있던 독 병 하나를 목숨줄처럼 쥐고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반쯤 열리더니 뭔가에 턱 가로막힌 듯 열리지 않았다. 고개만 쓱 빼서 뭔지 확인한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이안이 문에 반쯤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나는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빠져나가 몸을 낮춰 얼른 레이안의 상태를 살폈다.
잠깐 자리를 비운다더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온 걸까. 레이안은 정신을 잃은 듯했다.
아래에 있을 마리오를 불러오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레이안이 눈을 떴다.
내 물음에도 레이안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빤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혹시 너무 많이 다쳐 그런가 싶어 얼굴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레이안이 상처투성이 손을 들어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내 그는 밭은 숨결과 함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이안의 내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대더니, 그 위를 제 큰 손으로 덮었다.
차가운 입술이 내 손바닥을 내리눌렀다. 마치 낙인을 새기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나를 응시하는 붉은 눈에 짙은 안광이 어렸다.

그 집착 가득한 눈빛을 받은 나는, 올가미에라도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툭, 레이안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정신을 완전히 잃은 것이다. 두근, 두근. 어째선지 빠르게 뛰는 심장께를 꾹 누르다 정신을 차리고 레이안의 상태를 살폈다. 여기저기 다친 곳이 있지만 치명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레이안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는 나지막이 탐욕을 불렀다.
타닷. 탐욕이 레이안의 옆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탐욕의 능력은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다. 일주일에 3초 쓸 수 있다는 제약이 있다지만 생물에게 사용할 수 없다는 조건은 없었다. 사람에게 쓰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긴 했지만 정말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해서라도 레이안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 뭔지 알고 싶었다. 나를 왜 그런 눈으로 보는지. 그런데, 왜 내가 아닌 나를 보는 것 같은지. 이건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 말과 동시에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감탄도 잠시 레이안의 위로 떠오른 문자를 읽어 내리는 내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그 위로 떠오른 정보는……. [레이안 비에탄. 이르칼라의 저주를 받은 이슈타르의 두 번째 자식. 비에탄 가문의 직계. 암흑 속성의 권능 중 그림자를 사용할 수 있다. 교만, 시기와 계약을 했으며 그 대가로…….] 3초 동안 알 수 있는 정보는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나를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비에탄. 비에탄이라면, 사라진 2개의 가문 중 하나였다. 죄악을 봉인한 7대 가문 중 하나로, 암흑 속성을 사용할 수 있다는…….
*** 그러고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안이 7대 가문의 직계라고 생각하면 의문이 해소되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던 나를 구했을 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려졌던 게 내 착각이 아니라 레이안의 권능이라면. 같이 있으면서 종종 문이 알아서 닫히던 것도 권능이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7대 가문 중 하나인 비에탄의 후계자라는 게 밝혀지면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끝까지 숨길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미처 읽지 못한 다른 정보도 마음에 걸렸다. 교만과 거래한 적 있다고 말한 적은 있지만, 시기와 거래한 사실은 말해 주지 않았다.
나는 잠든 레이안의 얼굴을 잠자코 응시했다. 마리오가 기겁하며 본부에 있는 레이안 숙소에 들어다 옮긴 후 치료를 끝마친 레이안은 잠든 상태였다. 마리오가 말하길 다친 곳은 별로 없고 힘을 많이 써서 잠든 것이라고 했다. 환자 침대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고 누운 탐욕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레이안이 무섭다더니 탐욕은 그 옆에 웅크려서 쿨쿨 자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를 끌어다 레이안의 곁을 지켰다. 할 일이 없어서인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그런데 용병왕이라는 레이안의 숙소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돈도 많이 벌 텐데 딱 필요한 가구만 있는 단출한 침실이었다.
놀러 다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레이안은 대부분 나를 호위하러 따라다니고, 나머지 시간엔 용병단 업무를 보았다. 그 외에 여가 생활을 하는 걸 본 적은 없었다. 나는 턱을 괸 채 레이안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순한 강아지 같았다. 공기 중에 소독약 냄새와 피 냄새가 아직도 나는 것 같아 커튼을 걷고 창을 살짝 열었다. 차가워진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레이안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악몽을 꾸는 걸까?
나는 폭주로 괴로워하던 얀시에게 그랬듯 레이안의 몸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대체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꿈에서만은 편안하길 바라면서. ***
거짓말. 늘 내 앞에서 죽어 버렸으면서.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끝까지 그 사람은 제 손을 잡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들이 재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늘 그렇듯 결말은 어김없이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레이안은 정신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눈가가 축축해서 손등으로 눈을 덮었다. 깨어나 보니 자는 동안 운 적이 많아 그리 놀랍지 않았다. 이르칼라가 쏟아 보낸 마수를 전부 처치하고, 기어코 균열을 닫은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어떻게 용병단까지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우스웠다. 돌아갈 집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자조하며 기억을 곱씹을 그때였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나긋한 음성에 레이안은 팔을 걷어 내었다. 흐릿한 시선 너머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엘로디의 얼굴이 보였다.
상체를 일으킨 레이안은 엘로디가 시키는 대로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깨끗이 닦고 물을 한 컵 비웠다.
그러다 그는 제 옆에서 천장을 보고 누워 자고 있는 탐욕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어째서 엘로디가 여기에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눈을 뜨자마자 본 게 엘로디의 얼굴이라는 점이 좋았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는 달랐다. 자못 진지한 얼굴로 엘로디가 그를 불렀다.
감추고 있던 비밀 하나를 들켰지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사실 탐욕의 죄악을 엘로디에게 넘겨주면서 예상했다. 언젠가 이 비밀이 밝혀지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레이안은 엘로디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 핏줄에 한정되었음을 깨달았다. 정식 계약이 아닌 봉인석을 통한 능력 사용으로는 고작 3초 동안 가치를 읽어 내는 게 고작이었을 테니. 선택의 순간이었다. 작정하고 숨긴다면 과거의 일을 묻을 수 있었다. 언젠가 엘로디가 스스로 알아낼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무력하기만 한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다면, 혐오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 이상 곁에 있을 수 없으니까, 지켜 줄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레이안은 엘로디를 믿고 싶었다.
“모든 걸 말씀드리면……. 진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저를 지금처럼 대해 주실 겁니까?”
그 말에 엘로디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러면서 엘로디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레이안에 대해서 지금보다 더 많이 알고 싶거든.”
순간 레이안은 엘로디와 처음 만났던 그때의 기분을 느꼈다. 무채색이던 세계에 연분홍색이 침입해 들어오던 그 순간의 충격을. 그 감정을 뭐라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르지만, 눈앞의 상대가 제게 유일한 존재라는 것은 확실했다.
이윽고 레이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89화. 소년과 구원
6–8 minutes
레이안 비에탄. 아이는 암흑 속성의 권능을 부여받은 6대 가문 중 비에탄의 직계이며, 유일한 후계자였다. 오랫동안 자식을 고대해 왔던 비에탄 공작 부부에게 레이안의 탄생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다. 그들은 때로는 엄하게 훈육하고, 때로는 따뜻하게 보듬으며 레이안을 키웠다. 레이안은 비에탄 가문의 울타리 속에서 무탈하게 자랐다. 레이안은 다소 무뚝뚝한 아버지의 성정을 닮아 감정 표현이 다양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다정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타인을 배려할 줄 알았다. 하지만 레이안 비에탄은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다. 레이안의 나이 다섯 살. 후계자 교육은 순탄했다. 비에탄 가문의 가정교사는 레이안의 비상한 습득력에 혀를 내둘렀다.
“벌써 이번 교재를 전부 습득하시다니, 역시 레이안 도련님이십니다.”
한창 사고 칠 무렵인 또래 남자아이들과 비교하면 레이안은 상당히 얌전하고 조숙한 아이였다. 그뿐만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에 귀족적인 기품이 흘렀고 워낙 신중한 성격 덕분에 말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레이안은 비슷한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의 선망과 짝사랑 대상이기도 했다. 또래들이 모이는 파티에서 레이안은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이곤 했다. 레이안의 부친은 그런 아들이 오만한 사람으로 자라지 않도록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불평처럼 들릴지도 모르니 말씀드리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에게 그런 것도 말 못 해? 상관없으니 말해 보거라.”
잠깐 머뭇거리던 레이안이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비에탄 공작으로서는 예상했던 아들의 속내였다. 척 봐도 과하게 시달리는 것 같기는 했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피하는 레이안을 유심히 보며 물었다.
무릇 권력자에게 사람이 몰려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물며 그게 한참 어린 가문의 후계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레이안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면이 있어 남들보다 더할 것이다.
“지금에야 단순히 레이 네게 호감을 느끼고 다가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점점 네 주변에는 가문을 보고 접근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비에탄은 윌렌티아의 검. 황실에 충성을 다하고, 영웅의 후예로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라. 그것은 선대로부터 내려온 가르침이었다. 레이안은 아버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레이안은 공작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하나를 말하면 열을 깨닫는 아들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던 비에탄 공작이 레이안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곧 레이 네 생일이 아니냐. 올해는 무슨 선물이 좋겠느냐, 우리 아들?”
매사에 무덤덤하던 레이안의 눈빛이 드물게 초롱초롱해졌다.
“사냥개라……. 너도 알겠지만 생명을 책임지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야.”

듬직하게 대답하는 아들의 모습에 공작은 흐뭇하게 웃었다.
귀엽고 자랑스러운 내 아들에게 그것도 못 해 줄까. *** 레이안은 생일을 기념하여 마구간에서 새끼 사냥개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그는 일주일이 넘도록 품속에서 꼬물거리는 귀여운 강아지의 이름을 고민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비에탄 공작 부인이 넌지시 물었다.
“물론 네 말이 맞지만, 계속 강아지라고 부를 수도 없잖니.”
어머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레이안은 고민하던 이름 두 개 중에 하나를 골랐다.
아직 새끼지만 장차 대형견으로 성장할 강아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레이안의 일상에 이변이 일어난 건, 늘 가지던 또래 모임이 열리던 날이었다. 이번 모임은 비에탄 공작 부인의 주최로 비에탄 수도 저택에서 열렸다. 다양한 가문의 자제들이 저택에 초대되었다.
“비에탄 공자. 공자가 아낀다는 강아지 저도 보여 주면 안 돼요?”
이번에도 레이안의 주위에는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레이안은 그 말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많으면 강아지가 스트레스를 받을지도 모르니 어렵겠습니다.”
단호하지만 다정한 레이안의 말에 울상 짓던 여자아이는 금세 싱글벙글해졌다. 그렇게 모임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하게 되었을 즈음이었다. 아무 전조도 없이 사건이 벌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사람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조금 전까지 뛰어다니던 한 말썽꾸러기 영식도, 레이안 옆에서 조잘거리며 말을 걸던 영애도. 모두 정지되었다. 그중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레이안밖에 없었다.
당황한 레이안은 일어나 근처 티테이블에 앉아 있던 어머니에게 향했지만, 어머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조숙한 레이안이라지만, 삽시간에 벌어진 이 사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택에서 집무를 보고 있던 비에탄 공작이 황급히 달려왔다. 범상치 않은 힘의 흐름에 모임 장소인 정원까지 나온 것이다.
비에탄 공작이 레이안을 안아 들자마자 사람들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두려움으로 얼룩진 눈으로 일제히 레이안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레이안은 방금 벌어진 상황을 인지했다.
그랬다. 권능이 발현한 순간이었다. 비에탄의 후계자가 강대한 권능을 발현했다는 소문이 윌렌티아 전역에 퍼져나갔다. 비에탄 공작 부부는 아들을 앞에 앉혀 두고 설명해 주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그림자가 있다면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다. 제 그림자 속에 무언가를 가둬 둘 수도 있었다. 다만 아직 권능을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통제가 쉽지 않았다. 그 탓에 처음 발현한 날 이후로도 종종 저택의 사용인들이 정지되곤 했다.
“저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권능을 주체할 수가 없어요. 제 힘이 아닌 것 같습니다.”
비에탄 공작 부인은 답지 않게 의기소침한 아들을 끌어안았다.
“아직 어려서 그래. 누구든 권능을 처음 발현하면 그렇단다. 서두를 것 없어.”
레이안은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서둘러 극복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사고를 치고 말 것이다. 아들의 냉정한 판단에 비에탄 공작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레이. 빨리 통제하면 통제할수록 좋다.”
레이안은 아버지와 함께 연무장에서 권능을 다스리는 수업을 했다. 그것은 가주가 후계자에게만 할 수 있는 수업이었다. 제멋대로 권능이 발현하지 않도록 스스로 통제하면서,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훈련했다. 권능의 가동 범위를 넓히고, 좀 더 정교하게 가다듬고, 혹여 실수로 삼키지 않도록 그림자에 제약을 걸었다. 훈련 도중에 부자는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대개 어릴 때 약혼자를 지정해 주기도 하니 이른 약혼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안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러나 비에탄 공작은 제법 끈질겼다.
“6대 가문이나 황가가 아니라도 좋아. 정녕 없느냐?”
“이런 부분은 정말이지 나와 다르구나. 나는 어릴 때 네 엄마를 보자마자 졸졸 쫓아다녔는데 말이다.”
관심 없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짓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지만, 공작은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레이 네가 내 아들이라면, 언젠가 한 여자에게 목매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레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훈련이나 시작했다.
*** 레이안의 나이 열셋. 소년은 이제 권능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비로소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공작은 아들을 데리고 저택의 가장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대대로 가주와 후계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비에탄의 심장부였다. 그곳에는 보석이 하나 있었다. 그 속에는 무언가 붉게 타오르는 듯했다.
“이건 비에탄의 선조가 봉인한 죄악, ‘탐욕’의 봉인석이란다.”
“죄악이 더 이상 지상에 활개 칠 수 없도록 감시하고, 이르칼라의 야욕을 막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의무다, 레이.”
후계 교육받으며 이미 머릿속에 넣었던 사실이지만 봉인석을 직접 눈에 담으며 가주에게 전해 듣는 것은 또 달랐다.
“너는 비에탄이다. 그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비에탄으로서 긍지를 잊지 말아라.”
비에탄.
비에탄의 후계자로서 장차 가주가 되어 의무를 다하는 것. 레이안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긍지를 되새겼다. *** 삶은 변칙적이고, 당연한 줄 알았던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가 온다. 평온한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밤, 자던 중 창밖이 유달리 환하기에 깬 레이안은 두 눈을 의심했다.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비에탄의 수도 저택이 화마에 삼켜져 가열하게 타올랐다. 어머니가 사랑했던 장미 정원이, 아버지와 대련하다 함께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던 연무장이, 기억도 나지 않을 때부터의 유년이 담겨 있는 저택 전체가 사위고 있었다.
방 안으로 달려 들어온 가문의 기사 하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말끝을 흐린 기사가 얼른 레이안을 끌어당겼다.
그의 태도에 레이안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통로 앞에 계실 겁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앙겔로스의 사병들이 머지않아 저택 안까지 쳐들어올 겁니다!”
앙겔로스.
레이안은 기사의 뒤를 따라 저택의 비밀 통로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비에탄 공작 부인과 유모가 함께 있었다.
레이안은 놀랐다.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럽기만 하던 어머니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얼굴이 너무 강해 보여서 어머니 같지 않았다. 비에탄 공작 부인은 그에게 주머니 하나를 떠안기며 말했다.
“아니, 난 저택에 남아 이곳을 끝까지 지킬 것이다.”
“공식적으로 너는 이 저택에서 나와 함께 죽은 것이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야. 나까지 사라지면 의심받을 테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아들을 통로 안으로 떠밀었다.
“레이안. 네가 비에탄의 유일한 희망이다. 꼭, 끝까지 살아남아서 기필코 가문의 복수를-.”
끼익, 쾅! 통로의 문이 닫혔다. 한 방향으로밖에 열 수 없는 통로라 레이안은 다시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권능을 사용해서 열어 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권능이 통하지 않는 특수 광물로 만들어진 통로였기 때문이었다. 머리로는 어머니가 왜 혼자만 자신을 내보낸 건지 알았다. 비에탄 공작 부인은 공식적으로 아들과 함께 죽은 것으로 꾸밀 생각인 것이다.
그렇게 고고하던 비에탄은 한순간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도 죽었다. 그의 사냥개 버스터도, 저택의 사용인들도, 전부 죽었다. 수중에 남은 것은 걸치고 있는 잿더미 가득 묻은 침의와 어머니가 쥐여 준 탐욕의 봉인석이 전부였다.
“레이안. 네가 비에탄의 유일한 희망이다. 꼭, 끝까지 살아남아서 기필코 가문의 복수를-.”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레이안은 살아야 했다. 윌렌티아의 검이라는 수식에 맞게 레이안은 어리지만 검술의 실력자였다. 그런 그가 용병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앙겔로스가 건재한 이상 신분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했다. 그는 이름을 바꾸고 언제나 검은 로브를 둘러쓴 채 용병으로 활동했다. 혹여 유명해지지 않도록 실력을 최대한 감추며 위험천만한 의뢰를 받았다. 하지만 더 이상 세상은 그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간단한 의뢰라며 받은 일은 말도 안 되는 난도였다. 하급 마수 몇이 자리 잡았다며 퇴치를 의뢰받은 동굴은 균열이 열린 마굴 한복판이었다. 전력을 다해 베어 내고 권능을 사용했지만 한계는 존재했다. 마수의 틈바구니. 쓰러진 레이안은 제게 달려드는 마수를 보며 생각했다.
비에탄을 재건하지도 못하고, 가문의 복수도 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유언대로 끝까지 살아남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이대로 죽는 건가. 하지만 눈은 속절없이 감겼다. 마수들이 떼 지어 달려들어 그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의식이 흐려지던 그때였다. 마수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지더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기 직전의 소년은, 구원자를 만났다.

90화. 진짜 이상한 여자였다
6–7 minutes
그 직후 레이안은 정신을 잃었다. 아무리 일반인보다 강한 신체를 가진 6대 가문의 직계라고 하지만, 권능을 너무 많이 사용한 데다 출혈이 심각했다. 하지만 레이안은 오래 잠들 수 없었다. 혈혈단신의 생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잠든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경계해야 했다. 실제로 잠든 틈을 노려 호위로 자신을 고용한 고용주가 제 금품을 탈취하려 했던 일이 있기도 했으니까. 어렴풋이 깨어난 레이안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생소하지만 들어 본 적 있는 음성. 여자 목소리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과 함께 레이안은 눈을 떴다. 몸이 절로 움직였다. 그는 침대 가에 걸터앉아 있던 여자를 제압하여 권능으로 그림자 검을 소환했다. 그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두근두근, 세차게 맥동하는 여자의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레이안은 말없이 칼날을 바짝 들이대었다. 그러자 여자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그것보다 너 아직 몸 상태 안 좋아서 권능 쓰면 안 돼. 크게 다쳤다고.”
그녀의 말대로 레이안의 몸 상태는 아주 나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앉아 있는 것만으로 눈앞이 아득해지고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하지만 정체 모를 이의 곁에서 정신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 여자, 내가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는 거지.’
그러고 보면 죽어 가던 자신을 발견했을 때 분명 그렇게 말했다.
……이라고. 그는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특정되지 않기 위해 매번 다른 가명을 사용했다. 남들 앞에서는 결코 권능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뭘까. 섣불리 죽이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자의 나긋나긋한 음성에 레이안은 저도 모르게 권능을 거둬들였다.
그래. 목적이 있으니 살려 준 것이다. 그러니 당장 크게 경계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그런 거겠지. 레이안은 금방까지도 칼날이 위협하고 있던 목덜미를 매만지고 있는 여자를 응시했다. 처음 보는 외양의 여자였다. 전체적으로 여린 분위기의 여자는 옅은 백금발과 봄철의 꽃잎 같은 연분홍빛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늘이라고는 없이 해사하게 웃는 여자는 레이안의 눈으로 보기에도 예쁜 외모였다. 이렇게 눈에 띄는 외모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그의 추궁에 여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답잖은 소리를 받아 줄 여유는 없었다. 재차 이어진 레이안의 추궁에 ‘큼큼’ 하며 헛기침을 한 여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미안, 그것 말고는 대답해 줄 수가 없네. 나도 말 못 할 사정이 있거든. 하지만 너를 해칠 생각은 절대로 없어. 도와주려는 것뿐이야.”
그 말을 믿기에는 레이안이 살아온 삶이 너무도 가혹했다. 용병 일을 하면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제 발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으므로 누구도 믿지 못했다. 눈앞의 리리라는 여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해해. 갑자기 불쑥 나타난 여자가 이름도, 비밀도 알고 있다니 신뢰할 수 없겠지.”
여자가 선심 쓰듯 말했다.
“의심되면 의심해야지. 대신 이렇게 하자. 나는 레이안이 무사히 나을 때까지 돌봐 주고, 레이안은 내가 누구인지 밝혀내고. 어때?”
어떻냐니.
레이안은 의심스러운 사람과 상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자를 이대로 죽이거나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현재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최소 일주일은 요양해야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을 것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레이안은 결론을 내렸다.
리리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지만 레이안은 시선을 피했다.
제게 불리할 것 없는 조건이었다. 운신하기 어려운 자신을 보살펴 준다니 그 말대로 목적을 알아내면 그만이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는 리리는 속도 없이 쾌활해 보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걸까. 밝은 모습을 보는 레이안의 속이 어쩐지 뒤틀렸다.

*** 그 이후 어째서인지 레이안은 기절하듯 잠들고 말았다. 푹 자고 깨어나니 몸 상태가 한결 나아졌다.
그는 요기할 것을 들고 들어오는 리리를 보며 대답 대신 물었다.
집을 사다니. 위치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 수준의 집이라면 제법 값을 치러야만 했다. 계속 신분을 바꿔야만 하는 제약이 있는 레이안이 할 수 있는 의뢰는 위험했지만 보수가 높지 않았다. 그런 데다가 복수를 위해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레이안의 처지로는 돈을 허투루 쓸 수 없어 늘 싸구려 여인숙에 묵었다. 이렇게 깨끗한 장소에서 눈을 뜬 건 실로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레이안은 집을 샀다는 리리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했다. 리리는 침대 옆 선반에 음식이 든 쟁반을 내려놓았다.
“요리 안 한 지 오래돼서 어떨지 모르겠네. 먹어 봐.”
레이안은 음식을 먹는 대신 리리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리리가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분명 목적이 있으니 접근했겠지만, 자신을 죽이려는 목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레이안은 쟁반 위 음식을 보았다. 고기가 잔뜩 든 스튜와 흰 빵이었다. 마굴에 갇힌 후 일주일이 넘도록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레이안은 오랫동안 식사하지 못한 상태였다.
“입에 안 맞을지도 모르지만, 만든 정성을 생각해서 먹어 봐.”
리리는 쉽게 식사할 수 없는 제 처지를 배려하듯 말을 건네었다. 레이안은 스푼을 들어 스튜를 떠 입에 넣었다. ……맛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일 뿐인데, 빌어먹게도 맛있었다. 비에탄의 후계자일 적 이보다 더 훌륭한 음식을 수없이 먹어 보았건만, 그동안 먹었던 무엇보다 맛있었다. 왜지. 오랜만에 하는 식사이기 때문일까. 레이안은 말없이 음식을 입에 넣고 씹었다. 리리는 레이안이 식사하는 것을 웃으며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 리리는 정말로 ‘환자 돌보기’라는 목적에 충실했다. 하루에 한 번 상처를 소독하고, 세 번 식사를 만들어 주었다. 싫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럴수록 레이안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평민은 아닌 것 같은데, 털털한 태도는 귀족 같지도 않았다. 레이안은 오늘도 제 상처를 소독해 주는 리리를 바라보았다.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그녀는 감격한 얼굴을 하더니 두 손으로 레이안의 한 손을 꼬옥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레이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야멸차게 뿌리쳤으니 당연히 상심하거나 기분 나빠하는 게 정상이건만.
리리는 오히려 실실 웃었다.
그럴수록 레이안은 더욱 당황했다.
리리는 마치 자신이 보호자인 것처럼 굴었다. 저택이 불타고 부모가 죽은 이후에 이렇듯 보호받은 기억이 없어서인지 기분이 이상했다. 답답한 건 아니었지만, 한 공간에 있는 게 어째서인지 불편했다. 레이안은 리리의 집요한 시선을 느끼며 집을 나섰다. 그녀는 레이안의 옆에 졸졸 따라붙었다.
“어디 갈 거야? 근처에 낮은 언덕 있던데 거기 갈래?”
그는 리리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힐끔힐끔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리리라는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을 절로 잡아끄는 여자였다.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건지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을 따라왔다. 그러면서도 병아리처럼 쉴 새 없이 조잘대었다.
“지금은 내가 누난가? 레이안, 누나라고 해 봐. 누나!”
리리가 마련한 거주지는 솜니아의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었다. 레이안은 혹시 자신을 알아보는 귀족이 있을지 모르니 후드를 깊게 눌러 썼다.
“이게 누구야. 죽은 줄 알았는데, 멀쩡히 살아 있었어?”
빈정대는 목소리에 레이안은 걸음을 멈추었다. 시선의 끝에는 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이번 의뢰에서 그를 마굴에 유도해 집어넣은 고용주였다. 한 중소 상단의 부상단주라고 했던가. 일부러 자신을 제거하려는 이들은 많았다. 인간이란 자신보다 못한 이들을 짓밟으며 제 저열한 본성을 즐기고는 하는 족속이었으니까. 하지만 신분이 탄로 날 수도 있으니 레이안은 마찰을 피했다. 그럴수록 그들은 뭐라도 된 양 폭군처럼 굴었다.
‘벌써 내 존재가 특정된 건가. 당분간 솜니아를 뜨는 게 좋겠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부상단주가 한껏 이죽거렸다.
“마굴에서 기어코 살아나오다니, 대단한데? 그런데 왜 의뢰 대금을 받으러 오지 않았어?”
남자가 낄낄거리며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더니 금화 하나를 바닥에 툭 던졌다.
레이안은 금화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분하다거나 수치스럽다는 생각은 그에게 사치였으므로. 그때였다. 탁. 작은 발이 금화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레이안이 고개를 들자 평소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어디 가고 서늘한 얼굴의 리리가 부상단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내 리리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레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리리의 존재를 인식한 부상단주가 노골적으로 음탕한 시선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야, 용병. 네 여자냐? 이렇게 반반하게 생긴 여자를 끼고 다니다니, 제법인걸?”
중소 상단의 부단장주라지만 괜히 엮이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다. 겪어 본 바, 성격이 고약한 자니 더욱. 레이안은 리리를 보호하듯 막아섰지만 소용없었다. 기어코 그의 앞으로 나선 리리가 부상단주를 노려보며 말했다.
“썩은 내가 여기까지 나잖아. 당신, 씻기는 하는 거야?”
남자가 거대한 손을 치켜들었다. 레이안이 그를 제압하려고 했지만 리리가 더 빨랐다. 갑자기 한기가 훅 끼쳐오더니 남자의 팔이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부상단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사는 아무리 평민 출신이라 할지라도 준 귀족으로 대우받았다. 규모가 제법 되는 상단의 부상단주라도 마법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리리는 결정권이 그에게 있는 것처럼 넌지시 물었다.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상단주를 노려보았다.
화륵! 열기가 훅 끼치며 불길이 치솟았다. 마법으로 얼었던 남자의 팔이 삽시간에 녹았다.
그는 부리나케 장소를 벗어났다. 레이안은 여전히 뚱한 얼굴인 리리를 보았다. 원소 마법을 쓰다니, 정말로 마법사였던 것인가. 그러고 보면 마수가 득실거리는 마굴에서 자신을 꺼내 온 것만으로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다. 그는 노골적으로 선을 그었다.
“그냥 내가 저 남자가 재수 없어서 손봐 준 건데? 그게 전부야.”
궤변이다. 언제 봤다고 재수 없다며 초면인 남자를 제압하고 위협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리리의 표정이 퍽 진지해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진짜 이상한 여자였다.

91화. 우린 언젠가 또 만나게 될 거야
5–7 minutes
그녀와 함께 지내는 게 익숙해졌다. 한집에서 함께 지내는데도 불편하지 않게 느껴지다니 이상했다. 게다가 먹고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오다가 이렇듯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지내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렇지만 평온하지만은 않은 나날이었다. 한 번은 요리하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에 주방으로 나가자 프라이팬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레이안은 침착하게 불을 진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리는 타 버린 달걀을 절망하며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남은 재료는 고기 조금과 채소 몇 가지가 전부였다. 리리는 슬픔에 휩싸여 요리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레이안이 요리했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고기와 채소는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건만 그는 그 놀라운 걸 해냈다. 리리는 가상하게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요리를 먹었다. 레이안은 자신의 입에도 맛없기만 한 요리를 꾸역꾸역 넣으며 고민했다.
앞으로 요리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레이안은 순간 놀랐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 기이한 생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일주일 후, 레이안의 상처를 살펴본 리리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리리의 말대로 상처는 예전에 이미 다 나았다. 쥐어짜 썼던 권능의 힘도 전부 돌아왔다. 하지만 레이안은 그것을 그녀에게 티 낸 적이 없었다.
스스로 물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레이안은 다정하게 웃는 리리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곁에 머무르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그러니 아직 아픈 이상 떠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생각대로 리리는 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보았다. 오로지 저만 담는 연분홍빛 눈동자를 마주 보자 레이안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보내 줄 수 없는 것이다. 레이안이 그녀와 함께 지내며 알아낸 건 이러했다. 리리. 정확한 나이는 알지 못하지만 자신보다 많은 듯하다. 20대 초반 추정. 원소 자체를 다루는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 요리 실력이 나쁘지 않지만 주력 요리가 아니면 형편없다는 것. 자존심이 센 듯하지만 의외로 자존감이 낮다는 것. 칭찬해 주면 금세 강아지처럼 헤헤 웃는다는 것. 그리고…… 웃는 얼굴이 보기 좋다는 것. 그게 단순히 상대의 정보를 캐기 위한 관찰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지만, 레이안은 애써 부정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럴수록 레이안은 초조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아프다는 핑계로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실제로 화상을 만들 생각으로 주방에 가 불을 피웠다가 불길에 손을 집어넣기 직전 쫓아 나온 리리와 눈이 마주쳤다.
잊고 있던 제 성까지 부르는 음성에 레이안은 이끌리듯 그녀에게 갔다. 결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 밤의 사건 이후에 리리는 더욱 그의 곁에 붙어 철저하게 감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히려 레이안은 그 감시가 기꺼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리리가 그의 방에 들어왔다.
리리의 선언에 레이안은 그저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리리의 손을 붙잡은 레이안은 자신이 오히려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지 말라고 스스로 내뱉은 것도, 먼저 손을 뻗어 붙잡은 것도 의식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 번 입 밖으로 꺼내니 다음은 쉬웠다. 그는 리리의 손을 잡은 제 손에 힘을 주며 애원했다.
전부 잃은 줄 알았다. 감정은 메말라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무지에 햇살을 드리우고 물을 뿌려 기어코 싹을 틔운 주제에 가겠다니. 레이안은 더 이상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잔인했다. 가지 말라는 애원에도 끝까지 작별을 입에 담았다.
“내가 떠나면 거실 서랍을 열어 봐. 도움이 될 거야.”
붙잡고 있으면 떠나지 못하겠지.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레이안은 리리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안타까이 웃으면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자…….
몸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레이안은 짧은 시간 동안 리리가 꺼낸 물건을 보았다. 분명 봉인석이었다. 무슨 죄악의 봉인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프다고 했잖아. 당신 떠나면 더 아플 거라고……!”
아프다는 핑계는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기약 없는 말을 남긴 채 그녀는 사라졌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어느 날 홀연히. *** 그날 이후로 레이안의 생의 목표가 변했다. 살아남으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죽지 못해서 살았던 그는 이제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게 되었다. 살아야만 그녀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교만의 능력은 시공간 초월. 레이안은 리리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신을 만나러 왔음을 깨달았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무엇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에게 남은 거라곤, 리리가 남기고 간 엄청난 액수의 돈과 집뿐이었다. 집을 샀다는 리리의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무리 돈을 써서 사람을 풀어도, 리리라는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레이안은 그녀가 현시대의 사람이 아니라는 추측을 했다.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결국 수명이 다해 죽을 때까지 당신을 찾지 못하면 어떡하지? 당신이 온 곳이 먼 과거라면, 그도 아니면 수천 년 후의 미래라면……? 레이안은 잃을 게 없었다. 가족은 죽었고, 가문은 멸망했으며, 그 사람은 사라졌다. 그는 그림자 속에 숨어드는 제 권능을 사용해 세베레스 가문에 잠입했다. 목표는 세베레스 가문에 있을 시기의 봉인석이었다. 시기의 능력은 불사. 그는 불사의 몸을 얻는 대신 대가를 치르고, 이르칼라의 저주를 받았다. 또 세월이 흘렀다. 이제 이 인생의 목표가 복수인지, 혹은 가문의 재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맹목적으로 제 삶을 뒤흔들고 사라진 리리라는 여자를 찾아 헤맸다. 이제 비에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이 아펠리테도 멸망하여 남은 가문은 4개뿐. 비에탄을 멸망시킨 앙겔로스의 사람들은 이미 죽었고, 가문은 대물림되었다.
목표 하나를 잃은 채 세상을 떠돌던 레이안은 솜니아로 돌아왔다. 이제는 모습을 가리지 않아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살아오는 동안 레이안은 리리가 남겼던 돈을 기반으로 용병단을 만들고, 공적을 세워 황제의 개가 되었다. 언젠가 가문의 재건을 하기 위해서는 제 세력이 필요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내리는 임무를 수행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레이안은 솜니아 한복판에서 한 레이디를 마주쳤다. 리리. 리리였다. 수수한 과거의 차림새와 달리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레이안이 앞을 막아서고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그를 한 번 보고는 그대로 지나쳤다.
언제 그녀가 과거로 갔는지 모르니 접근할 수가 없었다. 레이안은 그저 관찰만 하며 주변을 맴돌았다. 리리, 아니 엘로디 페르디아는 언제나 웃고 있던 전과 달리 늘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불행해 보였다. 레이안은 엘로디에 대해 뒷조사했고, 페르디아 가문의 사생아라는 정보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안이 황제의 명으로 잠시 솜니아를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였다. 엘로디의 관찰을 맡았던 수하가 보고했다.
엘로디가 죽었다고. *** 생의 목표를 잃었다. 레이안은 엘로디의 무덤 앞에 섰다. 세찬 비가 무정하게도 쏟아졌다.
다른 사람이었을까. 리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염없이 그곳에 서 있을 때였다. 뒤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엘로디와 놀랍도록 닮은 어느 여성이었다.
그는 레이안을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보았다.
여자는 덤덤하게 대답하며 리리의 무덤 위로 꽃 한 송이를 올렸다.
“모두 이 세계를 위한 일이었어요. 이번에도 결국 어느 것도 지켜 내지 못했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레이안은 잠자코 들었다.
“이 세계는 머지않아 멸망할 거예요. 나는 이 세계를 버리려고 해요.”
“시간을 돌릴 겁니다. 그리고 내 아이의 영혼을 다른 차원으로 보낼 거예요. 이르칼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이 아이가 언젠가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오려면 누군가 데리고 와야 할 텐데, 그 역할을 당신에게 부탁해도 될까요?”
그녀는 레이안에게 교만의 봉인석을 건네었다. 그는 그 봉인석을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리리가 자신을 떠날 때 사용했던 봉인석이었다.
“죄악에게 속지 마세요. 봉인석의 소유자는 죄악의 힘을 일부지만 대가 없이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여자는 레이안에게 몇 가지 당부를 남겼다.
“내 아이를 찾는 일이 쉽지 않을 거예요. 이 드넓은 우주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차원이 존재하고, 그중 한 곳에 내 아이가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할 수 있었다. 리리가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개처럼 기라고 해도, 오물을 핥으라고 해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레이안은 교만의 봉인석을 으스러지듯 쥐었다.
“나는 시간을 돌려 새로운 세계에서 아이를 위한 안배를 해 놓을 거예요. 그 아이는 이 세계를 구원할 구원자거든요.”
“나는 이슈타르의 사서.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답니다.”
그녀는 웃으며 제게 인사했다.
*** 레이안은 시공간과 차원을 떠돌았다. 모든 것은 엘로디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수없이 많은 문명을 맞닥뜨리고, 그곳을 헤매었으나 원하던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어느 차원에서는 엘로디의 친모가 실패한 세계를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어김없이 엘로디는 죽었다. 레이안은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다른 차원. 다시 또 다른 차원. 억겁의 방랑 끝에 비로소 레이안은 도달했다. 대한민국, 서울.
그녀의 영혼이 있는 곳으로.

92화. 동맹을 맺자
6–7 minutes

레이안은 눈을 내리깐 채 읊조리듯 덤덤하게 말했다.
“……그 차원에서 당신을 찾은 후 이곳까지 데려왔습니다.”
레이안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나를 충격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지금까지 줄곧 내가 믿어 왔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이야기였으니까. 삶이 전복되는 듯한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원작이라고 믿었던 게 시간을 돌리기 전의 세계의 내용일까? 그런데 왜 나는 이전의 세계를 활자로 기억하고 있는 거야? 혼란스러웠다. 나는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이미 머릿속이 과부하라 레이안이 무슨 말을 더 해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었다. 사실 전생, 즉 윤가을로서의 기억은 흐릿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내 나이가 19살이니 전생은 19년 전의 기억인 셈이었다. 그래서 떠올릴 수 있는 건 인상적인, 굵직한 사건들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윤가을의 삶은 고단했기 때문에 곱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그 기억 속에서 레이안을 만난 기억은 없었다. 짚고 가야 할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정리해 보자면, 먼 과거의 레이안은 시공을 뛰어넘어 온 나를 만났다. 그런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 불사의 몸을 가졌고, 내 친모를 만나 차원을 헤맨 끝에 내 영혼을 발견하여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고. 모든 사정을 알고 나니 레이안을 처음 만났을 때, 어째서 그토록 절박하게 나를 끌어안았던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던 이유도. 한순간에 가족이 죽고 가문이 몰락하고 홀로 남은 레이안이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버텼을지 내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기만이다. 그런 자신의 앞에 나타나 대가 없이 보살펴 준 사람을 레이안은 구원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레이안의 이야기 속 ‘리리’라는 사람을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레이안이 만났을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내가 아닌데. 그러니 그의 조건 없는 헌신의 이유가 내가 ‘리리’라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의아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레이안. 내 친모가 너한테 본인이 ‘이슈타르의 사서’라고 말했다고?”
문득 세베레스 저택에서 친부의 기억을 보았던 때가 떠올랐다. 엄마는 눈을 감는 친부에게 그렇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줘요, 리하르트. 우리의 아이가 당신을 구할 테니까.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그때 엄마가 친부에게 한 말은 레이안이 엄마에게 들었던 말과 맥락이 같았다.
“나는 시간을 돌려 새로운 세계에서 아이를 위한 안배를 해 놓을 거예요. 그 아이는 이 세계를 구원할 구원자거든요.”
“나는 이슈타르의 사서.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답니다.”
공통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일까. 첫 번째, 엄마는 미래를 볼 수 있고. 두 번째, 내가 세계든 친부든 무언가를 구할 존재라는 것.
‘친부를 구하는 것까지는 이해가 돼. 그런데 세계는 뭐야?’
하필 이슈타르의 신관들이 나를 구원자라고 칭하던 게 떠올라 찝찝해졌다. 그냥 독립해서 편안한 여생을 살고자 했던 내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가는 것 같은 건 단순한 착각일까……?
사서. 어쩌면 내가 이 세계를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의문이 풀리는 것 같다가도 다시 궁금증이 생겨났다. 이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엄마.
나는 줄곧 엄마가 나를 페르디아에 맡기고는 훌쩍 떠났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안이라면 뭔가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저도 모릅니다. 이후로 조사했지만 알아낸 것이 없습니다.”
두 손으로 턱을 괸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상체를 벌떡 세우고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고함이라도 외치지 않고서는 답답해서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내가 생각을 정리하기를 잠자코 기다리던 레이안이 물었다.
안 괜찮다니 할 말이 없는지 레이안이 외마디 탄성과 함께 다시금 침묵했다. 나는 그런 레이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남부러울 것 없는 대귀족의 후계자로 자라다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혼자가 되어 버린 레이안을. 기약 없이 차원을 떠돌며 나를 찾아 헤맨 건, 외로운 만큼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기 때문일까. 어린 나이에 생존을 위해 검을 휘둘렀을, 그리고 보살핌받았던 기억에 그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살아온 레이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이 먹먹했다. 그런데 레이안은 자신이 아닌 나를 걱정했다. 전생의 기억만 가지고 있는 나와 모든 것을 기억하는 레이안을 비교하면, 누가 더 괴로울지 답이 나오는데도.
그럼 좀 더 빨리 레이안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었잖아.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도 레이안이 왜 내게 쉬이 털어놓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이안은 나와 생각이 다른 듯했다. 시선을 내리깐 레이안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제나 당신을 구하지 못해서……. 그걸 내 입으로 인정한다는 게 괴로웠습니다.”
나는 레이안의 생각을 바꾸는 걸 포기했다. 내가 아무리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이미 굳어 버린 레이안의 죄책감을 씻어 내릴 수는 없다. 대신,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내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평온한 내 노후뿐이다. 내가 레이안이 찾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우리의 목표가 같다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은 ‘윤가을’의 기억이야. 그리고 시간을 돌리기 전의 기억을 책 속의 내용이라고 알고 있었고.”
“레이안 너는 앙겔로스에게 복수해야 하고, 나는 아빠를 깨우고 또 살아남아야 해. 어차피 앙겔로스 공작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레이안은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잖아?”
레이안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들이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예상대로 레이안은 ‘내 죽음’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결론이 나왔다.
“그래. 동맹. 결국 우리의 목표는 같으니까, 그편이 좋을 것 같아.”
호위와 고용주의 관계가 아닌, 대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로 서로를 돕는 것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레이안은 당연히 내 제안을 승낙했다. 나는 내친김에 그동안 신경 쓰였던 부분을 짚었다.
“당연하지. 거리감 느껴지잖아. 내가 레이안 님이라고 부르면 좋겠어?”
그러자 레이안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싫은 모양이었다.
“편하게 불러도 좋아. 엘로디라고 불러도 되고, 리리라고 부르는 게 편하면 그렇게 해도 되고.”
“그런데 말은 왜 높이는 거야? 처음 만났을 때는 안 그랬다며.”
도대체 차원을 헤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성격이 저렇게 삭막하게 굳어 버린 걸까. 레이안의 이야기 속 어린 레이안은 까칠하고 귀여운 아이인 것 같던데. 그러다 문득,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럼 레이안 몇 살이야? 조상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레이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응, 나이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 나는 싸해진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챙겨 온 상자 하나를 얼른 레이안에게 내밀었다.
레이안이 머뭇거리며 고급스러운 상자를 열자 딸칵, 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드러났다. 그것은 마탑주 이시스가 유일한 투자자인 나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한 쌍의 통신 마도구 중 하나였다. 순도 높은 마석으로 만든 이 통신 마도구는 통신 가능 거리가 짧은 다른 마도구와 달리 거리가 멀어도 통신할 수 있었다. 외국까지는 안 되겠지만 윌렌티아 제국 내에서는 대부분 터질 거라고 들었다.
어디에 있든 연락해야 할 사람 1순위라고 하면 역시 레이안이었다. 내 호위이기도 했고, 이번처럼 레이안이 오랫동안 부재했을 때 연락할 수단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뜻밖의 질문에 나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뭐가 알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이렇게 일단락된 듯했다. 레이안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을 뿐인데, 어쩐지 진이 빠졌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무엇보다 레이안이 왜 이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굴었는지 알게 되니 속이 시원했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지만, 오늘은 더 고민하지 말아야지.
[어쩐지 기분 나쁘다 했어. 저놈이 나를 봉인한 놈의 혈족이었다니……!]
탐욕은 언어의 경제성을 추구하는 콘셉트도 벗어던지며 중얼거렸다. 레이안이 비에탄의 후계자라는 게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나는 웃으며 레이안에게 인사했다.
잠깐 머뭇거리던 레이안이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 엘로디가 돌아가고 난 후에도 레이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무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물건은 엘로디가 그에게 준 통신 마도구였다. 받은 게 너무나도 많은데, 이번 생의 엘로디에게 또 받아 버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앉아 있던 레이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마리오를 호출하는 것이었다.
“저 왔습니다! 오, 통신 마도구! 리리 아가씨가 단장님께도 주셨습니까?”
“저랑 사고뭉치 세 놈들에게 주셨습니다. 리리 아가씨, 천사!”
레이안이 표정을 굳히며 마리오에게 명령했다.
단장의 기막힌 권력남용에 마리오가 기겁하며 반항했다.
“이를 겁니다! 다 고자질할 거라고요! 리리 아가씨한테 다!”
레이안은 생각했다. 엘로디는 이번 생의 자신밖에 겪지 못했다. 처음 만났던 이전 생의 성격 더럽고 까칠했던 그를 몰랐다. 모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행여 마도구를 압수당할까 봐 무서워진 마리오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보존 마법, 도난 방지 마법, 추적 마법. 다른 마법도 필요하면 더.”
마법사를 고용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특히 레이안이 열거한 마법을 전부 걸려면 웬만한 금액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심상치 않은 마법 목록에 마리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라도 엘로디가 준 소중한 선물을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93화.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5–7 minutes

마리오는 소리 없이 감탄했다. 이미 그 자체가 마법인 마도구인데 거기에 다른 마법을 덧입히는 건 엄청난 고난도의 작업이었다. 마탑주, 혹은 그 아래 급의 실력을 갖춘 마법사를 고용해야 할 텐데 보통 보수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소위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그 미친 짓을 그의 상사가 하고 있었다.
‘저 돌아 버린 집착을 리리 아가씨가 알아야 할 텐데!’
하지만 목숨은 하나니까 말을 아끼기로 했다. 보아하니 단장은 아가씨를 상대로 내숭을 떨고 있는 듯했으니까.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멀쩡히 땅을 밟지 못할 수도 있었다.
엘로디와 관련한 일에 눈이 뒤집히는 상사를 보는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겪을 때마다 머쓱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단장의 ‘빨리’는 ‘오늘 내로’라는 의미였다. 마리오가 문가로 향하던 때, 레이안이 그를 불러세웠다.
“뭔가 꾸미고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런데 워낙 은밀하게 활동하는 자들이니 구체적으로 뭘 하는지는 알아낼 수 없다는 게 문제죠.”
마리오가 그의 밑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레이안은 이르칼라 교단에 대해 꾸준히 추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워낙 베일에 싸인 집단이라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았다. 이르칼라의 신도들은 대륙 곳곳 다양한 계층에 존재했다. 뒷골목의 걸인부터,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귀족가까지. 하지만 세계를 도탄에 빠트려 지상을 손에 넣는다는 신을 추종하는 세력이니만큼 자신이 이르칼라의 신도라는 것을 드러내는 자는 없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면서 분명 제가 가지고 있어야 할 교만의 봉인석이 사라졌다. 이대로 잃는 것도,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는 것도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레이안은 미간을 좁히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대체 누굴까. 네가 그토록 숨기고 싶은 존재가. 신의 눈 밖을 벗어나는 존재라니, 흥미롭구나.]
레이안은 문득 이르칼라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아직 신은 엘로디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아르셀리아가 제 아이에게 걸었던 봉인은 고작 반만 깨어졌을 뿐이니.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그가 숨기고 있는 존재를 찾기 위해 이르칼라는 지상을 들쑤실 것이다. 이르칼라의 야욕을 저지하고, 그녀를 지하의 왕좌로 돌려보낼 수 있는 건 엘로디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권능을 갖추지 못한 엘로디가 과연 신을 상대할 수 있을까. 레이안은 고민하던 것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걱정해. 엘로디 페르디아인데. 그 웃음을 보고 겁에 질린 마리오가 허겁지겁 뒷걸음질을 쳤다.
마리오는 진저리쳤다. 웃는 단장은 너무 무섭다고! *** 초목이 우거진 숲속.
카를로트의 명령에 행군하던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그들은 가주인 페르디아 공작의 명으로 남서쪽의 이형 마수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마수 토벌대였다. 솜니아에서 출발한 이후 그들은 제법 오랫동안 마수를 처치해 왔다. 페르디아 공작의 말대로 마수 도감에 기록되지 않은 이형의 마수들이 다수 출몰했다. 개중에는 카를로트의 권능으로 해치워야 할 정도로 대형종의 마수도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들의 출몰과 발생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성가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카를로트도 근처 아무 돌 위에 앉았다. 수통을 꺼내 물을 마시려는데, 빌어먹게도 한두 방울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누군가가 카를로트에게 수통을 들고 있는 손을 불쑥 내밀었다. 손의 주인은 페르디아의 방계이자 카를로트의 검술 동기인 티모테오 발터였다.
카를로트는 짧게 감사를 표한 후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티모테오는 그런 카를로트를 유심히 지켜보다 수통을 내려놓기 무섭게 손을 내밀었다.
뺀질거리며 웃는 모습에 카를로트가 질린다는 듯 인상을 썼다.
“이번엔 그냥 호의로 주는 줄 알았더니, 하다 하다 이제 물값도 받으려고?”
“당연하지. 페르디아의 도련님인 너와 달리 일개 방계 가문의 막내인 나는 살길을 모색해야 한답니다?”
어이없다는 듯 보면서도 카를로트는 품속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티모테오 방향으로 튕겼다. 어이쿠, 하며 티모테오가 얼른 돈을 낚아채어 소중히 챙겼다. 카를로트는 페르디아의 직계로서 이번 토벌대의 지휘관을 맡았지만 권위적인 성격이 아니라 분위기는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늘 그렇듯 카를로트는 조금 전까지 마수와 난전을 치렀던 기사들이 경우 없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묵과해 주었다. 상관이 페르디아 공작이나 얀시 페르디아였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나머지 기사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는 사이에도 카를로트는 멍하게 생각에 잠긴 채였다. 카를로트와 침착함이라.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티모테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냐, 카를 도련님?”
카를로트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처음이라 티모테오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를로트는 두 손으로 턱을 괸 후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페르디아의 방계인 티모테오는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직계들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성격 포악한 페르디아 가문의 아가씨 엘로디 페르디아는 공작의 사생아라 가족들과 섞이지 못한다. 카를로트는 엘로디를 누이 취급도 하지 않고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운다는 게 티모테오가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늘 마수 토벌로 임무를 나갔기 때문에 최근 페르디아의 분위기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티모테오는 고개를 갸웃하며 한마디했다.
“안 그래도 저번 마을에 들렀을 때, 신문에 네 누님 기사 실렸더라.”
멍하던 카를로트의 눈빛이 돌변하더니, 티모테오는 순식간에 멱살을 붙잡혔다.
“뭐? 너 이 자식 그걸 혼자만 봤다고? 쓰레기 자식!”
난데없이 쓰레기가 되어 버린 티모테오가 기막히다는 듯 외쳤다.
카를로트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그것도 잠시, 그는 티모테오의 멱살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퍽! 카를로트가 괜스레 주먹으로 티모테오의 어깨를 갈겼다. 난데없이 얻어맞은 티모테오는 울상을 지으며 어깨를 문질렀다.
카를로트는 티모테오의 치료비 청구를 싹 무시하며 물었다.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팜므파탈이라니. 이보다 안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까.
카를로트가 마음속으로 당사자가 알면 기겁할 주접을 떠는 사이 티모테오가 기사 내용을 읊어 주었다.
“1황자를 뻥 차 버리신 후에 2황자의 적극적 구애를 받고 계신단다.”
카를로트는 혼돈에 휩싸였다. 1황자와 파혼한 건 알고 있었는데, 2황자는 또 뭐란 말인가. 주제도 모르는 한량 놈팡이 2황자라니.
“기사 보니까 얼마 전에는 2황자랑 데이트도 했다고 그러던데?”
이 동생은 반대다!
위기감을 느낀 카를로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꿀 같은 휴식을 즐기고 있던 기사들이 원성을 높였으나 카를로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어떻게든 임무를 끝내고 수도로 돌아가야만 했다. 정말, 혹시나, 그러면 안 되겠지만, 만약에 누님이 2황자와 약혼하겠다고 나서기라도 하면…….
싸악. 카를로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게으름피우는 기사들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카를로트는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숲 깊은 곳에는 어김없이 이형의 마수가 출몰했고, 그들은 너끈히 해치웠다. 며칠이 지났다. 더 깊은 곳,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험준한 산맥 어딘가에 도달한 토벌대는 드디어 보고할 만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균열. 허공을 쭉 찢어서 억지로 벌려 놓은 것 같은 균열 속에서 마수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중 이형의 마수는 없었지만 혹시라도 사람들의 마을에 가면 한순간에 초토화할 정도의 강력한 마수가 더러 있었다. 찾고 있던 이형 마수의 발생 원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보고할 만한 성과였다. 티모테오가 발검하며 말했다.
하지만 조건이 붙었다.

끼애액! 토벌대의 존재를 알아차린 마수들이 일제히 공격을 퍼부어 대었다. 일대에 격돌이 일었다. *** 오늘도 어김없이 도착했다. 화려한 꽃다발과 서신 한 통이. 킁킁. 탐욕이 꽃향기를 맡으며 한마디했다.
[역시 인기 많음. 그런데 난 이 꽃 싫음. 냄새가 별로임.]
“이런 인기는 필요 없어. 그리고 아무도 네 꽃 취향 궁금해하지 않아.”
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괜히 옆에서 알짱거리는 탐욕을 무시하고 꽃다발과 함께 온 서신을 들었다.
발신인은 벨트란 로크 윌렌트. 2황자 놈이었다. 벨트란은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꽃다발이나 선물을 보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서신을 읽는 정성까지는 들였지만, 이제는 펼쳐 보지도 않았다.
종이와 꽃은 잘못이 없는데 벨트란이 보냈다는 이유로 나의 멸시를 받고 말았다.
“꽃은 갖고 싶은 사람 가져가라고 하고, 서신은…….”
흘끔. 벽난로를 본 나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혹시라도 이 광경을 집사에게 들킨다면 잔소리로 끝나지 않을 테지만, 지금 나는 혼자니까! 나는 활활 기세 좋게 불타오르는 벽난로에 서신을 던져 넣었다.
제 소임을 다한 종이를 향해 격려해 준 후 몸을 돌렸을 때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얀시와 눈이 마주쳤다.
완전범죄의 꿈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단다. 건국제 파트너 말이야…….”
건국제의 파트너라. 지금까지 건국제는 1황자 아덴미르와 함께 참석했다. 어찌 되었든 약혼한 관계였으니까. 물론 참석만 함께 했을 뿐 그 이후로는 각자 볼일을 봤었다. 하지만 올해는 약혼자가 없으니 다른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얀시가 다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구해 준다는 말일까? 나는 혹시라도 얀시가 헛고생하지 않도록 얼른 대답했다.
“파트너 이미 구했으니까 따로 안 구해 주셔도 돼요.”
그러자 얀시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어쩐지 스산함이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까……?
94화. 카를 도련님께서 위독하십니다!
5–6 minutes
눈앞의 속 모를 인간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무서웠지만, 일단 대답했다.
사실 아직 레이안에게 파트너를 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허락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게다가 얀시가 무슨 짓을 벌인다고 해도 레이안은 강하니까 괜찮을 것이다. 회귀자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아!
혹시라도 얀시가 레이안을 오해할까 봐 나는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했다.
그런데 왜일까.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주위 온도가 낮아지는 것 같은데.
레이안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인 것 같다. 나는 얼른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 용건은 통신 마도구 통해서 해도 되었을 텐데요.”
그러라고 내가 투자해서 팔아먹은 회심의 역작이었다.
“물론 그러면 편하긴 하겠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아서.”
설마 이 인간, 아날로그 감성을 추구하는 건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얀시가 사르르 눈을 접으며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저렇게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저런 느끼한 대사를 잘만 치는 걸까? 저 엄청난 연기력을 한 수 배우고 싶었다.
“물론 목소리 듣고 싶으면 연락하려고 했어. 기왕이면 리리 네가 본 저택으로 들어오면 좋겠는데, 그건 어렵겠지?”
나를 가까이 두고 경계하고 관찰하려는 목적인가?
나는 습관성 철벽을 치며 얀시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자 순간 얀시의 표정이 굳었다.
아차 하는 마음으로 수습하려고 했지만, 얀시가 더 빨랐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다감한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으로 내 뺨을 콕 찌른 얀시가 담백하게 물러났다.
뒤돌아 걸어가는 얀시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미간을 좁혔다.

*** 내가 사용하는 통신 마도구는 두 개였다. 하나는 마탑주 이시스가 내게 선물한 특수한 마도구이고, 또 하나는 아덴미르에게 선물로 받은 일반 마도구였다. 특별한 마도구는 들고 있는 걸 내보였다간 ‘내가 바로 리리 아르셀이요’ 하고 광고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라 사실 이시스와 레이안 전용 마도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의 연락은 아덴미르가 선물해 준 마도구를 통해서 받고 있었다. 각각의 마도구마다 고유 번호가 있어 그 번호를 알고 있으면 연락할 수 있는 형식이었다. 전생에서 쓰던 휴대전화 느낌을 낸 걸로, 내가 이시스에게 제시한 아이디어였다. 나는 특별한 마도구를 꺼내 레이안에게 연결했다. 그런데 공명음이 1초도 울리지 않았는데, 곧바로 연결되었다.
이렇게 빨리 받을 줄이야. 마침 마도구를 사용하고 있거나 했던 모양이었다.
“용건부터 말하자면, 건국제 때 파트너로 참석해 줄 수 있어?”
이렇게 짧고도 강력한 승낙이라니,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레이안이라면 당연히 내 부탁을 들어줄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
통신을 종료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레이안이 나를 불렀기 때문에.
레이안은 어쩐지 뜸을 들였다. 쉽게 하기 힘든 말인가 싶어 잠자코 기다리는데, 갑자기 다른 마도구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공명 중인 일반 마도구를 연결했다. 그러자 곧바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마도구를 선물한 장본인, 아덴미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덴미르가 통신 마도구를 통해서 연락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귀찮긴 하지만 만날 일만 없다면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집사가 안 보는 사이 몰래몰래 서신을 태워 버리니 답장을 보낼 필요도 없고.
‘황제 폐하가 나더러 2황자가 날뛰거든 무시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무려 황제의 허락을 받은 무시라 이거다.
[그대라면 곤란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얕봤군.]
아덴미르와의 대화가 계속 이어질 그때였다.
줄곧 조용하던 레이안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그와 동시에 아덴미르의 목소리도 뚝 끊겼다. 뜻밖의 상황에 일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건 아덴미르였다.
그는 레이안도 마찬가지로 마도구를 통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덴미르는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통신을 끊었다. 곧바로 특수 마도구에서 레이안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냐. 1황자가 레이안이 내 호위인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같이 있다고 생각했겠지, 뭐. 대수롭지 않게 넘긴 나는 다시 레이안과의 대화로 돌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왜 불렀어? 또 아까 하려던 이야기는 뭐고?”
통신이 끊겼나 싶어 마도구를 보았지만 여전히 공명하고 있었다. 잠시 후 레이안이 대답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궁금했는데, 잊었다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레이안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에 의심이 피어올랐다. 혹시 자의식 과잉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 이거 설마…….
*** 정기적으로 하는 일 중 하나인 황제의 해독제 만들기를 해치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을 때였다.
제법 오랜만에 페르디아 공작 부인이 별채를 찾았다. 나는 행여나 들킬세라 후다닥 독을 숨겼다. 잠시 후 부인이 침실 안에 들어섰다.
“네? 답장하지 않으면 페르디아의 위신이……. 부인께서는 답신을 안 보내세요?”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얀시를 제외한 페르디아의 그 누구도 초대장에 일일이 답장을 보낼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페르디아가 친절한 것도 우습다. 다른 가문 일원에게는 말해 봤자 통하지 않으니 만만한 나를 이용한 듯했다.
나를 속인 집사를 떠올리며 분을 삭이다가 공작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해독제를 만들긴 해야 하는데 급한 건 아니었다. 다른 일정도 딱히 없는 한가한 날이기도 했다. 부인이 잘됐다는 듯 고혹적으로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럼 건국제에 입고 갈 드레스를 가봉하러 가겠니? 홀로 가기 적적하구나.”
탐욕이 있긴 하지만, 놈은 손님이 오건 말건 내 침대에서 신나게 자는 중이었다. 공작 부인이 나와 함께 외출하자고 말하다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부인이 나를 데리고 온 곳은 트와네트 거리의 라베루시크 의상실이었다. 사치스러울 때의 나의 단골 의상실이기도 한 라베루시크 의상실은 드레스 하나 가격이 만만찮을뿐더러 예약을 잡는 것도 힘들 만큼 인기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의상실에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오늘 하루 빌렸단다. 괜히 다른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면 거추장스럽잖니?”
역시 나는 한 수 아래다. 의상실을 통째로 빌릴 생각까지는 못 했는데.
역시 공작 부인은 배울 점이 많은 훌륭한 어른이다. 그때까지의 나는 제법 신났던 것도 같았다. 몇 시간 후의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몇 번째인지 모를 시착용 드레스를 갈아입은 나는 부인의 표정을 살폈다.
“이 색이 엘로디 네 이목구비를 죽이는구나. 화사하면서도 너무 붕 뜨지 않고, 분위기 있는 색감이 좋겠는데.”
그랬다. 나는 의상실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공작 부인과 마담 라베루시크의 마네킹이 되어!
“네, 부인. 이런 분위기는 어떠신가요? 가장 최근에 스케치한 시안입니다.”
“아아, 그 부분은 수정할 수 있습니다. 아가씨의 가녀린 목선을 드러내려면 이 부분을 이렇게 하는 게 좋지 않을지.”
내 건국제 드레스가 뭐라고, 마담과 부인이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탐욕이라도 함께 왔으면 수다라도 떨 수 있었으련만, 녀석은 아직 침대 위에서 신나게 자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드디어 칭찬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어머니라고 부르는 암묵적인 규칙에 따라 다소 어색하게 부인을 불렀다. 부인은 만족스러운 듯 나를 보더니 부채를 접었다.
순간 할 말을 잃은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오늘의 외출은 순전히 내 드레스를 맞추기 위함이었단 말일까?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종이 인형처럼 팔랑거리며 공작 부인의 뒤를 따라가던 그때, 페르디아 저택의 풋맨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풋맨이 헐떡이며 외쳤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소식이었다.

95화. 난 네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
5–7 minutes
나와 공작 부인은 곧바로 페르디아 수도 저택으로 귀환했다. 그런 우리를 맞이한 것은-.
고통에 신음하며 몸부림치는 카를로트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카를로트의 사지는 침대 기둥에 묶여 결박당해 있었다. 카를로트의 침실에는 페르디아 공작과 얀시, 그리고 의원과 페르디아의 방계인 티모테오가 있었다.
공작 부인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티모테오였다.
“대형 마수종에게 당하셨습니다. 마수 도감에는 기록되지 않은 종이었습니다.”
냉정한 눈으로 카를로트를 훑어본 부인이 다시 물었다.
티모테오는 설명을 덧붙였다. 처리했다고 생각했던 마수가 목숨을 잃기 직전 갑자기 독을 발산하였다고. 그 바람에 선두에서 전투하던 카를로트와 근처에 있던 페르디아의 기사 둘이 독에 당했다고 했다. 의원이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발작이 심해 우선 결박해 둔 상태입니다. 독성이 빠르게 퍼져 속히 손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이성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계시지만, 언제 권능이 폭주할지 모릅니다.”
의원의 말마따나 카를로트의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혹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해 권능을 사용하게 되면 일대가 초토화된다. 지반 붕괴의 권능 가진 카를로트가 정말로 폭주하기라도 한다면 본 저택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내내 침묵을 지키던 페르디아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카를로트는 독 내성 훈련을 받은 아이인데, 자가 해독은 불가한가?”
“예, 각하. 한 번도 노출된 적 없는 독이라 도련님께선 내성이 없으십니다.”
미간을 좁힌 페르디아 공작이 부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전 독제사입니다, 각하. 약제사가 아니라. 또한 어떤 약제사를 데려와도 처음 접한 독의 해독제를 만드는 건 쉽지 않아요. 최소 한 달은 걸릴 겁니다.”
“테미스 그대가 최근 고용했다는 약제사가 유능하다 하지 않았나.”
입술을 달싹거리던 부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이른 시일 내에 해독제를 만드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 ‘약제사’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공작 부인은 나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공작 부인은 줄곧 내가 있는 쪽은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마치 이번 사태에서 나를 배제하려는 것처럼.
‘혹시 부인의 시선에 내가 부담을 느낄까 봐 그러는 걸까.’
……내가 원치 않게 나서게 될까 봐? 누구보다 부인이 내게 해독하라 부탁하고 싶을 텐데, 어째서? 그때 의원이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의원이 말하는 결단. 그건 아주 잔인한 선택을 이르는 것이었다. 중독된 카를로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분명 폭주하게 된다. 그것을 막는 것이 가주의 의무였다. 폭주하기 전에, 제거하는 것……. 침실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카를로트가 온몸을 들썩이며 고통스러운 외침을 터트렸다. 그 와중에도 폭주하지 않으려 주먹을 얼마나 세게 쥐었던지 손바닥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카를로트 페르디아. 동생이지만 카를로트는 최근까지도 나를 미워하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나도 카를로트도 서로를 보면 깎아내리지 못해서 안달일 정도로. 최근에 카를로트가 내게 과하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만, 고작 그 시간만으로 오랜 시간 부정적으로 굳어진 관계가 회복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카를로트가 원망스러울지언정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어쨌든 한때는 우리가 가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비록 카를로트가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해도.
사태 파악은 끝났다. 결정을 내렸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카를로트 쪽으로 한 발짝 발걸음을 떼었다.
침실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향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 넷, 놀란 눈빛 하나. 들킬지도 모른다. 내가 페르디아의 핏줄이 아니라는 게. 정화를 독성 파괴라고 속인 건 너무나 허술한 변명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으면 카를로트가 죽는다.
얀시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내게 물었지만 나는 대답 대신 티모테오를 돌아보았다.
그 와중에도 피를 챙겨 온 것이 가상하다고 해야 할까. 나는 티모테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티모테오가 홀린 듯 내게 독이 든 병을 내밀었다.
얀시가 내게 묻기 전에, 내 행동이 더 빨랐다. 나는 마수의 독을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공작이 내 이름을 부르며 막으려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온몸이 불타는 것 같았다. 다리가 절로 꺾여 그대로 주저앉았다.
동식물에서 추출한, 인간이 만든 독이 아니라 마수의 독이라 그런지 지금까지 내가 먹었던 독과는 차원이 다른 격통이 노도처럼 덮쳤다. 쿨럭. 뭔가가 속에서 울컥하고 치받아 막았던 손을 떼어 내니 피가 흘렀다. 온몸이 미친 듯 떨리고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얀시와 페르디아 공작이 내게 빠르게 다가왔지만 나는 한 손을 들어 저지했다.
쿨럭. 입 안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그들은 내 말대로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나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고통스러워하는 카를로트를 보았다.
‘당장 카를로트만 살리려면 내 피를 먹이면 되겠지만, 기사 두 명도 독에 당했다고 했어.’
그들까지 살리려면 많은 양의 해독제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내 권능을 담을 매개체인 물이 필요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물이 있을 테이블 위를 보려는데, 누군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말하며 공작 부인이 내 앞에 물이 든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주전자 위에 얹었다. 이내 몸속의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공작 부인이라면 이게 뭔지 알 테니,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미처 끝낼 수가 없었다.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까무룩 기절했기 때문에.
아득해지는 음성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다.

*** 실베스터가 바닥에 쓰러지는 엘로디를 받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엘로디의 뺨을 쓸었지만, 그녀의 눈꺼풀은 굳게 닫힌 채였다. 얀시가 그 옆에 앉아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리다 말했다.
“아버지. 우선 억지로 토하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얀시가 애써 이성의 끈을 붙잡은 채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실베스터는 엘로디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내 실베스터가 입을 열었다.
“엘로디의 증상이 카를로트의 증상과 다른 것 같은데.”
그들이 엘로디의 상태를 면밀히 살피고 있을 때, 테미스는 카를로트를 살리기 위해 움직였다.
의원은 영문도 모른 채 주전자에 물을 따라 카를로트의 입에 흘려보냈다. 몸을 떨며 발작하는 바람에 대부분은 흘렸지만 일부는 분명 삼켰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발작하던 카를로트가 점점 진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 각하. 카를 도련님의 호흡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엘로디를 얀시에게 넘긴 실베스터가 다가와 카를로트의 상태를 살폈다. 의원의 말대로였다. 바로 전까지 발작하며 금방이라도 폭주할 것처럼 괴로워하던 카를로트의 신체의 모든 반응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의원은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뜸을 들이며 말했다. 실베스터의 시선이 탁자 위의 주전자로 향했다. 엘로디가 쓰러지기 직전에 찾았던 주전자였다. 실베스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버지. 리리도 그 물을 마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얀시의 물음에 테미스가 대신 대답했다.
“엘로디에게 먹여도 소용없단다. 중독된 게 아니니까.”
실베스터가 테미스를 돌아보았다.
실베스터의 시선이 엘로디의 얼굴에 닿았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괴로운지 인상을 잔뜩 찡그린 표정이었다.
“엘로디가 말하길 독성을 파괴하는 권능이라더군요. 그 권능으로 어떤 독이든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럼 가문에 새로 들어왔다는 약제사가 엘로디인 것인가?”
“그건 추후 아이가 깨어나면 직접 물어보는 게 좋겠네요.”
권능이야 스스로 밝혔다지만 약제사의 정체를 말하지 않겠다고 당사자인 엘로디와 약속한 바 있었으니 테미스는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비록 아무 의미가 없더라도. 담담하게 상황을 수습하면서도 테미스의 마음은 계속 불편했다.
“행여 또 독을 마신다면, 네 아버지에게 다 말할 거란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엘로디가 스스로 독을 마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아니, 정말로 막지 못한 것일까. 막지 ‘않은’ 게 아니고? 테미스 스스로도 제 마음의 답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엘로디를 외면하면서도 카를로트를 구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가 없었기에. ……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나쁜 어른인가. 이제 와서 늦었다고 할지언정 저가 버려진 줄 아는 아이의 올바른 부모가 되고 싶었는데. 테미스는 착잡하게 미소 지으며 해독제가 든 주전자를 티모테오에게 건넸다.
“티모테오. 이걸 들고 가 중독된 다른 기사들이 마시게 해라.”
티모테오가 주전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마수 독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페르디아 가문 사람들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얀시는 제 품에 안겨 기절한 엘로디를 내려다보았다. 엘로디와 접촉하면 안정감을 느끼는 게 권능 발현 때문이었나? 하지만 영 미심쩍었다. 독성을 파괴하는 권능이라고?
비슷하지만 달랐다. 살과 살이 맞닿았을 때 느껴지는 그 안온한 감각이 ‘파괴’ 속성의 권능일 리가 없었으니까. 얀시가 생각에 잠긴 사이 다가온 실베스터가 엘로디를 안아 올렸다.
얀시를 지나친 후 그는 카를로트의 침실을 나섰다.
실베스터는 식은땀을 흘리는 엘로디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말도 못 하던 아기가 어느새 성년을 코앞에 두었다. 감회가 새로움과 동시에 입맛이 썼다.
세베레스 가문의 정화 권능을 페르디아의 파괴 권능으로 속일 줄이야. 진실을 몰랐다면 그 자신도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앙큼한 따님이 아니신지.

96화. 온통 대파 천지
5–7 minutes

온몸이 조각나는 것만 같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칼날이 매섭게 할퀴고 지나가는 것처럼 찌릿한 고통이 쉴 새 없이 느껴졌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온몸이 중력을 열 배로 받는 듯 무거워지는 감각은 익숙했다. 평소보다 정도가 심하긴 하지만 권능을 사용하고 난 이후의 증상과 같았다.
‘마수 독도 정화할 수 있는 것 같네. 내가 좀 더 힘든 것만 빼면.’
대가가 제법 가혹하지만 권능의 사용 범위가 늘어나는 건 환영이었다. 쓸모가 많은 권능이라고 생각하며 상체를 일으킨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무시무시한 것을 마주했다.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침대 옆에서 페르디아 공작이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안절부절못하는 마사와 의원 옆에 얀시와 공작 부인도 함께였다. 환자인 카를로트를 두고 왜 다들 이곳에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별채의 내 침실과 가구 배치나 소품이 비슷해서 순간 내 침실인 줄 알았다. 그때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나를 빤히 쳐다보던 공작이 대뜸 물었다.
공작이 고개를 까딱이자 대기하고 있던 의원이 황급히 달려와 나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중독 증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몸속에서 독을 파괴하려는 권능 탓인지 통증이 심하신 듯합니다. 워낙 예민하고 심약하신 분이라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셔야 할 듯합니다.”
말만 길뿐이지 결국에는 아무 이상 없다는 진단이었다. 안정을 취하라는 말은 으레 의원들이 하는 말이니까. 그런데 그런 진단에도 페르디아 인간들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페르디아 공작의 매서운 눈길이 내게 향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해명했다.
“진짜 괜찮아요! 그냥 평소보다 조금 더 피곤한 정도예요.”
괜히 일이 커질까 봐 필사적으로 생글생글 웃었다. 이미 공작 부인에게 들키면서 한 번 곤란했던 경험이 있는 터라 이 소동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바람이 이루어지는 법은 없었다. 올 게 왔다. 페르디아 공작은 본격적으로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때 파혼 관련으로 아버지 심기를 어지럽히기도 했고, 자중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거짓말이다. 들키지만 않았다면 계속 밝히지 않을 작정이었다. 괜히 찔려 공작 부인을 보자 부인은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와의 거래에 대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황상 이미 많은 것을 들켰을 것이다.
-바로 이렇게. 괜히 부정해 봤자 설득력 없으니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
그건 또 어떻게 추측한 거지? 대답도 하지 않고 눈만 동그랗게 떴을 뿐인데, 공작은 알겠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공작 부인에게 권능 금지를 당했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전보다 더 몰래 써야 한다는 귀찮음이 생겼을 뿐. 황제의 해독제를 만들려면 어쨌든 권능을 사용해야 했다. 줄곧 조용하던 얀시가 부인에게 물었다.
얀시는 뭔가 생각이 많아 보였다.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가장 무서운 순간으로 꼽을 만한 게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흑막 캐릭터가 조용해지는 것이다. 폭풍전야라고나 할까.
나는 불안함을 애써 참으며 주변을 둘러보다 마사와 눈이 마주쳤다. 페르디아 인간들의 기에 눌려 울상만 짓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빨리 별채로 돌아가서 마사에게 내가 괜찮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나는 어쩐지 껄끄러운 기분으로 이불을 걷어 내며 공작에게 물었다.
어디라고요? 내가 쓰러지는 바람에 갑자기 꾸몄다기에는 여기저기 신경 쓴 부분이 보였다. 그러니까, 애초에 준비되어 있던 방이라는 소린데. 내가 미처 사태 파악을 끝내기도 전에 페르디아 공작이 입을 열었다.
“몸 상태를 지켜봐야 하니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라, 엘로디. 필요한 게 있으면 집사를 통해 말하면 바로 들어주마.”
제 할 말만 마친 공작이 침실을 훌쩍 떠났다. 힘껏 뻗은 내 손이 허망하기만 했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부인과 얀시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 엘로디 네 해독제 덕분에 상태가 호전되었단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밀 하나를 스스로 까발리면서 그래도 뭐라도 해냈으니까.
‘그래. 카를로트 페르디아가 쉽게 죽을 놈도 아니고.’
어쩌면 내 권능이 아니더라도 끝까지 이겨 냈을 수도 있지. 최근 정이 들었다고 죽지 않았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얼굴에 상냥한 미소를 띤 얀시가 설명을 덧붙였다.
“카를은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어, 리리. 아마 깨어나면 바로 여기로 달려오겠지?”
정말이지 귀찮을 것 같은 소리다. 카를로트가 그냥 잠이나 푹 잤으면. 사실 독을 먹고 기절했다가 막 깨어난 지금, 내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여러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니 머리가 더 심하게 지끈거렸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티가 났는지 나를 유심히 쳐다보던 공작 부인이 얀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얀시. 너는 올라가서 카를로트 상태를 지켜보는 게 좋겠다.”
얀시가 나를 흘긋 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부인은 마사와 의원까지 밖으로 내보냈다. 침실에 남은 건 부인과 나 단둘뿐이었다.
공작 부인의 뜬금없는 말에 순간 당황했다. 침대 옆으로 다가온 부인이 어두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권능을 사용하면 네게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알면서도 말리지 못했다.”
자조적으로 웃는 부인의 얼굴은 더없이 진심이었다. 하지만 나는 부인이 내게 사과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에요. 부인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카를을 살리기 위해 엘로디 너의 고통을 모른 척했는데도?”
부인의 말에는 모순이 있었다. 처음 카를로트가 독에 당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부인은 일부러 내 시선을 피했다.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듯. 그런데도 나서서 독을 마신 건 나였다. 누군가 말릴 새도 없었다. 정말 내 능력으로 제 아들을 살리기만을 바랐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독이 원인이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내게 해독제를 만들어 달라고 말했어야지. 하지만 부인은 그러지 않았다. 내가 과연 부인의 입장이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오히려 내가 끝까지 내 비밀을 지켜 주려 했던 부인에게 감사해야 했다.
“카를로트가 아니라 누구라도 저는 살렸을 거예요. 그러니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부디 부인이 죄책감을 품지 않기를 바라며 말했다. 나는 정말로 괜찮았으니까. 오히려 친아들인 카를로트를 살리는 것만 생각하지 않고, 나까지 고려했다는 점에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괜히 추한 꼴을 보일까 봐 고개를 푹 숙이는 순간, 부드러운 손이 내 뺨을 매만졌다.
어느새 침대가에 걸터앉은 부인이 고아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공작 부인과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 적이 별로 없어서인지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는 나로선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애써 괜찮은 척 웃어 보이자 내 속마음을 읽은 듯 부인은 나를 안쓰럽게 응시했다.
그 말에 하마터면 나답지 않게 응석을 부릴 뻔했다.
‘착각하지 마, 엘로디. 너는 페르디아의 이방인일 뿐이잖아. 일원이 될 수는 없어.’
언젠가는 페르디아의 성을 떼고 이곳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그러니까 공작 부인이 아무리 따뜻하게 대해 줘도, 그 마음을 받아선 안 된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부인이 손등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이 높구나. 독이 통하지 않으니 약도 소용없겠지.”
그 말에 선선히 누워 이불을 목 끝까지 덮었다. 다정하게 내 앞머리를 정리해 준 공작 부인이 옅게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부인은 아무 말 없이 침실을 나섰다. 늘 이름으로만 불러 왔던 부인이 나를 애칭으로 부를 줄은 몰랐다.
어쨌든 드디어 혼자다. 본 저택의 내 침실은 별채와 비슷하게 꾸며져 있어서 낯설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 탓인지 순식간에 긴장이 풀렸다. 그런데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데……. 너무 졸려서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저나 빨리 별채에 돌아가야 할 텐데, 어쩐담.
어쨌든 권능 건은 무사히 넘어간 것 같았다. 다행인 일이었다. *** 무사히 넘어갔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 죽어라. 안일했던 과거의 나 때문에 현재의 나는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의원이 그랬잖아. 무리하면 안 된다고. 내가 도와줄게.”
이건 대체 무슨 신종 고문이란 말인가. 나는 질색하며 스푼을 들고 있는 얀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구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메뉴는 또 왜 이렇단 말인가.
온통 대파 천지였다. 대파가 들어가지 않은 메뉴는 물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파는 건강에 좋잖아요! 제가 대파를 좋아해서 또 사 왔지 뭐예요?”
일전에 외박 사건 때 우라니아 집에서 대파를 좋아한다고 페르디아 공작에게 둘러대었던 이 대화가 원인인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대파는 그냥 식재료 중 하나일 뿐이란 말이다!’
흐흑. 하지만 그런 오해를 산 것도 다 내 업보니 그러려니 했다. 대파든 뭐든 먹어 치울 수 있지만, 부디 내 손으로 먹게 해 주면 좋으련만.
누가 다정하게 웃으며 스푼 내미는 저 얀시 페르디아 좀 기절시켜 주세요.

그런 내 간절한 바람이 닿은 걸까. 누군가 문을 두드리더니 이내 열린 문틈 사이로 뭔가 튀어 들어왔다.
97화. 연약한 우리 아가씨
6–7 minutes
나의 구세주, 아니, 구세죄악 탐욕이었다!
계약한 이후 처음으로 외출한 동안 데려가지 않고 자게 내버려 뒀는데, 하필 공교롭게도 생이별하게 되었다. 혼자 둔 게 서럽기라도 했는지 탐욕은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내 품에 머리를 비볐다.
사실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건 나만의 비밀로 하자. 어쨌든 부담스러운 얀시를 피해 나는 탐욕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리리. 음식에 털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그 여우는 내려놓고-.”
일부러 탐욕에게 정신이 팔린 척하며 건성으로 답하자 난감한 듯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얀시는 떠먹여 주겠다는 계획을 철회했다. 그가 식사를 다시 물리는 동안 내 품에 딱 달라붙은 탐욕이 내 귓가에 대고 서럽게 속삭였다.
[어, 어쨌든 나를 버렸음! 저 인간은 언제 감? 말하고 싶음! 답답함!]
하지만 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일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쓰러진 이후에 엄청난 과보호가 시작되었으니까. 너무 누워만 있었더니 답답해서 창문을 좀 열려고 하니까.
잘만 맞아 왔던 찬바람이 무슨 역병이라도 되는 양 나를 침대로 몰아냈고. 레이안과 이시스와 연락을 못 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별채에 가서 통신 마도구를 가져오려고 했다가.
“당분간은 본 저택에서 지내라는 각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페르디아 공작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구는 사용인들 탓에 실패하고 말았다. 창살 없는 감옥이 이런 것일까? 다음 날,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사용인들은 내가 침대 밖으로 나와서 뭘 하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안절부절못했다. 통신 마도구가 없어서 레이안과 이시스에게 서신이나 쓸 겸 책상에 앉아 깃펜을 들었을 때였다.
차 한 잔 마시기도 황송한, 숨 막히는 지극정성에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나는 뭐라도 하려는 의지가 꺾인 채 침대 위를 뒹굴거렸다.
딱 붙어서 수발드는 사용인들 탓에 탐욕도 흑여우 코스프레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본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치여 기를 펴지도 못하는 마사에게 은밀히 손짓했다.
“마사. 내 방에서 통신 마도구 좀 가지고 와 줄래?”
특수 통신 마도구의 존재를 아는 건 마사와 내가 리리 아르셀이라는 걸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혹시 특수 마도구를 가지고 있는 걸 보였다가 의심을 살지 모르니 일반 마도구를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침대의 망령이 되어 버린 나와 달리 자유로운 마사는 금세 일반 마도구를 들고 왔다. 사용인들의 주의가 다른 곳에 간 틈을 타 얼른 레이안에게 통신을 연결하려던 그때였다.
카를로트가 침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 뒤에는 얀시도 함께였다.
내 침대 옆에 무릎 꿇고 앉은 카를로트가 오열하며 침대를 쾅쾅 내리쳤다. 나약한 침대가 카를로트의 주먹질에 삐걱거렸다.
깨어나자마자 달려온 건지 카를로트의 머리에는 까치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얼굴 가득 눈물로 범벅된 모습이 참 가관이었다.
“하지만 누님이 나를 살리려고…… 마수 자식 독을……. 끄흡…….”
“그렇게 차갑게 말하지 않아도, 나 누님 진심 알아……. 흐흑, 허어엉…….”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머리가 아팠다.

원래도 귀찮았는데, 더 귀찮은 놈이 되어 버렸다.
허구한 날 울어 대다니. 동생을 돌보는 건지 애를 키우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다. 나는 침대 헤드에 걸어 둔, 아까 머리 말릴 때 썼던 수건을 대충 카를로트에게 건넸다.
그런데도 카를로트는 계속 훌쩍거리며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카를로트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얀시가 다소 단호하게 타일렀다.
그러자 카를로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하게 대꾸했다.
“형은 신경 꺼. 이건 누님이랑 나 둘만의 이야기라고.”
등지고 있는 카를로트는 볼 수 없겠지만, 나는 보고 말았다. 얀시의 웃음이 진해지는 것을! 맙소사.
형 말만큼은 잘 따르던 카를로트가 저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대답하다니. 하지만 눈치 보는 건 정작 제삼자인 나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를로트는 아양 떨 듯 침대에 고개를 기대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님.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그 뭐냐, 망할 퐁당 쇼콜라인가 뭔가 그거 사 올까? 어디서 팔았더라? 블랑 어쩌구였는데.”
“너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외출이야. 그냥 돌아가서 쉬어.”
카를로트가 또 촉촉해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부담스러운 눈길에 나는 질색하며 몸을 뒤로 뺐다. 나중에 해독제 또 만들어 주면 그때는 노예라도 되겠네.
“그런데 리리 누님. 권능 개화는 언제 한 거야? 독성을 파괴하는 권능? 대단해! 역시 누님은 최고야!”
권능이 없다고 무시하던 당사자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귀찮음이 극에 달한 나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아. 권능 대가가 고통이라고 했지……. 알았어…….”
카를로트는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비척비척 일어났다.
미련 없이 손을 흔들며 카를로트와 얀시를 내보내려던 그때, 누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대답 대신 얀시가 문을 열자 너머에 있는 것은 낯익은 기사 두 명이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가끔 마주친 적이 있었다. 두 기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송하다는 듯 냅다 무릎을 꿇었다.
쿵!! 무릎뼈가 아작나지는 않았을까 걱정될 정도로 엄청난 소리였다.
내가 당황하며 묻자 기사들이 냉큼 외쳤다.
이번에 카를로트와 함께 임무에 나갔다가 독에 당한 두 기사인 모양이었다. 기왕 해독할 거 1+2로 진행한 것뿐인데 이렇게 감사 인사를 받으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기사의 맹세라니, 그것만큼 부담스러운 게 또 있을까. 기사의 맹세란 기사들이 평생에 걸쳐 모실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아주 중요한 의식이었다. 대개 주군이나 마음에 품은 레이디에게 하는 게 일반적인데, 그걸 나한테 하겠다니. 이 가문에서 떠날 예정인 내게 맹세하는 건 창창한 기사들의 앞길을 망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들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조언했다.
“경들. 기사의 맹세는 더 신중하게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저희를 생각해 주시다니, 역시 엘로디 아가씨십니다!”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저러다 정말로 맹세해 버릴까 봐 두려운 가운데, 카를로트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카를로트가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선언했다.
또다시 밀려오는 두통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붙잡았다. *** 페르디아의 막내 아가씨는 사용인들 사이에서 요주의 인물이었다.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사생아 아가씨. 하지만 한 번 별채의 사용인들이 물갈이되고 난 이후로는 엘로디의 인성에 관한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오히려 까다롭지 않고 친절한 분이라는 소문이 돌며 평판이 좋아졌다. 그러나 페르디아 수도 저택에서 일한 지 오래된 사용인 비중이 높은 본 저택의 사람들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조금 착해졌다고 해서 본성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최근 엘로디에 대한 새로운 소문이 추가되었다.
“들었어? 이번에 엘로디 아가씨께서 카를로트 도련님 목숨을 구했대!”
“뭐? 엘로디 아가씨가 무슨 수로 도련님 목숨을 구해?”
“사실 페르디아의 약제사가 엘로디 아가씨라던데? 해독제 만든 게 아가씨래.”
“그렇겠네. 아가씨 몸 약한 거야 다들 아는 사실이잖아?”
“그렇지 않아도 같이 실려 왔던 기사 두 명도 기사의 맹세 할 거라고 난리던데?”
그렇게 엘로디에 대한 소문은 와전되어만 갔다. 권능에 관한 이야기는 새어나가지 않았지만, 약제사였다는 소문은 막을 수 없었다. 해독된 기사 두 명이 자신들을 구해 준 것이 엘로디라는 이야기를 듣고 의원을 캐물어 그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엘로디는 패악질을 부린 적이 없었고, 오히려 본 저택의 사용인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엘로디를 직접 모시는 별채의 사용인들과 달리 본 저택의 사용인들은 지금껏 엘로디를 마주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덕분에 엘로디에 대한 감정이 긍정적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몸이 약한데도 카를로트 도련님과 기사들을 살리기 위해 밤새도록 해독제를 만든 천사 같은 엘로디 아가씨! 연약한 아가씨께서 어서 낫도록 정성껏 간호하자! 이것이 바로 과보호의 배경이었다. 당사자는 모르는 소문은 그렇게 탄생했다. *** 오늘은 정기 만찬 일이 아닌데도, 페르디아의 일원은 식당에 모였다. 식사 겸 내 권능에 대해 회의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오늘도 식사 메뉴는 파투성이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카를로트가 씩씩거리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뭐야. 주방장 미쳤어? 온통 대파뿐이잖아? 이걸 사람 먹으라고 내놓은 거야?”
얀시의 말에 카를로트가 다시 식기를 들었다.
지조라고는 없는 놈……. 카를로트가 투쟁해서 대파를 보이콧해 주었으면 했던 내 바람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다소 울적하게 싱싱한 대파를 우적우적 씹었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부인이 내게 물었다.
카를로트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공작 부인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를 애칭으로 부르는 게 놀라운 모양이었다.
순조롭게 식사가 이어졌다. 대파 요리, 그리고 다음 대파가 들어간 요리를 해치우고 있을 때, 얀시가 운을 뗐다.
나는 순간 칼질하던 그대로 멈췄다.
곤란했다. 원칙적으로는 4대 가문 일원이 권능을 개화하게 되면 황성에 신고하는 게 맞았다. 그것이 의무이고 관례이고 전통이었으니까. 하지만 혹시라도 공표 과정에서 내 권능이 페르디아의 파괴 속성 권능이 아니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특히 황가의 권능 중에 닿으면 상대의 권능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검증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애초에 권능이 없었던 나는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했지만. 들킬 걸 각오하고 벌인 일이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되니 덜컥 겁이 났다. 지금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가 페르디아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공작은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잔을 들어 와인을 한 모금 삼킨 후 물었다.
“저는 이목이 쏠리는 게 싫어서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말했지만 페르디아 공작은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응?

99화. 이건 함정이다
6–7 minutes
윌렌티아 제국의 건국제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먼저 이슈타르 신전의 신관들의 주도하에 윌렌티아의 황족과 귀족들이 모여 백성들이 밀집한 야외 대광장에서 이슈타르 신에게 기도하는 제의를 치른다. 그 이후 수도 곳곳에서 축제가 펼쳐지고, 황성에서는 솜니아까지 올라온 제국 귀족들을 불러 모아 3일 동안 성대한 연회를 벌였다. 가장 중요한 국가 행사다 보니 화려하게 거행되곤 했다. 워낙 볼거리가 많고 유명해서 해외에서도 관광객이 찾아올 정도였다.
‘듣기로 과거에 전쟁 중에도 건국제는 절대 안 빼먹었다지.’
신이 부여해 준 권능으로 죄악을 물리치고 세운 국가이다 보니 건국제에 더 의미부여를 하는 듯했다. 황제도 결국 신의 선택을 받아 죄악을 물리친 영웅의 후예니까. 건국제의 모든 과정 중에 단연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은 이슈타르 신에게 기도하는 제의였다. 그 제단에 올라 기도를 주관하는 역할은 그중에서도 가장 영예로운 자리였다. 지금까지 내가 참석했던 건국제 제의의 제단 주관은 쭉 이슈타르 신전의 신관들이 번갈아 가며 맡았다. 긴 제국의 역사 속에서 전에는 현재는 사라진 아펠리테 가문의 후예들이 주관을 맡았다고 역사서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다. 아펠리테 가문은 특히 이슈타르 신과 가까이 소통하는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신관들이 나를 ‘구원자’라고 부르며 주관을 맡기려고 안달인 게 이해가 됐다.
4대 가문 소속으로서 참석한 나는 대광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상석에 자리했다. 그런 내 양옆으로는 호위로 참석한 레이안과, 자신이 진정한 호위라고 주장하는 카를로트가 있었다. 탐욕은 봉인석 속에 있었고. 나는 광장 가득 빽빽하게 모여 있는 백성들을 내려다보았다. 모두 오늘 제의를 관람하기 위해 모여든 이들이었다. 분명 탐욕에게 오늘은 대신관을 비롯한 이슈타르 신관들이 도처에 깔려 있을 테니 조용히 하라고 했건만, 탐욕은 그새를 못 참고 입을 열었다.
귀빈용 음식이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안 돼. 저번에 이슈타르 신전에서 너 말했을 때 대신관이 노려봤다고. 그러니까 조용히 해. 신전에 봉인 당하고 싶지 않으면.’
탐욕은 씩씩거리다가 금세 조용해졌다. 신전에 봉인 당하기는 싫은 듯했다. 겨우 탐욕을 조용히 시켰더니 이제는 카를로트가 문제였다.
“가까이 있어야 더 안전하게 호위하지. 리리 누님, 내가 지켜 줄게!”
네 몸 간수나 잘하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또 자기를 걱정해 주는 거냐며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켤 게 분명하니까. 그런데 그 못지않게 레이안도 내게 밀착해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혹시 모릅니다. 이르칼라 교단이나 앙겔로스 공작 측에서 수작을 부렸을지. 특히 이번처럼 사람이 많은 야외 광장에서 일이 벌어진다면, 난전이 펼쳐질 겁니다.”
과한 걱정인가 싶다가도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설마 황족에다 4대 가문 직계들까지 모두 모인 이곳에 습격하지는 않겠지.’
내가 레이안과 속닥거리자 카를로트가 팔짱을 끼며 아양 떨 듯 물었다.
카를로트는 삐친 듯 입술을 삐쭉이면서도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근처를 지나던 레이디 무리의 수다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한 일이지. 도로테아 양은 4대 가문 직계 중 유일한 여성이시잖아!”
“그런데, 음……. 원래 내정자가 다른 분이었다는 말이 돌던데.”
내 쪽을 흘긋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모른 척하지 않고 그들이 있는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중 낯익은 영애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윙크를 해 줬다.
레이디들은 지레 찔려서는 쏜살같이 달아났다.
탐욕이 말하기 무섭게 카를로트가 덧붙였다.
잘 통하네. 마치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카를로트는 탐욕이 무슨 말 하는지 들리지도 않을 텐데.
“그나저나, 저 여자들 뭘 안다고 눈깔을 야려? 리리 누님, 내가 혼쭐내고 올게!”
갑자기 급발진하며 레이디들이 사라진 곳으로 튀어갈 것처럼 구는 카를로트의 어깨를 꾹 눌러 도로 앉혔다.
카를로트는 그저 내가 제 어깨에 손을 올렸다는 사실에 기뻐 보였다. 이제는 나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 도로테아는 대광장 옆 신전에서 대기 중이었다. 주위에서 신관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도로테아의 단장을 도왔다. 도로테아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생기가 넘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뒤집혔던 피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매끄럽고 보드라웠다. 환영 마도구 같은 것을 쓸 필요 없이 완치되었다. 모두 스승인 게이브 제나이드가 가져다준 ‘약’ 덕이었다. 어떤 약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선택권이 없었던 도로테아로서는 미지의 액체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웬걸. 그 약을 마시기 무섭게 피부에 새살이 차오르고, 고름이 완전히 사라졌다. 더 놀라운 건 어릴 때 다쳐서 생겼던 옆구리의 오래된 흉터 같은 것들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약의 효과는 놀라웠다. 들이켜자마자 온몸에 활력이 돌고 예전보다 더 기운차게 생활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약에 대한 의존이 지나치게 강해진다는 것.
약을 먹지 않으면 도무지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니까.
도로테아의 중얼거림에 단장을 돕던 사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도로테아의 상냥한 웃음에 사제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단장을 시작했다. 아무리 엘로디 페르디아가 거절한 제단 주관을 자신이 맡았다고 해도, 추후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주관을 맡게 된 자신이 주인공이 될 것이다.
‘나는 4대 가문의 직계이고, 강한 권능을 가진 앙겔로스 가문의 후계자니까.’
권능도 개화하지 못한 누구와 달리. 대중 앞에 나서서 단 한 번 각인하는 것만으로 그간의 불명예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었다.
“다 되었어요, 자매님. 성의가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도로테아는 다정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자신을 사제가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활력이 도니 이미지 관리를 더 잘할 수 있게 되었다.
제의를 무사히 끝마치는 건 스승인 게이브가 요구했던 사항이기도 했다. 이윽고 도로테아가 밖으로 나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열화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 건국제의 서막을 알리는 이슈타르의 제의가 시작되었다. 외국에서 보러 올 정도로 화려한 행사라고 하지만 나는 딱히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매년 참석하는 행사였다.
이슈타르의 은총이 머무르고 있다는 증거로 대신관의 기도 소리와 함께 대광장을 가득 채운 신성의 빛무리가 장관이긴 했지만, 그 감흥도 잠깐이었다.
순간 내가 입 밖으로 낸 건가 싶을 정도로 마음의 소리를 대신해 준 것은 카를로트였다.
“근데 리리 누님. 1황자랑 2황자가 계속 누님 쳐다보는데?”
뒤를 힐끔 쳐다보는 카를로트의 뺨을 붙잡아 정면으로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나보다 더 상석에 앉아 있을 황자 놈들의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로 느껴지는 참이었다.
“그럼 진짜 2황자로 갈아탄 거야? 그 기사가 뻥이 아니었다고?!”
갑자기 카를로트가 펄쩍 뛰며 급발진하자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특히 엄숙한 행사에서 소란스럽게 굴자 이슈타르 신관들의 눈길이 곱지 않았다. 나는 망아지 같은 카를로트를 다시 진정시키며 작게 귓속말했다.
“안 갈아탔어. 2황자가 일방적으로 귀찮게 구는 거라고.”
어린애는 몰라도 돼.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자 카를로트는 이번에도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제의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대신관이 기도사 읊는 시간이 끝나고, 다음으로 높이 솟은 계단 끝 제단에 헌화하며 신의 축복을 받는 순서였다. 도로테아가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등장했다.
“이상하네. 저 여자, 와서 깐족 댈 줄 알았는데 안 왔잖아?”
카를로트의 말마따나 도로테아는 내게 시비 걸러 오지 않았다. 매번 오뚝이처럼 어김없이 와서 시비를 걸던 도로테아라서 의아하긴 했다. 어쨌든 도로테아를 상대해야 한다는 귀찮은 일이 줄었으니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신전의 성의로 성장(盛裝)한 도로테아의 모습은 평소보다 더 생기가 있었다. 유독 얼굴색이 좋고 건강해 보이는 건 단순히 웃고 있기 때문일까? 도로테아는 세계수가 피워낸 꽃을 두 손으로 모아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을 중간쯤 올랐을 때였다.
갑자기 도로테아가 몸을 덜덜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일순 동요가 일었다. 분명 직전까지만 해도 혈색 좋던 도로테아의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신 상태였다.
‘갑자기 쓰러지다니, 이상해. 그런데 저게 연기일 수가 있나?’
아무리 도로테아가 뒤로 앙큼을 떠는 성격이긴 하지만 저 정도로 실감 나는 연기를 할 수는 없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 머지않아 앙겔로스 공작과 이슈타르 신관들이 도로테아를 데리고 대기실로 향했고, 제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말로는 걱정하는 척 카를로트가 실실 웃었다. 어차피 이어지는 연회에는 얼굴만 내비칠 계획이었기 때문에,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앞에 놓인 음식을 깨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져 고개를 들자-.
대신관을 위시한 열 명이 넘는 신관들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쉽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대신관의 얼굴에는 의지가 엿보였다. 사제들이 내 앞에 있어서인지 대광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몰려 있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이번에도 거절했다.
내가 이 세계를 구원할 거라고 말하는 친엄마, 난데없이 내린 신탁과 나를 구원자라고 부르는 이슈타르의 신관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신이든 뭐든 이 세계는 내가 어떤 역할을 해내길 바라고 있었다. 대신관과 대치 아닌 대치를 벌이고 있을 때, 그 사이를 헤치고 누군가 다가왔다.
황제 대리로 참석한 1황자 아덴미르였다. 그 뒤로는 흉흉한 기세의 페르디아 공작이 서 있었다.
아덴미르가 내 의중을 묻듯 눈길을 던지자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대신관. 아무리 나라도 싫다는 사람을 강요할 권한은 없어.”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백성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 어렵게 들렀건만 기다림이 길어지니 원성도 높아졌다.
그런 생각까지 들 때였다.
“못할 이유라도 있나 보군. 신에게 거리낄 일이라도 한 건가?”
익숙한 듯 낯선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언젠가 봤던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게이브 제나이드라고 했던가. 남마탑주로서 귀빈으로 초대된 듯했다. 이 남자에 대해서는 레이안을 통해 꾸준히 보고 받고 있었다. 앙겔로스 공작의 청으로 도로테아의 스승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앙겔로스와 관련이 깊은 자. 이 남자가 나섰다면 답은 하나였다.

100화. 힘의 개방, 엘로디의 권능
5–7 minutes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누구나 바라는 제단 주관을 내게 떠넘기려는 건? 맹렬하게 돌아가는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제단 주관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나는 게이브를 더 떠보려고 일부러 그를 도발했다.
“도로테아 양이 속상해할 테니 감히 제가 맡겠다고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어라, 그러고 보니…… 스승이신 게이브 님께서는 도로테아의 곁을 지키지 않으시나요?”
게이브를 인성 쓰레기로 몰아가려고 했지만, 상대는 강적이었다.
“앙겔로스 공작이 곁에 있는데, 내가 뭐 하러. 그래서, 끝까지 못 하겠다는 건가?”
그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미루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자 대신관까지 합세해서 나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신탁의 주인공인 구원자께서 신께 꽃을 바친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요. 신의 대리자로서 간곡히 청합니다.”
그에 가세하듯 백성들의 외침이 크게 들려왔다.
자칫 비난으로 변질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커다란 손이 내 머리 위에 툭, 내려앉았다. 고개를 들자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페르디아 공작의 옆얼굴이 보였다.
“그래.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감히 내 딸을 겁박한다면 상대가 누구든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 주겠다는 아버지로서의 선언.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이후로 페르디아에 소속되어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만큼은 페르디아의 울타리가 든든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결심이 섰다. 분명 함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게이브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얼굴색을 바꾸며 부리나케 대답한 것은 대신관이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레이디 페르디아께서는 신께서 신탁을 내린 구원자십니다!”
내 대답에 신관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게이브의 표정은 미동 없이 그대로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준비해야 한다는 신관의 부름에 뒤따라가면서 레이안에게 눈짓했다.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잘 살피라는 신호였다. 원칙상으로는 내의부터 전부 갈아입어야 하지만, 거기까지는 미처 준비되지 않았다. 나는 신관이 건넨 성의의 겉옷을 걸치고 대중 앞에 섰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계단 아래 대기하고 있는 레이안의 위치를 확인한 후 세계수의 꽃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 한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부유하는 신성의 빛이 진하게 아롱졌다. 이윽고 계단의 끝, 제단 앞에 섰다. 제단 너머에는 세계를 끌어안은 이슈타르의 신상이 있었다. 나는 제단 위에 시든 곳 하나 없이 싱그러운 세계수의 꽃을 올렸다. 헌화가 끝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새하얗던 제단이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머리 위에서 기묘한 감각이 느껴지더니, 탐욕이 침묵을 깨고 외쳤다.
이슈타르의 신상 위 공간이 쭉 찢어지더니, 까마득한 암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서 마수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주변을 날카롭게 경계하던 레이안은 공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그 순간 내 허리를 붙들고 제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아 없는 마수들은 인간이라는 먹잇감에 눈이 돌아 사정없이 공격을 퍼부어 댔다. 성스러운 제의 중이던 대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덴미르의 명령에 배치되어 있던 병사들이 마수와 대적하기 시작했다. 나를 내려놓은 레이안이 내 상태를 살폈다.
레이안이 발검하며 날아드는 비행형 마수 한 마리를 갈랐다. 권능을 지닌 4대 가문 사람들이 선봉에 나서는 게 눈에 띄었다. 페르디아 공작이 검을 뽑았고, 얀시가 장갑을 벗었다. 검을 챙겨오지 않은 카를로트도 주위에 널브러진 검 한 자루를 쥐었다. 게이브 제나이드는 어디로 내뺀 건지 보이지 않았다. 크룬델 공작과 아덴미르도 마수를 처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마수들은 겨우 생성된 저지선을 뚫고 공격을 감행했다.
이미 백성들은 대광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뒤돌아 달렸지만 빽빽하게 들어찼던 광장 출입구는 이미 병목 현상으로 꽉 막힌 채였다. 그때 페르디아의 기사 한 명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각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이곳에서 피하셔야 합니다, 아가씨.”
무력이 없는 내가 이곳에 있어 봤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못 박힌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대로 달아나게 되면 이번 일의 책임은 온전히 내가 뒤집어쓰게 되었다. 나와 관련이 있든 없든, 내가 제단을 주관하면서 균열이 열린 것이니까. 사람들은 언제나 책임을 떠넘길 누군가를 찾곤 했다. 비로소 게이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추락하게 만들기 위해서. 특히 이슈타르의 제단에 헌화하는 동시에 균열이 발생한 건 책임을 떠밀기 딱 좋은 구도였다. 상황은 시시각각 악화되었다. 여기저기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고 피가 튀었다. 아비규환이다. 레이안이 예견했던 대로 인파 속에서 난전이 펼쳐졌다.
카를로트가 욕설을 내뱉는 게 들렸다. 지반 붕괴라는 특성상 사람이 많은 지금, 속 시원하게 권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디아의 기사가 나를 재촉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한 발짝 내딛자 레이안이 그림자처럼 한 발짝 떼었다. 나는 레이안을 돌아보며 부탁했다.
나를 호위하기에는 레이안이라는 전력은 강력했다. 권능을 사용하지 않아도 레이안의 검술은 뛰어났으니까. 그것을 빼돌리지 않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레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안부를 빌어 준 후 우리는 서로 지나쳤다. 나는 기사의 엄호를 받으며 후문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발이 묶이고 말았다.
난데없이 탐욕이 소리쳤기 때문에. 그와 동시에 소름 끼치는 상황이 펼쳐졌다.
마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해 쏠린 것이다. 이내 마수들이 모두 내게 달려들었다.
기사가 당황하며 검을 휘둘렀으나 역부족이었다. 개인의 힘으로 마수 떼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기사를 그대로 지나친 마수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장 빠른 비행형 마수의 칼날 같은 발톱이 나를 관통하려는 바로 그 순간. 푹-! 무언가 꿰뚫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그런 내 시야를 가린 것은, 누군가의 단단한 등이었다.
어느새 내 앞에 선 페르디아 공작이 마수들의 접근을 막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오른팔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며. 공작은 분명 고통스러울 텐데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파괴의 페르디아, 그중 가주인 페르디아 공작의 권능은 가공할 경지의 괴력이었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강한 바람이 일어 마수들이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공작은 인간이었다. 공격을 감행할 때마다 바닥을 적시는 피의 양이 늘어났다.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공작이 피식 웃었다.
페르디아 공작은 묵묵히 마수들에게서 나를 지켜 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 있는 나는 볼 수 있었다. 공작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여기서 빠져나간다고 해도, 네가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 없군.”
쯧, 혀를 찬 공작이 달려드는 마수를 또 한 번 갈랐다. 아까 탐욕이 소리치는 바람에 몰려들던 마수들의 주의는 다시 분산되어 위험은 훨씬 줄었다. 하지만 대광장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인간들은 점점 지치고 있었고, 대피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마수들은 끊임없이 쏟아졌다. 균열이 언제 닫힐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러다 정말 다 죽게 생겼다. 스스로의 무력함에 입술을 짓씹을 그때였다.
온몸에 살포시 내려앉듯 성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신관들과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만 들은 게 아니었다. 추측하건대 4대 가문의 사람들과 이슈타르의 신관들도 함께 들리는 듯했다. 계시가 이어졌다.
그 음성이 끝나는 순간, 벼락처럼 내리치는 깨달음이 있었다.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어.
페르디아 공작이 나를 뒤쫓으려 했지만, 달려드는 마수들 탓에 따라오지 못했다. 나는 하염없이 달렸다. 난전 속에 뛰어들어 마수의 시체를 밟고, 넘어지며, 또 일어났다.
울분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나서지 않으면 끝나지 않았다. 나는 기어코 계단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발견한 이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독을 정화하는 권능이라고 원작에 나와 있어서 그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스스로 한계에 가둬 버린 것이다. 하지만 내 권능은.
원작이라는 걸 몰랐다면, 내 권능을 독 정화라고 생각했을까? 제단에 거의 도달했을 때였다. 하필 제단 바로 위 균열이 있어서 마수들이 곧장 나를 공격했다. 쐐액-! 어디선가 날아든 검이 마수의 숨통을 끊었다. 보진 않았지만, 레이안의 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검게 물든 제단. 나는 고민하지 않고 그곳에 두 손을 올리고 힘을 방출했다. 떠다니던 신성의 빛무리가 내게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

‘이슈타르 님. 저 개죽음 당하기 싫으니까 더 도와주세요.’
그런 신성 모독 같은 기도를 되뇌며 정화를 시도하자, 손이 닿은 곳부터 검은 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쩍 갈라졌던 균열이 서서히 아가리를 아물 듯 줄어들었다. 마지막 남은 기운까지 모조리 짜내어 힘을 다 퍼붓자, 제단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백성들의 외침을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선동 하나는 끝장나는 사람들이었다. 어쨌든 균열을 닫았다. 힘이 모두 소진되었음을 느끼며 제단에서 손을 뗀 순간이었다. 비틀-.
눈앞이 쉴 새 없이 점멸하더니, 이내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몸이 뒤로 넘어가며, 추락하는 감각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다.